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65)

“좋아요. 그럼 일단 우리 직원들 챙긴 후에 만나요.”

“네, 언제든 콜 하세요. 아, 그리고 오빠가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는 거 아시죠? 조만만 좋은 소식 갈 거예요.”

부용은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실장님!”

그 길로 정나현을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강외제약과의 신약개발 정식 계약을 알리고 저녁 회식장소 물색을 통보했다.

[예산은 무한대.]

[직원들 의견 반영 100%.]

윤도의 조건은 직원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원장님, 축하드려요.”

“축하해요. 너무 잘 됐네요.”

직원들이 들어와 인사를 전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달달하게 들렸다.

“자, 그럼 환자 받아볼까요? 빨리 하고 회식 가자고요.”

윤도가 진료개시를 알렸다.

첫 환자는 30대의 난시환자였다. 영화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였는데 눈을 혹사하다 난시가 생겼다. 그러나 정밀작업을 계속하는 통에 더욱 심해졌다. 이제는 저만치서 오는 버스의 번호판도 두 겹으로 겹쳐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어떤 날은 애인 얼굴도 못 알아봐서 욕을 먹곤 합니다.”

문진을 받던 그가 병원진단서를 보이며 웃었다. 덕분에 중요한 그래픽 작업을 미뤄둔 환자. 그 쪽에서는 독촉이고 눈 건강이 안 좋다보니 7전8기 끝에 윤도의 한의원 예약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그는 난시 중에서도 정난시였다. 하지만 성격상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싫어했다. 마지못해 끼지만 정밀작업을 할 때면 오히려 벗어버리는 성향. 그렇기에 난시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정난시는 보통 선천성을 갖고 태어나거나 유전으로 온다. 하지만 이 환자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직업병으로 보였다. 가족 내력이 없는 데다 일과성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신장 안 좋죠?”

윤도가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환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경우는 흔했다. 환자는 눈이 아프다. 안과에 간다. 안과에서는 눈만 고치면 된다. 설령 신장이 좋지 않다고 해도 관여하지 않는다. 안과 의사는 눈을 고치면 그 뿐이었다.

진맥을 보니 신장의 기가 바닥이었다. 심장의 기도 그랬다. 하긴 신장과 심장, 간의 기혈이 건강하다면 눈에 질환이 올 리 없었다.

“원장님 침으로 치료 가능할까요? 안경 안 쓰고 잘 볼 수만 있다면 너무 좋겠습니다.”

“한 번 해보죠.”

윤도가 장침을 뽑았다. 눈에 대한 영약은 산해경에 많았다. 요초가 있고 농지가 있으며 탁과 고습도 있었다. 그 중에서 윤도가 가지고 있는 건 요초. 하지만 쓰지 않았다.

신장의 요혈 신수혈에 장침을 넣었다. 신수혈에서 눈의 기혈을 진단했다. 풍부혈 부근으로 침감이 갔다. 그리고... 독맥의 풍부혈 근처에서도 치료혈자리를 찾았다. 풍지혈이었다. 그 혈자리는 조금 부풀어 있었으니 영락없는 아시혈이었다.

“아야!”

아시혈은 아픈 혈. 살짝 누르자 반응하는 환자였다. 그곳으로 화침이 들어갔다. 눈으로 가는 기혈문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마지막 카운터는 곡지혈과 합곡혈에서 매조지를 했다. 합곡혈은 백내장이나 녹내장에도 좋았다.

“어때요?”

발침을 하며 환자에게 물었다.

“눈이 시원...어...”

환자가 눈을 꿈뻑거렸다.

“원장님이 하나로 보이는데요?”

환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인상을 찡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물체를 제대로 보려면 잔뜩 인상을 써야만 했던 환자. 제대로 보이는 게 신기한지 몇 번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깐만요.”

서비스 장침을 뽑아들었다. 두 장침은 질변혈과 삼음교에 들어갔다. 질변혈은 치질과 대변불통에 좋은 혈자리. 이 그래픽 전문가는 치질도 달고 살았던 것이다.

“으아, 똥꼬도 시원합니다.”

“치질 기운 있죠? 대변도 잘 나오게 될 겁니다.”

“신기하네요. 이거 제가 맡은 중국 판타지 영화보다 더 판타지 같은 일입니다.”

“탕약 지어드릴 테니까 딱 한 달만 열심히 드세요. 신장을 보하지 않으면 다시 재발할 테니 시작한 김에 뿌리를 뽑으세요.”

“당연하죠. 다들 말로만 떠드는데 원장님처럼 난시를 딱 잡아주고 말씀하시는 데야 어떻게 안 믿겠습니까?”

환자는 군말 없이 윤도 지시에 따랐다.

막간에 만난 사람은 SS병원 원무부장이었다.

“이거...”

원무부장은 정중한 자세로 봉투를 내밀었다.

“뭐죠?”

“저희 부원장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고...”

“폐부전 환자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정리를 하셨나요?”

“원장님 말씀이... 진료란 환자의 치료가 우선이고 목적이니 중간과정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해서 지금까지 저희 병원이 받은 진료비 전부를 지불하라고 지시하셔서...”

“......”

“가서 정중하게 말씀드리라는 당부와 함께...”

“알겠습니다. 사실 돈을 바란 건 아니고 부원장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는 지를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건 그냥 가져가세요.”

“원장님...”

“저를 높게 평가해주셨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러니 병원에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보태서 도와주세요.”“......”

“부원장님께 정말 고맙다고 전해주시고요 저는 환자들이 밀려서 이만...”

인사로 원무부장을 밀어냈다.

슬쩍 무시를 때리던 강기문 박사가 떠올랐다. 진료비가 공식적으로 책정되었으니 그도 알 일이었다. 지금 어떤 표정일까?

푸훗!

기분이 좋았다.

윤도가 원하는 건 병원의 인정이었다. 이 경우에는, 돈이 중요한 게 결코 아니었다.

먹튀 어깨 내가 살려드리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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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환자진료를 끝내고 회식에 돌입했다. 일침 한의원이 처음으로 정시에 불을 끈 날이었다. 장소는 1인당 22만원짜리 일품요리집. 원래는 8만 원짜리로 알아온 정나현이었지만 윤도가 그 중 최고 메뉴를 찍었다. 그 정도는 쏠 능력이 되었고, 그 정도는 먹을 자격이 있는 직원들이었다.

“건배!”

정나현이 일어나 건배를 제창했다.

“원장님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윤도는 다시 뜨거운 축하를 받았다.

“제 동기들이 여기 사람 안 쓰냐고 난리예요. 처음에는 여기 간다고 하니까 개인 한의원이라고 정신줄 놨냐고 하더니...”

“저도 그래요. 우리 한의원 분위기 듣고는 다들 미치려고 그러는 거 있죠.”

간호사들은 이구동성이었다. 업무만족도가 그녀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조금씩 담았어요. 우리, 비록 작은 한의원이지만 의술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를 지향하며 열심히 해보자고요.”

윤도가 봉투를 내밀었다.

“비싼 회식까지 시켜주시는데 또 무슨 봉투예요? 몸둘 바를 모르게...”

정나현이 황공한 표정을 지었다.

“뇌물이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잘 하시라는...”“우리 그런 뇌물 없어도 잘 할 수 있는데...”

배연재까지 거들었지만 윤도는 봉투를 거두지 않았다. 봉투에는 300만원씩을 넣었다. 정나현은 500이었고 진경태는 1000만원이었다. 돈이 좀 들어왔다고 막 퍼돌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개업식 이후로 한의원 안정화에 기여한 공을 참작했고 진경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원장님...”

여직원들은 폭풍감동 모드에 들어갔다.

“자자, 늦기 전에 귀가하세요. 아니면 남친들 만나시든지... 회식은 여기까지.”

윤도가 자리를 정리했다. 사람이란,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직장인이라면 특히, 보너스 나온 날이 그렇다. 그 기회를 주는 윤도였다.

“아저씨.”

모두가 돌아간 자리, 윤도가 진경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돈은 너무 많이 넣은 거 같은데...”

진경태가 중얼거렸다.

“그 반대죠. 신약이 제품이 되어서 나올 때까지는 그걸로 참아주세요. 수입 봐서 더 챙겨드릴 게요.”“원장님...”

“자, 이제 다들 갔으니 둘이 오붓하게 한 잔할까요?”

윤도가 진경태 잔을 채웠다.

“그럼 딱 두 잔만 받겠습니다.”

“왜 딱 두 잔이죠?”

“실은 약제실에 실험 걸어두고 왔거든요? 한 시간 후에 확인해야 하니 두 잔 마시면...”“어휴, 아저씨는 정말...”

“뭐 탓하지 마십시오. 원장님은 나보다 한 수 위시니까.”“알았어요. 그럼 두 병 같은 두 잔으로 끝내자고요.”

“좋죠. 그런데 원장님.”

진경태가 시선을 반듯이 들었다.

“네?”

“원장님의 꿈은 뭐죠?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제 꿈이라면?”

“처음에는 침술명의인가했는데 신약도 손대시고... 제가 보기에는 그런 걸로 만족하지 않으실 거 같아서...”

“......”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군요. 원장님처럼 하늘이 내린 명침 한의사는 어떤 꿈을 꿀지...”

“갑자기 술 깨는 데요?”

“......”

“아저씨는요? 처음에 한약대 갈 때 어떤 꿈이 있었나요?”

“한약사하고 한의사가 같나요?”

“알고 싶습니다.”

“그거 뭐... 남들 다 꾸는 꿈... 제대로 된 한약학교 같은 거 하나 세우고 싶었죠.”

‘한약학교?’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이 참 안 되어보였거든요. 한약재는 산들에 있는데 강의실에서 앵무새처럼 앵앵앵... 어느 여름에 지리산에 현장학습을 갔는데 거기 심마니에게 우리 교수님이 지도를 받았어요. 교수님들, 산에 풀어놓으니까 학생이랑 다를 게 없더라고요.”

“그거야 오래 강의를 하다 보니 이론 중심으로 변해서... 침구도 비슷합니다. 침구 가르치는 교수님들 중에서 침 잘 놓은 교수님 흔하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저야 재주가 딸려서 그런 꿈 못 꾸지만 원장님이라면 한의사들에게 최고의 침술을 장착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고의 침술요?”

“침술은 잘 모르지만 보통 말하기를 침술명의가 100년에 한 명 나네 300년에 한 명 나네 하지요. 그때마다 이 땅에는 침술 붐이 일고 침술에 대한 신뢰가 올라갔어요. 하지만 그 명의로 끝이지요. 그렇기에 이 땅의 침술이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양의들에게 밀리고 침술의 인식도 낮아진 게 아닐까요? 고작 삔 데나 고치고 신경통이나 치료하는...”

“아저씨...”

“제가 볼 때... 원장님은 300년 아니면 500년 만에 한 번 나는 침술명의입니다. 어쩌면 이 땅의 침술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르죠.”

“......”

“그냥 제 생각입니다. 원장님이 잘 나가시니까 그 비방을 이론화 시켰다가 침술 제대로 가르치는 한의대를 만들거나 교수로 나가셔서 한의사들에게 최고의 침술을 장착 시켜주시면 한의사의 가치가 더 오르지 않을까... 더불어 네이처나 셀지같은 저명한 곳에 명침치료의 공인논문도 발표하고... 그럼 저 같은 한약사들도 곁다리로 가치가 높아져서 대우 좋아지면 좋고요.”

“아저씨...”

“자, 비우고 가시죠? 제가 오늘 보너스를 많이 받다보니 말도 많은 것 같습니다.”

진경태가 남은 술잔을 비워냈다. 대리 기사가 도착했다. 진경태는 한의원에 내려주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당에서 손을 들어보였다. 그 모습에서 약초처럼 은은한 향이 나는 듯 했다. 늘 묵묵히 자기 몫을 다하는 사람... 그래서 늘 고맙고 미더운 사람... 그런 사람이 남긴 느닷없는 질문...

<꿈>

꿈?

윤도는 몰랐다. 윤도는 지금이 꿈인 줄 알았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의 한의사로서 최고의 기반을 가진 셈이었다. 막말로 이렇게만 살아도 부러울 게 없었다.

명의열전 방영 이후로 뜬 윤도. 알레르기 비염과 아토피 치료제까지 실현시키고 SS 병원과의 협진으로 부각되면서 또 한 번 주가대박을 쳤다. 그건 가까운 화암 한의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봐도 윤도가 꿀리던 풍경. 그러나 이제는 그곳의 환자들조차도 윤도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즈음에 던져진 화두, 꿈.

‘채윤도...’

윤도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진경태 아저씨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산신령처럼 묵묵하고 속 깊은 사람을 만나다니.

그래...

꿈을 가져야지.

이미 이루어진 건 꿈이 아니지.

그렇다면 채윤도.

이제 무슨 꿈을 꾸어야할까?

종종 신약개발하면서 비싼 탕제 팔아가지고 한 50층 짜리 윤도한방병원을 세워?

나쁘지 않지.

돈에 눈이 멀어서 일침한의원 프랜차이즈도 시작해볼까?

나쁘지 않지.

그런데 그건 너만 잘 되는 거잖아?

한의학이나 한의의 발전은 아니야.

그렇다면...

진경태 아저씨 말이 맞네?

한의대를 세워서 최고의 침술을 갖춘 한의사들을 양성하면... 껍데기만 채윤도인 프랜차이즈보다 백 배는 낫지. 네가 헤이싼시호에서 침술에 눈을 떴듯 이 땅의 신예 한의사들이 전부 수준 높은 침술을 장착하게 된다면?

쳇, 끝내주네. 그럼 한방 양방 협진 정도가 아니라 한방과 양방이 통합될지도 몰라.

채윤도.

우리 한 번 질러볼까?

생각하는 사이에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하늘을 보았다. 어둠 속에 시린 별이 보였다. 그 별빛이 윤도의 이마를 비췄다. 마치 헤이싼시호의 그날, 그 시린 빛처럼.

**

이른 아침, 다시 윤도가 집을 나섰다.

약제실은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종일이 인사를 해왔다.

“또 일찍 나오셨네.”

진경태는 핀잔 섞인 인사를 해왔다.

“번듯한 꿈 한 번 꿔보라면서요? 잘 거 다 자고 꿈 이루는 사람 봤어요?”

“......”

윤도가 응수하자 진경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이 이미 이심전심에 가까운 호흡이었다. 한의사와 한약사, 그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신뢰까지 최고의 케미를 이루고 있었으니 윤도의 의도를 아는 진경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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