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265)

5억 주식봉투...

생각지도 못한 거금이었다.

그 위에서 지 회장이 웃었다.

고맙네.

꼭 받아주시게... 하고.

지 회장의 하루 목숨값으로 계산된 5억...

‘나의 하루는 얼마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당신의 간절했던 하루처럼 값지게 쓰죠.’

지 회장을 생각하며 봉투를 품었다.

**

빠라빠라빵!

집으로 가는 길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어, 웬일이세요?”

윤도가 전화를 받았다.

“응, 오늘 집에 들어오나 해서.”

“당연히 가죠. 약주 한 병 받아드려요?”

“뭐 그럼 좋지.”

“좋은 일 생기셨어요?”

“응? 그건 아니고...”

대답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웠다. 아버지는 이렇다. 얼굴이나 목소리에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아하니 비즈니스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거래처가 사정권에 들었다고 좋아하더니 또 퇴짜를 먹은 걸까?

일식집에 들러 최상급 초밥을 넉넉히 샀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청주도 두어 병 구했다. 참치회까지 포장해 차에 올랐다.

“이야, 이게 웬 참치야? 때깔을 보니 참다랑어?”

반색을 한 건 윤철이었다. 아버지는 욕탕에 있었다.

“무슨 일?”

윤도가 어머니를 향해 조심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무슨 일이겠니? 보나마나 또 영업 헛다리 짚으셨겠지. 네 아버지 성격이 워낙 고지식하니...”

어머니가 혀를 찼다. 살만큼 살았으니 아버지 성격 모를 어머니도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의 거래에서 이용을 당할 때마다 아버지가 약지 못한 갈 아쉬워하는 어머니였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응수했다.

“이 사람아, 약아빠진 거 만이 능사가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가 밥을 굶어 집이 없어?”

아버지의 말은 맞았다. 이따금 손해를 보지만 그 손해들은 성실과 신용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어, 우리 채 의원 왔네?”

그 사이에 아버지가 물기를 털고 나왔다.

“아버지 머리 물기 촉촉하니까 30대 같으신 데요?”

윤도가 분위기를 띄웠다. 그 분위기는 윤철이 가라앉혔다.

“아버지 속알머리 빠진 거 안 보여? 조크도 때를 가려야지.”

“......”

“그래. 윤철이 말이 맞다. 아무리 립서비스를 받아도 이렇게 늙어가는 거지.”

아버지가 식탁 의자를 당겼다.

꼴꼴꼴!

데운 청주를 따라주었다. 아버지는 이런 술을 좋아했다.

“너도 한 잔 하렴.”

“예.”

윤도가 술을 받았다. 윤철은 맥주를 가져와 곁다리에 붙었다. 안주가 좋으니 빠질 리가 없었다.

“친구 놈들이 내 빽으로 네 한의원 예약 좀 하자고 난리다.”

아버지가 잔을 들었다.

“그럼 오시게 하세요. 그 정도 못해드리겠어요.”

“아서라. 아버지가 되어가지고 채 의원 돕지는 못할망정 짐이 될 수는 없지.”

“그건 짐이 아니고 가족관계입니다. 우리 직원들 지인도 봐주는데 아버지 지인 못 봐주겠어요?”

“어이쿠, 말만 들어도 뿌듯하구나.”

“누가 많이 아파요?”

“뭐 우리 나이면 안 아픈데 없지 않겠니? 마시고 피우고 스트레스 받고...”

“많이 아픈 분 순서로 모셔오세요. 숨 끊어진 분만 아니면 다 낫게 해드릴 게요.”

“채 의원, 그럼 언제 우리 요양원에도 시간 좀 내줘. 우리 원장님, 요즘 나한테 너무 설설 기셔.”

옆에 있던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침술 봉사 와달라고요?”

“왜 아니겠어?”

“학생 때 봉사 갔을 때는 그만 하고 가라고 등을 미시더니...”

“그때하고 같아? 지금 채 의원은 명의인데...”

어머니 목에 힘이 들어갔다.

“좀 한가해지면 쉬는 날 한 번 갈 게요. 한 나절이면 될 거 아니에요?”

“한나절은? 한 시간만 해도 감지덕지지.”

“알았습니다.”

“정말이지? 나 지금 원장님한테 전화한다.”

어머니가 반색을 하고 일어섰다. 윤철까지 보고서를 쓴다고 들어가자 식탁에는 윤도와 아버지만 남았다.

“일이 잘 안 되세요?”

술을 따르며 돌직구를 던져버렸다. 이제는 아버지를 도울 능력도 생긴 윤도였으니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세상이 늘 그렇지 뭐.”

아버지 눈가에 세월의 무게가 깊어갔다. 어머니 안 된 줄만 알았지 아버지 늙어가는 건 잘 모르는 아들들...

“자금 딸리면 제가 투자 좀 할까요?”

“아서라. 너 개업할 때도 못 도와줬는데...”

“쳇, 아들이 아버지 좀 도우면 안 돼요? 저 이제 옛날의 윤도가 아니거든요.”“그거야 알지.”

“그런데 왜 그렇게 주저하세요. 친구 분들 아들 한의원에도 못 보내, 투자도 안 받아... 저도 효도할 기회 한 번 주세요.”

“......”

“아버지.”

“윤도야.”

“예?”

“미안하지만...”

“아, 진짜... 속 시원히 말해보세요. 미안할 거 하나도 없거든요.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처럼 일어나서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셨잖아요? 아파도 몸으로 때우면서...”

“그거야 다른 가장도 다 그래.”

“아뇨. 아버지는 달라요. 그러니까 좀...”

“알았다. 그럼 말이다... 너 혹시 치매치료도 가능하냐?”

“치매요?”

“그게... 내가 일감 좀 늘여보려고 의기투합하던 중견기업 사장님이 있는데...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이 양반이 최근 느닷없이 치매가 걸리는 통에 병원에 들어가 버리고 그 아들이 경영권을 잡았지 뭐냐? 그래서 납품계약 직전에 그만 헛물을 켜게 생겼다. 굉장히 오래 투자한 일인데...”

헛물!

아버지의 어깨가 늘어진 이유가 나왔다.

자존심이냐 생매장이냐-1

자존심이냐 생매장이냐-1

“그래서 기운이 빠지신 거예요?”

“뭐 겸사겸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던 양반이 갑자기 그 꼴이 됐으니 인생이 무상하기도 하고... 그 양반이 평생을 바쳐 이룬 기업이 망나니 아들 손에서 분해될 생각을 하니...”

“제가 고쳐드릴 게요. 됐어요?” “치매도 가능하냐?”

“아버지가 원하면 가능해요.”

“정말? 그게 급성으로 와서 상당히 심각한 지경이던데...”

“급성이면 더 좋죠. 그러니까 이제 편안하게 한 잔 하세요.”

“너 나 위로하려고 하는 말 아니지?”

“아닙니다. 이미 치료한 경험도 많거든요. 그러니 모시고 오든지 아니면 저를 데리고 가든지 하세요. 바로 정신 돌아오게 해드릴 테니까요.”

“윤도야!”

고무된 아버지가 윤도 손을 잡았다. 아버지, 두 눈이 그렇게 반짝이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이 날 밤, 윤도는 아버지를 위해 산해경을 찾았다. 신비경을 잡은 손이 가뜬했다. 늘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다. 치매라면 장침만으로도 자신이 있는 윤도.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 만약의 경우까지 챙기는 것이다.

북산경 용후산을 따라 가니 황하가 나왔다. 거기서 메기를 닮은 물고기를 잡았다. 치매의 영약이었다. 현실로 나온 물고기는 몇 번 입을 꿈뻑거리다 얌전해졌다. 윤도의 분석기가 돌아갔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27년

[약성함유등급] 上上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자정부터 정오까지 통째로 12시간 고아 복용한다. 낮밤, 2회에 나눠 마시면 치매가 낫는다.

[약효기대치] 上中

‘오케이.’

영약 채집을 끝낸 윤도는 가뜬하게 잠이 들었다.

**

미세먼지가 많은 날, 출근길의 주차장에서 손님을 만났다. 국정원 차장보와 수행과장이었다.

“덕분에 일이 잘 되었습니다. 북쪽 손님이 정신을 차렸답니다.”

차장보가 인사를 건네 왔다.

“다행이네요.”

“그쪽에서도 수행원들에게 보고를 받고는 언제 식사 한 번 내겠다고 하네요.”

“저보다야 강기문 박사님을 챙기셔야죠.”

“하지만 저쪽 수행원 중에서 채 선생님을 인상 깊게 본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이건 약속한 진료비입니다. 국정원 예산으로 드리는 것이니 그 또한 기밀로 부탁합니다.”

“예...”

봉투를 받았다. 기밀을 강조하니 실랑이를 벌이기도 뭣한 윤도였다.

“청와대에서도 채 선생님에 대해 고마워하더군요.”

“번거롭게 확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의사로서 집도의를 도운 것 뿐이니까요.”

“그럼...”

차장보는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봉투 안에 든 돈은 1000만원이었다.

1000만원.

풍용푸드의 5억과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살면서 국정원 돈을 다 받을 때가 있다니...

“원장님!”

진료시간이 되기 전에 정나현이 원장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목에 좋은 모과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진료시작할까요?”

“그래야요.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저야 뭐 늘 좋죠. 여러분이 잘 보필해 주시니...”

“그건 저희가 할 말이네요. 원장님 침술이 신의급이다 보니 환자들이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몰라요.”“하실 말씀있어요?”

“저기 화암 한의원 말이에요.”

“네...”

“동창이 연락 받았다며 카톡을 보냈는데 원장이 벌금내고 나왔다네요. 변호사를 굉장히 센 사람으로 붙였나봐요.”

“예...”

“아휴, 무슨 법이 그런데요? 나쁜 짓 한 사람은 좀 벌도 세게 주고 그래야지.”

“그러게요.”

“저러다 나중에 또 원장님께 해코지할까봐 겁나요.”

“걱정마세요. 이젠 쉽지 않을 겁니다.”

“아니에요. 제가 동창한테 들었는데 알고 보니 전에도 강남에서 잘 나가던 미용전문 한의사를 그렇게 밟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약점이 있었나보죠?”

“네?”

“우린 꿀리는 거 없잖아요? 멤버들 케미 좋고 약재도 최상급이고... 털어봤자 그 사람 팔만 아플 겁니다.”

“하긴...”

정나현이 수긍할 때 진경태가 들어왔다.

“원장님.”

“아, 제 약재 준비 되었나요?”

윤도가 물었다. 치매 영약의 탕제를 부탁한 윤도였다.

“그거야 당연히 잘 준비하고 있고요,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요?”

윤도가 진경태를 따라 약제실로 들어섰다. 거기 형사가 있었다. 지난번에 비리 형사팀장을 따라와 약재 샘플을 가져간 그 형사였다.

“그날 가져간 약재와 장침 등의 검사결과를 가져오셨네요.”

진경태가 형사를 바라보았다.

“예... 저희 과장님이 팀장님 일 사과도 할 겸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요.”

형사가 검사성적표를 내밀었다. 이건 용 검사의 후광으로 보였다. 경찰도 윤도와 용 검사가 각별하다는 걸 경찰서가 인지한 모양이었다.

“제가 먼저 봤는데 아주 좋습니다. 뭐 달리 나쁠 이유도 없지만요.”

진경태가 서류를 받아 윤도에게 건네주었다.

<최상>

<적합>

<우수>

각종 검사결과 뒤에는 한결 같이 좋은 결과가 찍혔다. 약재만은 최상품으로 받아 최적의 조건에서 관리해온 윤도와 진경태. 위기 속에서도 그 노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 우리한테 줄 필요 없습니다.”

윤도가 결과지를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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