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265)

세 개의 동맥류가 녹아나자 이제는 기세가 되었다. 혈관탄력도 손에 감지될 만큼 확실해졌다. 나무관 같던 혈관에서 뻣뻣함이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동맥류까지 녹아나가자 환자의 숨소리가 안정되었다. 얼굴의 청색증도 시나브로 나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산소포화도가 상승곡선을 그렸다.

“선생님, 산소농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대기 중인 스태프가 소리쳤다.

“다행이네요.”

“정말 침으로 폐동맥류를?”

묻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선생님이 옆에서 함께 기도해준 덕분입니다.”

“저 부원장님께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윤도가 수락했다.

“맙소사!”

안으로 들어온 이철중이 비명 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환자의 상태는 아까와 달랐다. 척 보아도 호전세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데이터 역시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국대급 SS병원으로의 왕진-3

국대급 SS병원으로의 왕진-3

“세상에, 우리 딸 폐부전이 사라진 건가요?”

보호자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아직은 아닙니다. 폐동맥류를 잡고 두꺼워진 혈관에 탄력을 약간 줘서 미미하게나마 혈관 다이어트를 시켰습니다. 다행히 심장의 피가 폐로 가는 길은 열렸으니 폐부전은 천천히 나아질 것 같습니다.”

“세상에나...”

“며칠 후에 한 번 더 와서 같은 시침을 하겠습니다. 그럼 폐동맥류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치료비는 어떻게?”

“환자가 폐가 약하지만 사실은 신장의 기 또한 거의 바닥입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약을 고려해 신장의 기혈을 올리는 탕약을 지어드릴 테니 어느 정도 원기를 찾으면 복용하도록 해주세요. 꼭 복용 하셔야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철중과 스태프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건 윤도의 신념이었다. 이 환자는 신과 폐를 보해야만 부작용이 없을 일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윤도가 이철중에게 작별을 고했다.

복도에 나서자 아까 그 강기문 박사가 보였다. 스태프 중의 한 사람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사실은 그도 결과가 궁금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윤도는 일부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당신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몸으로 보내는 항변이었다.

“선생님.”

그 뒤로 이철중이 따라나왔다. 강기문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받아 가시죠.”

그가 봉투를 내밀었다.

“뭐죠?”

“저희 병원 의사가 아니시니 진료비도 못 받으실 테고... 해서 저희 병원 발전기금 중에서 일부를 담았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양방 한방의 협력 차원에서 성의로 아시고...”

“부원장님...”

“그리고... 이 일은 양 한방 협력의 미담으로 보도자료를 내겠습니다. 선생님 역할을 충분히 강조해서...”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안에 든 돈은 300만원이었다. 그건 겉에 쓰인 내용으로 알 수 있었다. 300만원, 적은 돈은 아니지만 봉투를 사양했다.

“채 선생님.”

“죄송하지만 여기는 병원입니다. 개인의 사택 왕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공식 병원에서 진료비를 이렇게 주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얼마가 되었건 오늘 제가 환자에게 끼친 치료효과에 비례해 환자의 치료비에서 지불해주시기 바랍니다.”

“......!”

그 말에 부원장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정당한 요구였다. 너무나 정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환자의 치료효과에 대한 기여의 비례... 그건 곧 윤도 한의학의 진료 가치에 대한 요구였다. 그대로 두었으면 죽었을 환자.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병원 입장에서는 하등 손해날 게 없는 일. 환자가 병실을 차지하고 있는 한 병원비는 보호자와 국가, 양쪽에서 채워줄 일이었다.

윤도는 궁금했다. 병원은 과연 윤도의 한의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줄 것인가?

‘한방 맞았군.’

부원장이 고뇌하는 사이에 윤도는 멀어졌다.

“하하핫!”

하지만 부원장은 결국 웃고 말았다, 대물을 만났다. 그게 한의사건 의사건 상관없었다. 의술이라는 맥으로 통하는 한 이건 명백한 축복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린 일 아닌가?

“좀 건방진데요?”

뒤에서 지켜보던 스태프가 쓴 말을 날렸다.

“건방져도 좋으니까 자네도 저 정도 좀 되어봐.”

부원장이 묵직하게 되받았다.

“예?”

“진짜 의사잖아? 시스템의 도움 없이도 시스템 이상의 실력을 갖춘.”

“......”

“정신 바짝 차리자고. 한방, 이거 무시할 게 아니네.”

부원장은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채 선생.”

윤도가 병실을 나오자 이창승이 다가왔다.

“성공했다며?”

“예... 다행히...”

“으아, 나 제대하면 아예 채 선생 밑으로 가면 안 될까? 장침 좀 배우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무튼 고마워. 내 생각 같아서는 어디 가서 한 잔 했으면 좋겠지만 시간도 그렇고... 다음에 한 잔 찐하게 때리자고.”

“그러죠.”

이창승과 헤어져 스포츠카에 올랐다.

‘헤이!’

윤도가 손을 내려 보았다. 전에는 침 한 방 제대로 놓지 못해 벌벌 떨던 손. 이제는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수고했다.’

쪽!

손에게 키스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운 게 참 많았다.

그 밤, 윤도는 다시 산해경에 있었다. 해내서경 개명의 동쪽이었다. 여섯 신의들은 오늘도 기괴한 생명체를 구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무기는 청랑박이었다. 신의들의 청랑박에서 불사약 방울이 떨어졌다. 잿빛 얼굴의 생명체에 목숨이 깃들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청랑박에 손을 대자 벼락이 떨어졌다.

‘으헉!’

윤도는 기겁을 하고 손을 뺐다.

쩌릿!

뼈를 타고 오는 통증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지 회장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 청랑박의 불사약 역시 윤도에게 허용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한 번은 허용되었던 일. 어쩌면 이 다음에 또 누군가 기막힌 하루나 이틀이 필요하다면 비슷한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두고 신비경을 거두었다. 산해경은 넓고 영약은 많으니까.

“아저씨!”

이른 아침, 윤도가 한의원에 도착했다. 약제실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아, 거 참... 푹 좀 쉬고 오라니까 또 일찍 오셨네. 저 감시하려는 겁니까?”

진경태가 웃었다.

“맞아요. 아저씨가 쉬나 안 쉬나 보려고 감시하는 겁니다.”

윤도가 도시락을 내놓았다.

“뭐죠?”

“어머니가 싸주시네요. 아저씨 하고 종일이가 고생하는 다 아시잖아요.”

“흐음, 뭐 이런 감시라면야... 종일아!”

진경태가 종일을 불렀다. 약재를 수습하던 종일이 다가왔다.

“잘 먹겠습니다.”

종일이 반색을 하며 수저를 들었다. 입맛 까칠한 아침, 간단하게 밥 말아 먹기 좋은 도가니탕이었다.

“저는 약제감수성 실험 좀 체크할 게요.”

“그보다 신문 먼저 체크해야 할 걸요.”

“신문요?”

“반도일보에 원장님 기사가 났어요.”

종일이 신문을 내놓았다.

“.......!”

신문을 넘기던 윤도의 시선이 멈췄다. SS병원과의 협진보도였다.

<자존심보다 환자를 고려한 양한방협진, 폐이식대기자에게 새 희망 제시.>

<말기 폐부전환자의 폐동맥류와 폐동맥경화를 침술로 넘어선 쾌거.>

<장안 명침명의 채윤도, 양방의 본산에 구원등판해 절망의 승부를 뒤집다.>

타이틀에 이어 몇 가지 소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은 부원장과 환자, 그리고 보호자의 네 명이었다. 다들 환한 얼굴이었다.

차분하게 기사를 읽었다. 병원 보도자료다 보니 병원 쪽 입장이 많았다. 하지만 말미의 부원장 인터뷰에서 팩트를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이 쾌거는 한방 침술 덕분입니다. 우리 양방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한방도 그렇게 발전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양한방 협진을 전향적으로 고려해볼 생각입니다. 어려운 초청이었고 난이도가 굉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명침자침을 해주신 채윤도 한의사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철중의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윤도 마음의 피로감을 후련하게 씻어가 주었다. 진료 가치의 평가는 사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환자에게 받은 진료비를 나눠준다고 해야 얼마를 줄 것인가?

기분 좋게 신약개발에 매진했다. 성분분리는 안정적이고 작용기전의 규정도 문제가 없었다. 약제감수성 검사도 좋았다. 그동안 어린이 알레르기 비염과 아토피 환자에게서도 호평을 받은 새로운 탕제. 이제는 류수완에게 뒷일을 맡겨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사장님, 채윤도입니다.”

원장실로 돌아온 윤도가 전화를 걸었다.

“원장님, 신문기사 보았습니다. 인터넷도 난리던 데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수고하시는데 건강음료라도 몇 박스 보내드리지 못하고...”

“한의원에 널린 게 보약인데 무슨 건강음료요?”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요. 아무튼 굉장한 일 하셨습니다. 무려 SS병원이 인정한 쾌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그 병원에서 인정 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하여간 원장님이 걸어가면 역사가 되는군요.”

“그보다 신약 말입니다...”

“아, 마무리 실험이 끝났습니까?”

“예, 사장님 쪽 실험은 어떻습니까?”

“그렇잖아도 제가 약리실에 체크해 보았는데 기존 출시약제에 비해 효과와 안정성이 압도적입니다. 하도 고무되어 있길래 흥분 가라앉히고 부작용 꼼꼼히 체크하라고 했습니다. 효과도 중요하지만 부작용 체크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약제부작용.

어쩌면 그거야 말로 신약의 성패일 수도 있었다. 저 유명한 아스피린만 봐도 그렇다. 깨알 같은 부작용만 한 장이다. 한 편으로는 오싹한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만큼 임상 체크에 철저했다는 반증이었다.

“그럼 이제 제약시장을 목표로 한 번 달려볼까요?”

“그 말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찾아뵙겠습니다.”

류수완 사장.

그는 정말 총알이었다. 고작 40분 뒤에 변호사와 약리실장을 대동하고 날아왔다. 진경태를 배석시킨 채 정식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류수완은 화끈했다. 계약금 명목으로 10억을 꽂아준 것이다.

“원장님!”

서류를 받아든 류수완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잔뜩 고무가 된 얼굴이었다.

“바로 미국에 특허출원내고 걔들 시장까지 싹 먹어치우겠습니다. 저한테 맡긴 거 후회하지 않게 해드릴 테니 다음 약도 있으면 부탁합니다.”

류수완 허리가 정중하게 숙여졌다. 너무나 깍듯해 윤도가 말릴 정도였다.

“아저씨.”

류수완이 떠난 후 윤도가 진경태를 바라보았다.

“축하합니다. 원장님이라면 해낼 줄 알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이건 순전히 아저씨하고 직원들이 도와준 덕분이에요.”

“아뇨. 이건 원장님이 없으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이지요. 원장님의 명침이 최적 혈자리 반응을 찾아냈고 그 덕분에 최고의 작용기전을 맞출 수 있었으니까요.”

“침만으로 될 일은 아닙니다. 아저씨가 세세하게 지원해주지 않았으면 제 몸이 둘이 아닌 바에야 무슨 재주로 실험에 약재 수급까지 맞췄을까요?”

“원장님은 참... 나이도 어리면서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아무튼 정말 수고 하셨어요.”

윤도는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계약서>

<계약금 10억>

보기만 해도 후련했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장침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였다. 어린 환자들을 위해 마음 속으로 약속한 치료약 개발. 그걸 이룬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약침공부가 높아졌다. 내공도 쌓였다. 그건 아주 중요한 발전이자 경험이었다.

일단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동시에 미안해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혼자 지평을 찾아가는 아들. 그럼에도 수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아들이었기에 그 감격은 더했다.

“잘했다. 정말 고생 많았어.”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의 말이 겹쳐왔다. 윤철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녀석의 반응은 좀 달랐다.

“형, 한턱 내. 나 용돈도 좀 주고.”

직설적이다.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다음은 부용이었다. 신약개발의 단초는 그녀에게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만한 시설투자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아직은 불가능할 일이었다.

“정말요?”

그녀 역시 자기 일보다 기뻐했다.

“부용 씨 덕분이에요.”

“아뇨. 아침 신문 봤어요. SS병원에서 인재 하나 살렸더라고요. 전 선생님 만나 너무 좋아요. 선생님이 해내실 줄 알았어요.”

“한 턱 쏠 게요. 저녁에 시간 좀 내세요.”

“선생님이 그럴 시간이 있어요?”

“없어도 내야죠. 날마다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거 정말이죠?”

“네!”

“그럼 오늘은 직원들에게 쏘세요.”

“네?”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선생님처럼 소수정예 직장은 케미가 생명인데 승전보 울린 날 대표가 옆길로 새면 좋지 않아요.”

“......!”

“죄송해요. 주제넘은 말인 줄 알지만 제가 처음에 그랬거든요. 그거 비싼 수업료 내고 배운 경험담이에요.”

“네...”

수긍이 갔다. 역시 부용의 사업가 DNA는 보통 레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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