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65)

‘하병상치(下病上治)...’

윤도가 머리에 그리는 단어였다. 발의 병을 팔에서 잡으려는 것. 반대로 침은 상병하치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윤도의 선택은 곡택과 곡천혈이었다. 침을 꽂고 가볍게 관절운동을 시켰다. 그 반응에 따라 침감을 조정했다.

“느낌이 굉장히 좋아요.”

박현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 뻥쟁이야. 미안하지만 이제 시작이거든?”

“......”

윤도의 말에 박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시작.

윤도의 시선은 무릎에 있었다. 박현수의 고질은 무릎 가운데의 십자인대가 살짝 어긋난 상태였다. 그 안에는 작은 염증 덩어리도 여럿이었다. 그 영향이 발목으로 내려왔다. 허리와 발목. 그 중간에서 지렛대 역할이 버거웠던 것이다. 그러니 여기를 잡지 않으면 자칫 골암이 될 가능성도 높았다.

‘어디 보자...’

네 군데서 사혈을 하고 시침에 돌입했다. 무릎을 경계로 세 침을 역 피라밋으로 세웠다. 그런 다음 하부의 장침을 돌려 감았다. 잘 돌아가지 않았다. 침 끝을 살짝 들었다가 밀었다. 한 번 더 밀었다. 침은 금새 부러질 듯 휘었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가 주었다.

띠릭!

띠릭!

반 바퀴 쯤 감아돌리자 박현수의 무릎 십자인대가 반응을 했다. 이번에는 약침 세 개를 동원했다. 염증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제 윤도의 약침은 종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간의 치료경험을 토대로 낸 구성을 진경태가 맞춰주는 것이다.

그 확인은 윤도의 자동분석과 공인분석기관의 검사로 인증을 했다. 영약만은 못하지만 다른 한의원의 약침보다는 몇 배나 나았다.

약침까지 들어오자 슬개골과 경골 부위로 뻗어가던 염증들이 녹아내렸다. 그러자 십자인대에서 시원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따각!

접골사들이 뼈를 맞출 때 나는 소리였다. 놀란 박현수가 머리를 들었다. 윤도가 손을 들어 안심 시켰다.

‘30.’

타이머를 맞추고 재차 맥을 잡았다. 간장과 비장의 기혈에 활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그 맥을 따라 고관절, 무릎, 발목을 체크했다. 엉클어진 파동이 자리를 찾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두 바퀴만 온몸을 돌면 제대로 자리를 잡을 것 같았다.

땡!

타이머가 멈췄다. 환부에 따라 보사를 달리해 침을 뽑았다. 마지막은 무릎이었다.

푸시쉬!

오랜 사기(邪氣)가 침과 함께 딸려나왔다. 그 사기의 한 올까지 침 끝에 묻혀 나왔다.

“일어나 봐.”

윤도가 박현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박현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박현수.”

“저 안 일어날래요.”

“왜? 아직 그대로야?”

“아뇨. 아까부터 느낀 건데 굉장히 좋아요.”

“그런데 왜? 일어나서 체크해봐야지.”

“움직이면 또 아플까봐서요.”

“푸웃!”

뒤에서 보조하던 연재가 웃었다. 빙판 위에서 날아오를 때면 어마어마한 내공을 가진 것 같지만 그들도 일상에서는 그저 학생에 불과했다.

“그럼 너 여기서 살아라. 우린 퇴근한다.”

윤도가 전등스위치를 잡자 그제야 박현수가 발딱 일어섰다.

“우와, 대박, 대에박!”

박현수는 온몸을 주무르며 좋아했다. 시큰 저릿하던 느낌이 외계로 날아간 것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 꼭 3등은 먹을 게요. 1등은 가능하면 먹고요.”

박현수는 다섯 번 정도나 허리를 조아리고 돌아갔다.

“어휴, 쟤, 우리 원장님이 진료 안 봐줬으면 어쨌을까요? 너무 좋아하네요.”“3등 먹을 수 있을까?”

“좀 힘들지 않겠어요? 맨날 꼴찌만 했다는데...”

“나는 먹을 거 같은데?”

윤도가 웃었다.

“네?”

“이번에는 동기가 확실하잖아? 동기라는 거 굉장히 무서운 에너지거든.”“하긴 몸 상태도 좋아졌고 원장님하고의 약속이기도 하니까요.”

“3등 먹으면 한 턱 쏠게.”

“원장님이 왜요?”

“기분 좋잖아?”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빨리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오늘 저녁 약속 있다고 하신 거 같은데?”“으악!”

그제야 선약이 생각난 윤도가 몸서리를 쳤다. 이진웅 부부와 약속된 선약.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나 늦은 상태였다.

“배 샘, 미안. 나 먼저 갈게. 뒷정리 좀 부탁해.”

윤도가 밖으로 뛰었다. 그 허둥거림을 따라 연재의 외침이 따라나왔다.

“원장님, 가운은 벗고 가셔야죠!”

박현수...

나중의 결과지만 놀랍게도 이번 2차 선발전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부담없이 펼친 연기로 1등을 먹어버렸다. 협회 관계자들조차 경악하게 된 무명의 반란이었다.

2등은 차지환에게 돌아갔고 3등은 이현찬의 몫이었다. 이현찬의 3등은 4회전 플립에서 실패하고 한 번 엉덩방아를 찧은 게 결정적이었다. 그게 또 몸 상태가 좋아진 탓이었다. 욕심을 부리다 자멸하고 만 것.

국가대표 티켓은 그간의 점수를 종합해 차지환의 차지가 되었지만 박현수 또한 굉장한 주목을 받았다. 그가 시도한 4회전 살코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소 거칠지만 정석대로 들어간 4회전 살코. 착지까지 유연했으니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박현수는 혼자 출전했다. 그 시간 새엄마는 꼴찌가 뻔한 연기를 지켜보는 대신 전 코치와 호텔방에서 뒹굴고 있었고 아버지에게는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 역시 부르지 않았다. 박현수와 함께 한 건 두 명의 ‘이름’이었다.

[전희경]

[채윤도]

박현수는 낡은 스케이트 양 쪽에 두 이름을 썼다. 하나는 죽은 엄마였고 또 하나는 윤도였다. 어쩌면 마지막. 그렇기에 두 사람에게 바치는 연주였다. 시상식이 끝나자 눈썰미 있는 기자들이 이름의 사연을 물었다.

“채윤도 선생님이 장침 한 방으로 제 꿈을 살려주었습니다. 제 발목에 날개를 달아주었어요.”

그 뉴스는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나아가 윤도에게는 좋은 선물이 되었다.

이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가 세계인들이 보게 되면서 상상 밖의 선수를 환자로 맞이하게 된다. 알리나 메드코바. 지난 해 롬바르디아 트로피 대회에서 무려 219.28의 점수를 올려 단숨에 차세대 피겨여왕 후보로 등극한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여자 피겨선수. 그러나 발목부상 이후로 주니어 대표에서 밀려나 자취를 감췄던 그녀가 윤도를 찾아오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더 좋은 소식은 박현수의 새엄마가 이혼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새엄마라서 나쁜 게 아니라 원래 나쁜 여자였다. 그녀는 박현수의 코치와 눈이 맞았다. 알고 보니 남편에게서 가져간 돈이 굉장히 많았다. 박현수 훈련비 핑계를 댔지만 정작은 코치와의 불륜 유흥비였다. 아버지의 짜증은 괜한 게 아니었다. 엄청난 돈을 내주었지만 돈은 엉뚱한 데로 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그녀를 내치고 아들을 품었다. 박현수는 유망주로 선정되어 체계적인 훈련도 가능하게 되었다. 박현수에게 진짜 선수의 길이 열린 것이다. 박현수가 비로소 물심 양면의 날개를 달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날, 윤도의 뒷일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당신의 하루는 얼마일까요?

당신의 하루는 얼마일까요?

띵!

도로에서 일어난 접촉사고가 시작이었다. 화물차를 추월하려다 옆 차선 차량과 키스를 했다. 접촉이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급한 마음에 신호위반에도 걸렸다. 그때까지도 이진웅의 독촉전화는 없었다.

“채 선생님!”

약속된 한정식집에 도착하자 이진웅이 다가왔다. 그는 주차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침을 놓아야할 환자가 생겨서...”

윤도가 고개를 숙였다. 출발하면서 문자를 하기는 했지만 1시간도 더 늦은 윤도였다. 게다가 상대가 누군가? 할 일 없어 시간이나 죽이는 부류들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다들 이해하고 있습니다. 채 선생님이라면 또 누군가의 인생을 구하고 계셨을 테니까요.”

“과찬입니다. 제가 오지랖이 넓은 관계로...”

“들어가시죠.”

이진웅이 안내를 자처했다.

드륵!

내실 문이 열리자 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에는 네 명이나 있었다. 이진웅의 아내와 그 오빠, 동생,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변호사...

“어서 오십시오.”

오빠가 대표로 인사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인사로 미안함을 표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뵙자고 한 건데 이 정도면 양반이죠.”

오빠가 윤도 자리를 권했다. 윤도는 이진웅 옆자리에 앉았다. 오래 기다린 관계로 식사가 먼저 나왔다. 정갈한 한식 반찬 39가지가 나오는 코스였다.

“이거 좀 드셔보세요. 이 집 대표메뉴입니다.”

이진웅의 아내는 윤도를 많이 챙겨주었다. 그게 황송해 주는 대로 호로록 호로록 받아먹는 윤도였다. 식사 중에 창곡군의 장침봉사가 자연스레 화두에 올랐다.

“저는 허준의 환생인 줄 알았어요.”

“역시 채 선생님이더라고요.”

격려가 쏟아졌다. 이어서 지 회장의 진료에 대한 인사가 이어졌다.

마지막 몇 시간의 빛나는 호흡.

그날 지 회장의 인생마감은 아름다웠다. 만일 윤도가 아니었다면 인간의 존엄을 보장 받지 못한 채 목숨이 다했을 지 회장이었다.

“오빠!”

식사가 끝나가자 이진웅의 아내 지수혜가 오빠에게 신호를 보냈다.

“채 선생님!”

오빠가 묵직하게 운을 떼고 나왔다.

“예.”

“진작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했는데 회사 정리가 바빠서요. 게다가 아버지 유언과 재산정리도 있고...”

“저는 괜찮습니다.”

“저희가 안 괜찮죠. 선친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채 선생님께 보은하라는 유언을 주셨거든요.”

“이 식사면 충분합니다.”

“아닙니다. 그게 유언이 되다보니 저희 마음대로 할 수가...”

오빠의 표정은 완곡했다. 그들로서는 이렇게라도 지 회장의 유언을 받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희끼리 고민을 좀 해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 만약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

“해서 회사의 통계직원들에게 맡겨 보았더니... 3억 5천만원 쯤 된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날 아버지께서 정신을 차리고 준공식을 본 후에 임종을 가짐으로써 가문에는 영광이오, 회사 역시 이미지가 부각되었거든요.”

“......”

“수혜야, 이제 네 차례다.”

분위기를 잡은 오빠가 이진웅의 아내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저는... 이 사람에게 말했다시피 아버지께서 잠시라도 정신이 돌아와 풍용스카이벨트를 볼 수 있다면 몇 억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했어요.”

지수혜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도 등골에 진땀이 맺혀왔다. 여기 분위기, 조금씩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서 아버지의 3억 5천에 제가 1억 5천을 채워 5억을 맞춰드릴 생각입니다. 마침 풍용푸드의 주식으로 계산하니 약 2천주가 되더군요. 저희 변호사께서 모든 뒷정리를 맞췄으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지수혜가 주식증서 봉투를 내밀었다.

“사모님.”

“받아주시지 않으면, 죄송하지만 여기서 보내드리지 않을 겁니다.”

5억짜리 감옥이다.

돈을 챙기면 나가고 챙기지 않으면 나가지 못한다? 완곡한 표현이기에 더 부담스러운 윤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정 그렇게 성의 표시를 하고 싶다면 한 분이 주식 10주씩 30주만 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풍용푸드의 주가는 약 25만원 남짓. 30주만 해도 800여만 원이 될 판이었다.

“저희는 이미 모든 재산분할을 마친 상태입니다. 그러니 더 거절마시고...”

“아닙니다.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지 회장님을 살렸다면 모르되 잠깐 정신이 들게 한 것 뿐인데...”“아버지에게는 그 잠깐이 전 생의 시간만큼이나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정 그러시면 회장님의 유언을 공개해 주십시오. 저에 관련된 부분 말입니다. 수궁할만한 유언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변호사님!”

지수혜가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녹음을 틀었다.

[그 한의사가 내 정신을 찾아주었지?]

[목숨 가진 동물이 자기 목숨 구해준 은인 모를 수 있을까?]

[그 의사는 따로 성심껏 챙기고.]

[마지막 가는 길에 이 멋진 진료비를 빚지고 갈 수야 없지.]

녹음 안에서 지 회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준공식 때 마지막으로 한 말. 그걸 녹음한 지 회장의 아들들이었다.

“이제 받아주시겠습니까?”

지수혜가 다시 봉투를 내밀었다.

-목숨 가진 동물이 목숨 구해준 은인을 모를까?

-마지막 길에 이 멋진 진료비를 빚지고 갈 수 없지.

두 마디가 윤도의 심금을 울렸다. 이렇게 되면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하지만 5억은 아무리 생각해도 큰 돈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의견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윤도는 결국 대안 카드를 꺼내들었다.

“말씀해 보시죠.”

“그 멋진 진료비라는 말입니다. 그 진료의 핵심은 장침이었습니다.”

“......!”

실내의 일동은 윤도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사실 민족의학으로 꼽히는 침술이 점점 쇠락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10년 후, 혹은 20년 후였다면 지 회장님의 하루는 보장되지 않았을 겁니다.”

“......”

“이유가 많지만 침술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다보니 침구학에 대한 투자가 적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서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제가 다음에 관록을 쌓게 되면 침술을 특화한 최정예 한의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 돈은 그냥 두셨다가 제가 부탁을 드릴 때 지원금으로 밀어주셨으면 합니다.”

“침술을 특화하는 정예 한의대를 꿈꾸신다고요?”

반응은 오빠 입에서 나왔다.

“예. 주제넘기는 하지만...”

“그거 일이 년 안에 하실 건 아니죠?”

“당연히...”

“그럼 제가 따로 도와드리죠. 여기 우리 고문 변호사님 앞에서 약속합니다. 만약 제가 못하면 제 동생들이 할 겁니다.”

“사장님.”“그러니 일단 그 주식은 받아가 주십시오. 아니면 저희도 지원하지 않습니다.”

“......!”

윤도의 입장이 더 황당해졌다. 이건 수습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너무 많은 금액이라 사양한다는 것이 대학설립후원을 요청한 꼴이 되어버렸다.

“받아가시면 저도 아버지와 함께 후원해 드리죠. 아마 부용이도 찬성할 겁니다.”

이진웅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분위기는 윤도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결국 지 회장의 유산을 받고 차후에 대학설립계획이 나오면 풍용푸드 차원의 지원이 있을 거라는 약속까지 받아든 채 작별의 시간을 맞았다.

“고맙습니다!”

지 회장의 일가들은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윤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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