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고맙습니다. 이번 예선전이 대박을 치면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별 말씀을... 너희들 예선전 끝나면 한 번 정도 더 와서 참 맞자.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야 부상이 재발하지 않을 거거든.”
“선생님, 저부터요.”
다시 이현찬이 부지런을 떨었다.
“야, 너 죽을래?”
차지환 역시 지지않았다. 둘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좋은 라이벌, 그건 어느 분야에서나 필요했다. 그렇기에 윤도는 두 선수가 아름다운 경쟁을 하면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기를 바랬다.
“고맙습니다!”
세 사람은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고 물러갔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순간의 바람은 모두 빗나가게 되었다. 퇴근 시간에 만난 박현수 때문이었다. 처음에, 윤도는 몰랐다. 그가 피겨선수인지조차도.
“원장님!”
앞서 나가던 정나현이 윤도 팔을 툭 쳤다.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학생 때문이었다. 나이는 중고생으로 보였다.
“아까부터 대기실 기웃거리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어요.”“다른 환자랑 같이 온 거 아니고요?”
윤도가 물었다.
“아니에요. 혹시 도둑인가?”
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이봐요, 학생.”
윤도가 학생을 불렀다. 놀란 그가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래서 더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도둑 같아.”
승주가 콧날을 구겼다.
“가세요. 안에 아저씨랑 종일이랑 있으니까 별 일 없을 겁니다.”
“그래도 찜찜하잖아요?”
순간 학생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주차장 담장 쪽이었다.
“잠깐만요.”
윤도가 담장을 돌았다. 여직원들이 불안해 하니 마무리를 하는 게 옳았다. 혹시나 좀도둑이어서 환자들 물건이라도 손대면 골치 아플 일이었다. 학생은 낮은 담 뒤에서 안을 보고 있었다. 그 뒤로 가다가 어깨를 쳤다.
“학생!”
“깜짝이야!”
학생이 가슴을 잡으며 주저앉았다.
‘뭐야 왜 이렇게 놀라?’
발목에는 귀천이 없다-3
발목에는 귀천이 없다-3
“너 뭐야?”
윤도가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학생이 손사래를 쳤다.
“아무 것도 아닌데 몇 시간씩 이러고 있어? 너 저기 간호사 누나들 좋아하냐?”
“예?”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이하게도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좀도둑이냐?”
“아, 아니에요. 제가 무슨...”
“그런데 왜 우리 한의원에 서성거려? 어디 아파서 온 거야?”
“......”
“나 시간 없거든. 솔직히 말 안 하면 경찰 불러서 넘긴다.”
“아, 안 돼요. 저 나쁜 애 아니에요.”
“그러니까 목적, 혹은 이유!”
“실은...”
“실은?”
“선생님, 저도 다리 좀 봐주세요.”
학생의 눈빛이 애원 형태로 변했다.
“응? 다리?”
“아까 현찬이랑 지환이 형 다녀갔죠? 실은 저도 피겨선수예요. 무지 허접하지만요.”
“......?”
“안 총장님이 현찬이랑 지환이 형 데리고 간다고 해서 저도 부탁드렸는데 단 칼에 짤렸어요. 그래서 예약전화했더니 2주일 후나 3주일 후에 진료가 가능하다고...”
“피겨선수라고?”
“그래봤자 무늬만 선수예요. 성적도 개바닥이거든요.”
“그런데?”
“집에서 아빠가 반대를 해요. 이번에 3등 안에 못 들면 그만 두라고 했는데 발목부상이 잘 안 나아서...”
“나으면 3등 가능해? 성적이 바닥이라며?”
“그냥 마지막 불꽃 한 번 태워보려고요. 그럼 미련 같은 거 없을 거 아니에요.”
박현수가 웃었다. 요즘 보기 드물게 순박한 미소였다.
“......?”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도 치료 좀 안 될까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박현수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
“선생님, 제발 부탁해요.”
박현수의 눈빛은 몹시 간절했다. 어찌나 간절한지 윤도가 빨려들 것 같았다. 사실은 이진웅 부부와 저녁 약속을 한 상황. 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박현수의 진솔함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미 유망주 둘을 치료한 처지. 여기서 외면하면 인간 차별이 될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지.’
윤도가 박현수의 어깨를 세웠다. 어린 선수들 발목에 귀천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장침 맞고 싶다고?”
“네.”
“내 침은 좀 비싼데?”
“돈은 관계없어요. 아빠가 용돈 준 거 모으고 있거든요.”
박현수가 체크카드를 꺼내보였다. 그 자세 또한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 열정을 다 태운다는 조건 하에 진료해준다.”
“아싸!”
박현수는 제 자리에서 펄쩍 뛰며 좋아했다.
결국 연재도 퇴근을 미루었다. 윤도가 가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셋 다 남는다기에 연재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윤도였다.
“미안, 배 샘.”
“어휴, 원장님은... 그런 말씀 마세요. 늦으면 다 시간 외로 달아주면서 뭐가 미안하세요? 다른 의원가면 한두 시간은 그냥 일 시킨다고요.”
“나는 다른 의원이 아니니까.”
“아무튼 진료 시작하세요. 저는 침구실 준비해 둘 게요.”
접수를 마친 연재가 침구실로 들어갔다.
“박현수 선수?”
원장실에서 윤도가 물었다. 벗었던 가운을 꺼내 한 팔을 끼었다.
“네.”
“어디가 불편한데?”
“......”
“안 불편해?”
“아, 아뇨. 발목이오, 발목!”
“발목염좌야, 아킬레스야?”
“아, 아킬레스요.”
“치료는?”
“전에 받았는데 자꾸 재발해요.”
“통증은?”
“조금요.”
박현수가 손가락을 조금 가리켜보였다. 이미 두 선수의 치료를 마친 윤도. 가벼운 마음으로 진맥에 들어갔다. 거기서 윤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시 한 번.
“......!”
윤도는 머릿속이 마구 엉기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는 그냥 발목에 침만 놔주시면 되요.”
“쉬잇!”
경고를 하고 진맥을 이어갔다.
이 아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약간의 통증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아니면, 초인적인 인내심이 있든지... 부상은 허리부터 시작이었다. 그게 고관절에서 무릎으로 가고 발목으로 갔다. 총체적인 난관. 그렇기에 몸에 미열도 가득했다. 엄살 좀 떠는 사람이라면 입원할 수준이었다.
“박현수?”
“네?”
“가라.”
윤도가 진맥을 끝냈다.
“네?”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나는 나 안 믿는 사람 진료 안 한다.”
“선생님!”
“가라고!”
“......”
“가라니까. 당장.”
윤도가 일어나 가운을 벗었다. 그러자 현수가 그 팔을 잡았다.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아픈 데가 너무 많다고 하면 귀찮아서 치료 안 해주실까봐...”
“그래서 발목만 고치고 가려고?”
“거기가 가장 아프니까 거기만 안 아파도 저는 해볼만 해요. 꼭 면도날이 든 것 같아서요.”
또 박현수가 웃었다. 이 아이는 참 미워하기 힘든 아이였다.
“언제부터 이랬냐?”
“중학교 올라간 후부터요.”
“치료 제대로 안 했지?”
“그냥 동네 정형외과와 한의원에서...”
“큰 병원 안 가보고?”
“저는 무늬만 선수잖아요? 아홉 명 출전한 국내 대회에서 5-6-7등 단골이에요. 어쩌다 상위권 선수들이 해외대회에 참가하거나 할 때 운 좋게 3등 한 번 먹은 게 전부예요. 고난도 기술을 죽어라 연습하기는 했는데 빙판에만 서면 발목이 아파서... 그러다 보니 아빠가 피겨 선수로는 비전 없다고 그만 두라고 성화거든요. 게다가 피겨에 돈 많이 들어간다고 말씀이 많으셔서 큰 병원 가겠다고 하기가...”
“용돈 모았다며?”
“지환이 형에게 얘기 들었는데 유명하신 분에게 진료 받으려면 돈이 굉장히 많이 든다고 해서...”
“나도 유명해.”
“그래서 발목만...”
“너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아빠는 그렇다고 치고 엄마는? 어차피 피겨선수 돈 많이 든다는 거 알고 시작한 거잖아?”
“엄마 얘기도 해야 해요?”
박현수의 눈자위가 구겨졌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해.”
윤도가 고집을 부렸다. 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알고 싶었다.
“엄마는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새엄마예요.”
“......?”
“엄마가 계실 때는 아빠 몰래 많이 도와주셨는데...”
박현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조금 전 활달하고 붙임성 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죄송해요. 그래서 이번만 참가하고 그만 두려고요. 저 죽은 엄마가 소원이던 4회전 살코를 배웠거든요. 혼자 미치도록 연습했어요. 한 번도 제대로 돌려본 적 없지만... 또 꼴찌 먹더라도 그거 한 번 제대로 성공하고 싶어서요.”
“아빠가 내건 옵션이 뭐라고?”
“3등 안에 드는 거요.”
“박현수.”
“네?”
“치료비는 기본만 받으마. 얼마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나하고도 약속 하나 하면 풀코스로 치료해주마. 너 지금 허리부터 무릎, 발목까지 쭉 아프거든.”
“우와, 족집게!”
“약속 할 거야 말 거야?”
“할, 할게요. 제가 할 수만 있다면.”
“4회전 살코인가 뭔가 그거 제대로 하면 몇 등 될 수 있냐?”
“뭐 제대로만 발동 걸리면 1등도...”
“그럼 1등 먹어라.”
“예?”
“제대로 하면 1등 먹는다며? 네 엄마에게 제대로 된 4회전 살코 보여주고 싶다며?”“하지만...”
“너 그거 아냐? 3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잘 해야 4-5등일 경우가 많아. 3등을 안전빵으로 먹으려면 적어도 1등을 목표로 해야 해.”
“......”
“내가 경험자다. 나 처음에 전교 3등을 목표로 공부했거든. 그랬더니 맨날 4-8등이더라고. 그래서 두렵지만 목표를 전교 1등으로 세팅했지. 그제야 겨우 전교 1-3등 안에 들었어.”“우와! 대박.”
“할래 말래? 나 너하고 놀아줄 시간 없거든.”
“할, 할 게요. 그럼 허리부터 무릎, 발목까지 다 고쳐주시는 거예요?”
“그래.”
“알았어요. 저 이번 선발전 및 랭킹전에서 1등이 목표예요.”
다짐을 들은 윤도가 주먹을 내밀었다. 박현수도 자기 주먹을 윤도 주먹에 부딪쳤다. 그걸 신호로 시침이 시작되었다.
박현수의 부상 기원은 간과 비장이었다. 이 곳의 기가 약하므로 척추가 우로 살짝 휘었다. 진작 바로 잡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하위권의 선수. 국가대표와 거리가 멀다보니 체계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개인훈련 과정도 그랬다. 열심히만 했지 과학적인 훈련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부상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한 쪽 라인이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일단 신주와 좌-우간수혈에 화침을 넣었다. 후끈한 작렬감을 더했다. 그런 다음 비근혈에 가까운 자리에 장침을 넣어 간과 비장으로 가는 기를 화끈하게 더해주었다.
고관절에 장침을 넣고는 바로 발목으로 내려갔다. 박현수가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곳은 정강이에서 발목을 거쳐 발로 내려오는 근육이었다. 안쪽 복숭아뼈의 지속적인 마찰로 인한 염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