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65)

“고맙습니다. 진짜 고맙습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진심으로 윤도를 인정하는 얼굴이었다. 윤도는 손을 들어 화답한 후 걸음을 재촉했다.

“원장님!”

한의원으로 돌아오자 직원들이 모두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요?”

막내 승주가 먼저 물었다.

“뭐 별 거 아니야. 뇌빈혈이 생겼길래 장침 한 방...”

“어휴, 우리 원장님... 그런 인간은 콩밥 좀 먹게 그냥 놔두시지...”

진경태가 고개를 저었다.

“같은 한의사잖아요? 지척에서 침술 사고내면 우리도 좋을 거 없어요. 그리고 이제 싹싹하게 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 고봉달이라는 약초꾼에게 왜 승복했다고 하셨죠?”

윤도는 진경태의 사연을 상기 시켰다. 허름한 산골 약초꾼 고봉달. 진경태에게 약초의 눈을 뜨게 해준 참스승이었다.

“그야 그 양반 실력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에...”

“탁 원장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을 거예요.”

“......!”

“자자, 환자분들이 오래 기다렸을 텐데 속도 좀 냅시다.”

윤도가 직원들 등을 밀었다.

**

퇴근 무렵, 굉장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와대요?”

시침 중간에 전화를 받은 윤도가 소스라쳤다.

“채윤도 한의사 선생님 맞죠?”

전화 속의 비서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얼마 전에 SS병원 일 말입니다. 그 일로 인한 대통령님의 치하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시간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요?”

“국정원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없었다면 굉장한 낭패였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쪽 요청도 있고 해서 당시 집도의였던 강기문 박사님과 선생님을 함께 초청하는 겁니다. 그러니...”

“......”

“추후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줄 아시고 준비하고 계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전화가 끊겼다.

청와대의 전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거기 갈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은 윤도였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치하라니. 아무튼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곧 그날 간이식을 받은 결과와 더불어, 북한과의 관계개선도 나쁘지 않다는 반증 같았다.

“원장님, 이러다 대통령 주치의 되시는 거 아니에요?”

옆에 있던 승주가 반색을 했다.

“그게 아니고 그냥 초청이야. 요즘 청와대 개나 소나 다 가잖아?”

“무슨 개나 소나예요? 원장님 정도 되니까 초청을 받는 거죠.”

“오케이, 일단 신경 끄고 다음 환자.”

“그보다 손님부터...

”“손님?”

윤도가 문을 바라보았다. 승주가 문을 여니 탁상명이 들어섰다. 승주는 문을 닫아주고 나갔다. 마지막 진료가 남은 윤도. 탁상명은 옷차림으로 보아 퇴근길인 모양이었다.

“채 원장님.”

그는 정중한 인사로 윤도를 태했다.

“원장님...”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인 거 같아서...”

한 번 더 공손한 탁상명.

“인사라뇨? 한의사끼리 도움을 준 걸 가지고...”

“아닙니다. 솔직히 내가 좀 편협했어요. 지난번 명의열전 방송 때의 앙금이 남았었습니다. 채 선생님처럼 젊은 사람에게 밀릴 줄은 몰랐거든요.”

“그렇다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원장님 자리를...”

“아닙니다. 오늘 곰곰 생각해보니 나보다 채 선생님이 나가는 게 백 번 옳았습니다. 한의의 부흥을 위해서도...”

“고맙습니다.”

“이거 죄송하지만 마음을 좀 담아왔는데...”

탁상명이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윤도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나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텐데 이렇게라도 정식 사과를 전하고 싶습니다.”

“원장님.”

“그리고... 약재 말입니다. 검사성적표 보니까 후덜덜하던데 저도 좀 소개를 시켜주시면...”

“그거야 저희 약제실장님께서...”

“염치없지만 부탁합니다.”

탁상명은 봉투를 놓은 채 퇴장을 했다. 봉투 안에 든 건 500만원이었다. 돈보다 탁상명의 변화가 고마웠다. 약재까지 부탁하는 마당이니 진심이 아닐 수 없었다. 윤도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오늘 일은 잘한 것 같았다.

“아저씨, 정 실장님!”

진경태와 정나현을 불러 상황을 일러주었다.

“와아, 역시 우리 원장님. 역시 실력은 통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정나현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약재 거래처 소개해주라고요?”

진경태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뇌물을 먹었으니 어쩌겠어요. 약재 구입처 알려준다고 아저씨 실력 줄어들 것도 아니고... 실장님이 이거 가지고 가서 직원들 회식하세요. 돈 남으면 사무실에 필요한 물품 구입하고요.”

500만원 봉투는 정나현에게 운영비+회식비로 건네주었다.

“원장님은 같이 안 가시고요?”

“아, 저는 저녁 왕진이 있어서요.”

“그럼 저라도 따라가서 보조할 게요. 혼자 가시면 모양 안 나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회식. 왜냐면 제가 오늘 아버지 일로 가는 거거든요. 설마 부자지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려는 건 아니겠죠?”

“뭐 그렇다면야...”

정나현이 꼬리를 내렸다.

“그럼 좋은 시간들 되시고 내일 봐요.”

윤도는 가뜬하게 한의원을 나섰다. 효도 한 번 해볼 생각이었다.

신침神鍼 앞에 불치 없다-1

신침神鍼 앞에 불치 없다-1

“여기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을 가리켰다. 서울의 외곽이었다. 한의원을 나온 윤도는 아버지를 만났다. 둘은 한 차를 타고 요양병원으로 달려왔다.

“보호자와는 연락이 되었나요?”

윤도가 물었다.

“그럼 사모님이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 아마 기다리고 계실 거야.”

아버지는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병원은 문부터 통제가 되고 있었다. 정신병원 계통의 요양병원인 까닭이었다. 치매나 정신질환이 심한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병원을 나갈 수 있었다. 환자도 보호자도, 병원 측도 난감해진다는 이유를 내세운 통제였다.

“이상균 환자 좀 뵈러 왔습니다만.”

아버지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간병인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60대 후반의 중국동포였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간병사들이 그랬다. 애달팠다. 어떻게 보면 그들 역시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노년이기 때문이었다.

“오셨어요?”

이 사장의 아내가 아버지를 반겼다.

“저희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윤도를 소개시켰다.

“아유, 와줘서 고마워요.”

사모님은 정성껏 윤도를 맞이했다.

“고생이 많으시죠.”

인사를 하고 복도 끝의 병실로 향했다. 1층 남자병실이다. 병실에는 세 명 씩의 환자가 생활하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고 누워서 숨만 쉬는 사람도 있었다.

“여보, 채 사장님 왔어요.”

사모님이 침대의 이상균에게 말했다. 이상균은 그나마 독방이었다. 다만 사지가 묶여 있었다. 정신병원 계통의 요양병원은 입원 시에 사지결박 각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환자가 발작을 하거나 자해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병원 측에는 말씀을 드리셨나요?”

윤도가 이상균의 사모님에게 물었다. 남의 병원이다. 그렇기에 병원 측의 수락은 필수적이었다.

“네. 이 사람 주치의에게 말했어요. 한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침 좀 놓아도 되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했어요.”

“주치의라면?”

“여기 원장님 말고 의사가 또 있거든요. 우리 이 양반 주치의 이름은 김동광이에요.”

“그럼 진료 시작하겠습니다.”

윤도가 진맥에 들어갔다. 막 맥이 짚이려할 때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뭡니까?”

뒤에서 까칠한 소리가 날아왔다. 돌아보니 장년의 의사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사모님이 인사를 했다.

“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가 윤도를 쏘아보았다.

“저기 우리 집 양반, 침 좀 놓으려고요. 김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

사모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분이 한의사신데 치매에 좋은 침을 놓는다고 해서... 김 선생님께 다 설명 드리고 허락 받았는데...”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안 됩니다.”

의사가 단칼에 자르고 나왔다.

“왜요? 김 선생님은...”

“글쎄 김동광 선생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진료와 처방은 제 권한입니다. 더구나 이 환자분은 아드님과 며느님이 주보호자로서 입원 시킨 거 아닙니까? 우리 병원 처방 외에 다른 진료를 받으시려면 아드님 부부가 오셔야 합니다.”

“우리 아들부부요?”

“예.”

“아들하고 며느리는 바쁜데... 잠깐 침만 맞는 건데도 안 돼요? 김 선생님은 된다고..”

“글쎄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원장은 나예요.”

“아휴, 아들은 바쁜데... 내가 아내인데도 안 된단 말이에요?”

“예.”

의사는 단호했다. 반면 사모님은 울상이 되었다. 뭔가 주저하는 느낌이 강했다. 가족관계가 편하지 않은가? 아니면 사모님이 집에서 발언권이 없는가? 윤도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아드님 부부가 안 오시면 허락 못합니다. 저 분 모시고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원장이 문을 가리켰다.

“잠깐만요. 아들이 요즘 바빠서 얘기를 못 했는데... 내가 전화 좀 해볼 게요.”

사모님이 겨우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아들이 온다고 하네요.”

통화를 끝낸 사모님이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팔짱을 낀 채 힘이 들어간 눈을 풀지 않았다. 30여 분쯤 후에 최고급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아들과 아내였다. 아내의 모습은 윤도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병원 오는 차림이 아니라 스타들의 공항패션처럼 요란했다.

“한의사요?”

사모님을 바라보는 아들 부부는 처음부터 위압적이었다.

“그래. 이 분이 채윤도 선생이라고 장안에 화제가 된 그 명의시란다. 네 아버지랑 거래하시던 채 사장님 알지? 마침 그 분 아드님이라 귀한 시간 내주셨어.”사모님의 목소리는 애달프다. 그건 결정권이 없다는 반증이었다. 아들의 시선이 윤도에게 건너왔다. 굉장히 불손한 눈빛이었다.

“안 됩니다.”

아들 역시 의사와 같은 반응이었다.

“승환아.”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대학병원에서도 어렵다고 한 치매입니다. 그런데 침이라뇨? 침으로 뭐하게요? 그러다 부작용 생기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요?”

“글쎄 이 선생님은...”

“채 사장님.”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가섰다.

“나한테 왜 이러십니까? 우리 아버지하고 나름 각별한 사이 아닙니까?”

“예...”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에요? 멀쩡하게 전문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에게 침이나 맞으라고 어머니를 현혹하시다뇨? 무슨 꿍심이라도 있습니까?”

“꿍심이라뇨? 나는 그저 우리 아들 침이 효과가 좋기에...”

“치매에 말입니까?”

“한 번 맞아보시죠. 나쁠 거 없지 않습니까?”

“허, 이 양반이 정말... 치매가 소화불량입니까? 개나 소가 앓는 감기몸살이냐고요?”

아들이 콧김을 뿜었다. 순간, 복도 앞의 대기실에서 비명이 울렸다.

“까악!”

아들 아내의 비명이었다. 아들을 떠밀어놓고 관망하던 그녀. 환자 중의 하나가 몰래 다가와 그녀를 잡아끈 것이다. 나 집에 가야해. 문 좀 열어줘. 환자는 늘어진 아내를 잡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간병사들이 달려와 환자를 떼어냈다. 아들의 아내는 이미 기절한 후였다.

“아버지...”

소동을 보며 윤도가 입을 열었다.

“......”

“그냥 가시죠.”

화가 났다. 남의 병원인 것은 이해가 갔다. 그래서 주치의에게 허락을 구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행되는 찬밥대접. 이런 대우를 받으며 침술을 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게 좋겠지?”

애잔하게 대꾸한 아버지가 이상균을 돌아보며 뒷말을 이었다.

“저 양반... 운도 없구나. 사실 저 아들을 굉장히 싫어하거든. 아마 제 정신만 있다면 회사도 전문경영인에게 넘겼을 거야. 어쩌면 저 아들은 이 사장님이 치매에 걸린 걸 쌍수 들고 환영할 지도 몰라. 덕분에 며느리 내세워 회사를 거머쥐게 되었거든. 그래서 아들 제쳐놓고 사모님과 입을 맞춘 건데...”

“......?”

아버지의 한 마디가 윤도의 뒤통수를 흔들었다. 그제야 이 사태가 이해가 되었다. 조금 전의 원장과 아들은 한통속이다.

아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병원에 오래 묶어두어야 한다. 아니, 영원하면 더 좋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의사가 등장했다. 만에 하나 치료가 된다면 그건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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