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은 아니고요, 간장과 비장, 방광을 좀 보해야 하거든요. 좋은 약으로 탕제 지어드릴 테니 빼먹지 말고 드시고 2주 후에 한 번 더 시침을 받으세요. 그럼 문제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차윤길의 입은 여전히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아내와 아들까지 합세해 삼중창의 인사를 한 후에야 물러갔다. 물론 한 차례가 인사 소동이 더 이어졌다.
“채윤도 원장님 파이튕!”
네 덩치 동료들의 함성이 한의원을 흔들었다. 간호사들이 조용하라며 정숙을 요청했지만 대기 중인 손님들도 웃고 말았다. 기쁜 마음에서 나온 함성은 결코 공해가 아니었다.
근본.
그 근본치료가 또 한 건의 희망을 지구에 심은 날이었다. 병이 아니라 몸을 고친 것이다.
소의치병(小醫治病),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이라는 말이 있다. 의사는 병을 고치고 명의는 사람을 고치며, 신의는 나라를 고친다는 뜻이다. 의술의 갈림길이 거기에 있었다.
오늘은 단전이 유용하게 쓰였다. 사람은 단전이 중요하다. 여기에 힘이 없으면 무엇을 해도 매가리가 없다. 한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삼는다.
단전.
윤도는 그 단전을 슬슬 문질러주었다. 윤도에게도 단전이 중요하기는 다르지 않았다.
셀프 디스의 진수
셀프 디스의 진수
이슬비가 내렸다. 작은 정원이 촉촉이 젖었다. 태독이 심한 아이를 시침했다. 화암 한의원에 다니다 온 환자였다.
“미용 약침처럼 돈 되는 환자만 반기지 우리 아이 같은 환자는 찬밥대접이라...”
어머니가 치를 떨었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환자들은 자기 병을 낫게 하지 않으면 불만이 많다. 화암 한의원의 경우, 이런 컴플레인을 달고 환자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렇게 흘려들었다. 그 원장 역시 한의사 중에서는 실력자로 소문난 사람. 그를 깎아내리고 그 위에 설 생각은 없었다.
태독...
아이의 병은 부모에게 주는 근심이 크다. 그동안 상심이 많았을 테니 기죽마혈에서 원샷으로 끝장을 내주었다. 침을 뽑자 머리와 얼굴에 지도를 그리고 있던 태독이 연해지는 게 보였다.
“어머어머, 어쩜...”
어머니가 너무 좋아했다.
“자고 나면 많이 나을 거고... 나머지는 수일 내에 없어질 겁니다. 혹 다 가시지 않거든 일주일 후에 한 번 더 오세요.”
“고맙습니다. 원장님. 이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특제약침을 맞아라 특별탕제를 먹여라 하다니... 어휴, 진작 여기로 올 걸.”
어머니는 회한을 남기고 원장실을 나갔다.
“원장님.”
옆에 있던 정나현이 운을 떼었다.
“왜요?”
“화암 한의원 말이에요.”
“뭐 그 얘기는 안 하는 게...”
윤도가 막아버렸다. 사실 탁상명 원장과 윤도는 가는 길이 다르다. 그렇기에 그쪽의 진료에 대해 왈가왈가할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던 정나현, 윤도의 태도에 밀려 입을 닫아버렸다.
“오늘은 오전만 진료하는 거 아시죠? 오후에 TS전자 의무실에 가봐야 해요.”
“걱정마세요. 예약 다 조절해 두었으니까요.”
“배 샘과 김 샘은 이런 날 교대로 쉬게 조치해주세요.”
“네에, 원장님.”
정나현은 반색을 하고 나갔다.
오전 진료만이라서 그런지 환자수가 많았다. 쉴 새가 없었지만 괜찮았다. 마무리 차례 즈음에 바로 내원한 환자 둘을 받았다. 아무리 예약제로 해도 그걸 모르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사안을 보아 한두 명씩 끼워서 진료하는 윤도였다.
그런데...
“채 선생!”
들어선 환자가 목청을 높였다. 고개를 든 윤도도 놀라고 말았다. 시원한 목청의 이 중년 남자. 갈매도에서 깊은 인연을 맺은 용천규 부장검사였다.
“아니지. 이제 개업하셨으니 원장님이시지?”
용 검사가 반색을 하며 악수를 청했다.
“호칭이야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앉으세요.”
윤도도 그를 반가이 맞았다.
“이야, 같은 서울에 있으면서 감쪽 같이 몰랐네. 내가 서울로 와서 촌뜨기 딱지 떼느라 일에 전념하다보니...”
“저도 검사님 덕분에 올라온 겁니다.”
“내가 뭘? 나야 말로 채 원장님 덕분에 주요 범인들 일망타진하고 서울 영전된 건데...”
“일이 그렇게 되나요?”
“그나저나 소문이 굉장하시던데?”
“들으셨어요?”
“그럼.”
“소문만 그렇습니다. 어디 불편해서 오셨어요?”
“뭐 실은 겸사겸사 왔다가 떡 본 김에 제사 좀 지내려고 간호사들 좀 협박했지. 진료 안 봐주면 한의원 뒤집어 주겠다고.”
용 검사가 앞의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어이쿠, 열일 젖히고 봐드려야겠군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 윤도는 모른 척 장단을 맞췄다.
“허리가 말이야. 그때 원장님 덕분에 다 나았는데 얼마 전에 무리를 해서 또 삐끗했어요. 될까?”
“일단 맥 좀 보고요.”
“그래. 이거 내가 어제 용꿈을 꿨나보네. 여기가 원래 예약 아니면 안 된다지?”
용 검사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장년에 접어드는 용 검사. 당연히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다.
“침구실로 가시죠. 시원하게 장침 몇 대 찔러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침구실 침대에 누운 용 검사, 아이처럼 고분고분 지시에 따랐다. 첫 침은 거료혈에 넣었다. 거기 자침을 하니 침감이 왼쪽 다리 전체로 빨려 들어갔다. 옆구리 아래부터 뒤쪽 종아리까지 전부 땡기는 상황이었다. 좌골 신경통은 디스크로도 통한다.
다른 경우가 있지만 추간판 때문에 오는 게 많았다. 허리의 명문과 요양관, 요유혈에도 한 방씩 찔렀다. 그대로 승부혈을 타고 가 위중을 거쳐 복숭아뼈 부근의 곤륜혈까지 달렸다. 발목에서 차곡차곡 침을 쌓았다. 구허와 복참, 신맥, 경골, 지음혈을 빼곡하게 장악한 것이다.
“어떠세요?”
명문혈에서 전체의 기혈 조화를 체크하며 물었다.
“굳이에요, 굳!”
용 검사가 엎드린 채 엄지를 세워주었다.
“이제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분위기가 좀 조성되었다 싶을 때 윤도가 운을 떼었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꺼리’가 있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아, 그게 말이지... 실은 원장님 쪽에 재미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얘기가 좀 긴데 침 빼고 차나 한 잔 하면서 어때?”
용 검사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별로 좋은 뉘앙스는 아니었다.
“그러죠.”
바로 그때, 정나현이 급히 들어섰다. 그녀답지 않게 초조한 눈빛이었다.
“원장님!”
“......!”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불길함이 머리를 스쳐갔다.
“타이머 울릴 때까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용 검사에게 당부를 하고 침구실을 나왔다. 원장실로 가니 불청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윤도가 물었다.
“경찰입니다.”
50대 초반의 형사 팀장이 신분증을 내밀었다. 형사를 동반한 그는 꽤나 위압적인 표정이었다.
“경찰이 무슨 일로?”
“치료약으로 금지 마약을 쓰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약침하고 약재들 좀 볼 수 있을까요?”
“마약이라고요?”
“탕약실 어딥니까?”
“이봐요? 뜬금없이 마약이라뇨?”
“어허, 알만한 분이 왜 이래요? 이러시면 정식 영장 받아다가 뒤집어놓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떳떳하시면 그냥 협조하세요.”
팀장은 윤도를 지나 약제실로 향했다.
“그래도 느닷없이...”
윤도가 쫓아갔지만 동행한 형사가 윤도를 제지했다. 팀장은 벌써 약제실 문을 열고 있었다.
“금지마약이라고요?”
진경태 역시 펄쩍 뛰었다. 그는 중요한 법제를 진행 중이었다. 팀장은 여기저기 약재를 쑤셔대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럽니까? 약재 매입 서류 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진경태가 팀장을 막았다.
“이 양반이 찔리는 데가 있나 왜 이렇게 나대? 공무집해방해로 체포해 드릴까?”
팀장은 일방통행이다. 말투 또한 거의 협박수준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다 협조할 테니 차근차근합시다. 마약 신고라니 대체 누가 말입니까? 우리 한의원에서 피해를 본 환자라도 있다는 겁니까?”
윤도가 나섰다.
“아니면? 여기서 침 맞고 탕약 먹은 사람들이 백발백중 낫는다면서요? 그런 게 가능하오? 당신이 허준이야? 예전에 내가 의약분업 하기 전에 기가 막힌 약사 한 놈 처넣은 적이 있는데 그 친구 수법이 딱 이거였소. 약에 마약성 진통제 잔뜩 갈아 넣어서 처방... 신경이 마비되니 바로 안 아플 수 밖에. 환자들은 그 약국 약만 먹어야 하고.”
“이봐요. 그건 우리 원장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진경태가 목청을 높였다.
“모독인지 뭔지는 검사해보면 알 일이고. 옆으로 물러서셔. 아, 여기서 쓰는 장침도 제출하시오. 특별 장침이니 뭐니 하면서 침 끝에다 금지마약을 일상적으로 바른다고 하던데?”
“뭐라고요?”
“뭐해? 빨리빨리 진행하지 않고.”
팀장이 형사를 독촉했다. 형사가 약재와 탕제 샘플을 채집해 들고 나갔다. 그 때 한 손이 다가와 형사팀장의 팔뚝을 잡았다. 용천규 검사였다.
“당신은 또 뭐야?”
팀장이 눈을 부라리며 위세를 떨었다.
“그러는 당신들은 뭐요?”
용 검사가 묵직하게 그 말을 받았다.
“이 양반이 보아하니 뭐 모르고 온 환자인가본데 얼른 가시오. 여기 한의원은 조사를 좀 받아야 하니까.”
“영장은 있소?”
“당신이 뭔데 그런 것까지 참견이야?”
“당신 종루경찰서 소속이지?”
“그렇소만?”
“그럼 얘기는 들었겠네. 당신 관할지청에 얼마 전에 저기 남쪽 깡촌에서 영전해 올라온 촌뜨기 부장검사가 하나 있다는 거.”
“......?”
“그게 나요?”
용 검사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걸 본 팀장 안색이 바로 사색으로 변했다.
“용천규 부장검사님?”
한 마디와 함께 팀장이 흠칫거렸다.
“그렇잖아도 불러들일 생각이었는데 잘 만났군.”
“......”
“당신 백장술 계장 알지? 오승일 검사 방의 늙다리 계장.”
“알기는 합니다만...”
“표정이 왜 그래? 알아보니 아삼륙이시던데?”
“......?”
“여기서 쪽 팔릴래? 아니면 나가서 쪽 팔릴래?”
“......”
“허튼 생각 말아. 백장술 쪽에는 이미 자백도 다 받아놨으니까. 당신 둘이 짬짜미해서 병의원과 건강미용식품 사장들 상대로 줄창 해먹었더만?”
“......”
“오늘도 그래서 이 짓이고?”
“뭔지 모르지만 오해입니다. 저는 열심히 수사만 한 죄 밖에는...”
“오해?”
“예?”
쫙!
거기서 용 검사의 손바닥이 바람을 갈랐다. 한 대가 아니었다.
짝!
또 한 번의 파열음이 들리며 팀장의 얼굴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용 검사였다.
“그 나이 처먹고 쪽 팔리지도 않아? 게다가 팀장 정도면 연봉도 밥은 처먹고 살만할 텐데.”
“......”
“마 수사관, 들어와. 마침 여기 이강찬 팀장이 계시군. 아까 논의한 거 그냥 진행하라고.”
용 검사가 전화를 때렸다. 잠시 후에 검찰수사관 두 명이 들어섰다.
“이 친구가 말이야 나보고 오해라네?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다나? 어떤 일을 열심히 했는지 좀 보여드려.”
용 부장이 지시하자 수사관이 수사일지를 팀장 얼굴에 디밀었다. 그가 뇌물을 수수하고 병원 한의원 원장과 이사장 등에게 향응을 받은 기록이었다. 심지어는 성접대까지 서너 차례 있었다.
“틀린 거 있나? 백 계장은 다 실토하던데? 둘이 중학 동창이라며?”
“......!”
“나참, 마누라와 딸 데려다 무료성형도 받게 하고... 본인도 쌍꺼플 수술?”
수사관의 팩트 제시에 형사 팀장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갑시다.”
수사관이 형사팀장 팔을 끌었다.
“잠깐.”
그 어깨를 용 검사가 잡았다.
“......?”
“갈 때 가더라도 채 원장님께 사과는 하고 가야지. 이 분은 당신처럼 썩은 견찰이 간볼 사람이 아니거든.”
“......”
“못해?”
“죄송합니다.”
팀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수사관들은 다시 팀장의 팔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