소설리스트

96화 (96/265)

여기 저기서 회한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그 어느 청춘의 날, 그 시기에 만나 중년과 장년의 시기를 시장개척에 바쳤던 지 회장의 부하들. 그들은 그날로 돌아갔다. 펄펄 날던 지 회장을 모시고 세계 시장으로 돌격하던 그 날...

지회장은 왕년의 용사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상당수의 부하들에게는 그 이름까지도 불러주었다.

“김 이사...”

“안 상무...”

“도 실장...”

그때마다 노장들은 굽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회장님, 회장님.

그들에게는 그 자리가 천국이었다.

“회장님!”

준공식 직전 이진웅의 아내가 말했다.

“그래...”

“아버지의 꿈이에요. 이제 현실이 되었어요.”

“그래...”

“이 꿈은 저희가 잘 가꾸어 나갈 게요. 그리고 아버지처럼 꿈을 꿀 게요. 더 멋지고 더 가치 있는 기업으로 발전시키면서 말이에요.”

“그래...”

“자르세요.”

그녀가 커팅 가위를 건네주었다. 지 회장은 가위를 테이프에 들이댔다. 자를 힘은 없지만 갖다대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펑펑!

축포와 함께 꽃술이 쏟아졌다. 꽃술들은 축복처럼 지 회장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상윤아.”

지 회장이 장남을 호명했다.

“예, 회장님!”

“내 개인 재산 말이다.”

“예...”

“얼마나 되느냐?”

“현재 가치로 3600억 정도 됩니다.”

“경영권 문제도 있으니 주식은 너희가 나눠서 상속을 받아야지.”

“그럼 한 800억 정도...”

“오늘 참석한 창사 멤버 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 돈으로 돕거라. 그들은 내 부하들이기에 앞서 내 동료들이야.”

“예.”

“그리고 아까 그 젊은 의사...”

“채윤도 한의사입니다.”

“그 한의사가 내 정신을 찾아주었지?”

“아셨습니까?”

“그럼, 목숨 가진 동물이 자기 목숨 구해준 은인 모를 수 있을까?”

“......”

“그 의사는 따로 성심껏 챙기고.”

“걱정 마십시오. 채 선생은 저희 사비로라도 챙기겠습니다.”

“아니야. 마지막 가는 길에 이 멋진 진료비를 빚지고 갈 수야 없지.”

“회장님.”

“좋구나. 이 순간을 보게 되다니...”

“회장님...”

“열심히 살다 오거라. 돈 몇 푼에 형제들끼리 아귀다툼하지 말고.”

“명심하고 있습니다.”

“직원들 대우도 충분히 하고. 직원 먼저 챙기면 실적은 따라 오게 되어 있어.”

“회장님.”

“저기 내 부하들이 증거 아니냐. 너희라면 저 나이에 네 부하직원들이 이런 자리에 달려올 수 있겠느냐?”

“회장님...”

“좋구나... 이제 눈을 감아도 되겠어.”

“......”

“장례는 번거롭게 치루지 말거라. 조의금은 받지말고... 나 때문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인사 잊지말고...”

지 회장의 말은 거기가 끝이었다. 자신의 꿈이었던 풍용스카이벨트. 태산처럼 올라간 메인 빌딩을 보며 스스륵 눈을 감은 것이다. 그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흐뭇한 미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회장님!”

역전의 용사들이 그 옆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울지 않았다. 눈물은 지 회장을 욕되게 하는 것. 지 회장의 부하직원이자 동료들답게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현실로 나온 불사약 한 방울.

신은 허용했고 지 회장은 허용 받았다.

윤도는 한의사의 의술로서 그걸 매칭 시켰다. 보석보다 빛나는 시도였다.

국대급 SS병원으로의 왕진-1

국대급 SS병원으로의 왕진-1

지회장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러졌다. 대기업의 총수답지 않은 풍경이었다. 부의금은 물론 일반 조화도 받지 않았다. 지 회장의 빈소에 놓인 조화는 고작 12개였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그의 심복이었던 몇 사람, 해외에서 온 개발도상국 대통령들의 것만 부득 세운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윤도의 조화였다.

윤도는 장례방침을 몰랐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마지막 하루의 꽃을 피워준 인연. 조화를 보냈지만 접수 직원들에게 거절을 당했다.

그걸 본 지수혜가 꽃을 받았다.

“이 조화는 가장 가까운 곳에 세우세요.”

지수혜의 지시가 떨어졌다. 윤도의 조화는 지 회장 빈소의 왼쪽에 놓여졌다. 윤도에 대한 높은 예우였다. 문상을 했다. 그러나 유한한 생명.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르는 건강한 하루의 가치. 어쩌면 지 회장이야 말로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하루를 누리고 간 사람일 수 있었다.

‘부디 좋은 데서 영면하시길...’

국화를 헌화하며 진심으로 빌었다.

며칠이 지났다.

윤도의 하루는 여전히 바빴다. 정나현이 예약을 조절하기는 했지만 쉴 틈이 없었다. 그때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어, 이 선생님.”

진료결과를 정리하던 윤도가 파뜩 고개를 들었다. 갈매도의 사수 이창명이었다.

“채 선생, 아니, 채 원장님. 보기 좋은데?”

“웬일이세요?”

윤도가 일어나 창명을 맞았다.

“이야, 역시 이제는 막 명의 삘이 나네. 이거 내가 갈매도에서 갈구던 그 채윤도 선생 맞아?”

“농담 그만하시고... 휴가예요?”

“응, 이제 전역 준비도 해야 하고...”

전역준비라면 병원 복귀였다. 인턴을 마치고 공보의로 간 이창명이었다.

“그래서 SS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야,”

“아, 거기 진료부장님이 숙부님이라고 그랬죠?”

“응... 흉부외과 전공이시지. 다시 S병원으로 가야하나 싶어 진로 상의 좀 할 겸 찾아갔는데...”

이창명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뒷말을 이어놓았다.

“채 선생, 혹시 시간 좀 낼 수 있어?”

“술 한 잔 하시게요? 당연히 제가 한 잔 쏴야죠.”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설명이 좀 긴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실은 숙부님 환자 중에 어려운 케이스가 있어서...”

“SS병원에요?”

“특발성 폐고혈압환자인데 환자 조부모께서 숙부님 은사이셔. 그래서 특진환자로 보고 있는 모양인데...”

“......”

“채 선생이 한 번 봐주면 어떨까 싶어서.”

“제가요?”

“이 환자 폐고혈압이 원인불명이야. 그러다보니 폐동맥류가 혈관 여기저기에 생겨 혈액 순환이 안 되는 통에 말기 폐부전이 되어서 폐 기능을 거의 다 잃었어. 얼마 전에는 심장마비까지 와서 죽다가 살았고 막말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지.”

“선생님...”

“알아. SS병원이 어떤 병원이라는 거. 하지만 S병원이나 SS병원에서도 손 못 쓸고 죽어나가는 환자, 한두 명 아니야.”

“......”

“이게 폐이식을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채 원장 알다시피 이식이 쉬워? 이런 경우라면 장기이식 신청해봤자 차례 오기 전에 죽는 거지.”

“......”

“숙부께서 우리나라에선 불법인 생체이식까지 고려해봤는데 의료윤리위에서 반대 때렸나봐. 폐를 기증하겠다고 나선 가족 두 명도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거든. 자칫하면 셋 다 위험해질 수 있어서...”

“......”

“찾아갔더니 그 고민 얘기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농담 삼아 채 원장 명침 이야기를 했지. 잘 아는 신들린 한의사가 있다. 나랑 갈매도에서 같이 근무했는데 침이 진짜 기가 막히다. 속된 말로 죽은 사람도 살린다. 그렇게 안타까운 환자면 채 원장 모셔다 침이라도 한 번 시도해보는 게 어떻겠냐?”

“......”

“숙부님이 처음에는 그냥 웃으셨는데 내가 검색 때려서 채 원장 활약상 보여줬더니 반전이 되더라고. 나보고 다리 좀 놔보라는 거야. 그쪽 가족들도 찬성하고 있고...”

“......”

“채 원장이 신침이잖아? 바쁜 줄 알지만 한 번 도와주면 안 될까? 환자가 이제 고작 열여덟인데 열여섯 때 이미 수학올림피아드 나가서 은상까지 딴 수재야. 목숨이야 똑 같은 거지만 아깝잖아?”

“이 선생님...”

“아아, 여기 상황 보니까 강요는 못 하겠어. 게다가 공보의 때 내가 한 만행도 잘 알고 있고...”

“아닙니다. 그 만행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섰는 걸요.”

윤도가 웃었다.

“사양이지?”

“그보다는... SS병원 같은 데서 저한테 그런 제의를 했다는 게...”

“환자가 우선이잖아? 우리 숙부님은 나처럼 쫌팽이 아니셔. 원래 응급구조의까지 겸하던 분이라서 뭐든 환자 우선이시지.”

“......”

“채 원장.”

“그렇게 열린 분이라면 가보기는 하겠습니다. 다만 시간은 제 진료가 끝난 이후로...”

“땡큐, 그럼 언제 시간이 되는 거야?”

창승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당연히 오늘 저녁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응급한 환자라면.”

“알았어. 나 당장 숙부님께 가서 말씀드릴게. 오케이?”

“네.”

이창승은 흥분한 상태로 뛰어나갔다.

SS병원...

윤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꿈은 아니었다. SS병원은 S병원과 쌍벽을 이루는 국내 굴지의 첨단 병원.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이 병원에서 손을 놓는 환자는 희망이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긍지와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렇기에 이 제안이 믿기지 않는 윤도였다.

‘말기 폐부전...’

오장 중의 폐장이 작살났다는 의미였다. 말기라함은 긴 시간 동안 이어진 병세다. 한 마디로 바닥까지 진기가 끊겼을 테니 고치기 어려웠다. 더구나 원인불명의 특발성 폐고혈압, 그로 인해 폐에 동맥류가 생겨 피 순환이 잘 안 되는 상태...

장침을 바라보았다.

팅!

침 끝에서 묘한 탄성이 건너왔다. 소리없는 탄성이 심장을 흔들었다. SS병원이 두 손 든 환자... 묘한 도전의식이 심연에서 끓어올랐다.

“원장님!”

윤도의 긴장은 승주의 인터폰 소리 때문에 깨졌다.

“다음 환자 보내요?”

“어? 보, 보내.”

장침과 함께 상상을 내려놓았다. 당장은 여기 환자에 집중할 때였다.

이날 마지막 환자는 이농이었다. 저 먼 부산에서 온 환자였다. 환자는 50대 여자였는데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환자의 남편이 조기퇴직을 했다. 남편이 집안에 들어앉자 발병을 했다. 남편이 출근하면 자유롭던 환자.

남편이 옆에 붙어있으니 일상이 불편해졌다. 남편이 외출하는 날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의 외출은 가뭄에 콩 나듯 이었다. 직장 떨어지니 지인들도 떨어지는 것이다.

남편을 탓할 수 없었다. 그는 성실한 가장으로 살았다. 덕분에 연금이 있어 노후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 바가지를 긁을 수도 없었다. 그 스트레스가 담으로 갔다. 쓸개에 불덩이가 쌓인 것이다.

“입에서 쓴맛이 나죠?”

진맥을 마친 윤도가 물었다.

“네...”

진맥대로 담의 열이 맞았다.

그러나 그 또한 시작은 신장인 것.

시침이 시작되었다. 기적으로 불리는 방송의 치료와 달리 영약은 쓰지 않았다. 신장을 위해 신수혈을 잡았다. 귀 옆의 이문혈에서 일침삼혈을 넣고 바로 관원혈로 옮겨갔다.

마지막으로 대거혈을 장악하자 이농 잡히는 감각이 손가락으로 전해왔다. 막혔던 기의 수로가 뚫렸으니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산해경의 영약 ‘문경’은 잊어도 될 윤도였다.

짤랑!

윤도가 환자의 왼쪽 귀에 방울을 흔들었다.

“어머!”

환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들리죠?”

“어머, 어머머...”

윤도의 종소리는 은은하게 멈추지 않았다. 환자의 청각은 쉴 새 없이 그 소리를 잡아냈다. 오른쪽 귀를 막아도 잘 들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오른쪽 귀를 막으면 핸드폰 벨소리도 들리지 않던 귀였다.

“세상에, 이게 기적이 아니네. 나한테도 이런 일이 일어나네.”

환자의 입은 귀에 걸려서 내려오지 않았다.

“음식도 신장 때문일까요? 제가 요즘 좀 짜게 먹는 편이라고 구박을 받아서요.”

환자는 정중한 자세로 윤도 앞에 앉았다. 자신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 앞에서는 지위도 나이도 소용이 없었다.

“맞습니다. 짠 맛은 신장에 좋지요. 그렇기에 몸이 짠 맛을 땡기는 겁니다.”

“그럼 계속 짜게 먹어야겠네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장육부는 조화가 필요하니 짠맛은 지나치게 하지 말고 그동안 소홀했던 걸 더 드시기 바랍니다. 폐에 좋은 매운 맛, 심장에 좋은 쓴 맛, 간에 좋은 신 맛... 골고루...”

“그렇군요.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나가시면서 한약재를 받아 가시고 다음 예약 날을 잡아가세요. 한 번 더 오셔서 시침을 받으면 완치가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환자는 거푸 허리를 숙이고 나갔다. 마감이 되자 윤도가 약제실로 걸었다.

“아저씨.”

진경태는 여전히 바빴다. 하지만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새 식구가 늘었으니 진경태를 보조하는 양종일이 그였다. 그는 D대 한약재관리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 교수 말을 듣고 산골의 진경태를 찾아왔었다. 열정이 보였지만 진경태는 그를 거둘 형편이 아니었다.

며칠 산행에 데리고 다니며 약재 보는 법과 캐는 법을 가르쳤다. 한약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두었언 양종일. 일손이 딸리자 윤도의 허락을 구한 후에 양종일을 픽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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