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대표님.”
“이 친구들 뭐예요? 아까 보고할 때는 부상자가 더 있다는 말 없었잖아요?”
“그게... 이 친구들은 우리 직원이 아니라 알바생이라서...”
“알바생은 사람 아니에요?”
“......!”
“그리고 왜 알바생을 쓰는 거죠? 필요한 인력이 있으면 정식 채용하라고 하지 않았던 가요?”
부용의 돌직구가 사방에서 날아갔다.
“그게... 스타일리스트는 이게 관행이라...”
“무슨 관행요? 그래서 이렇게 같이 다치고도 사람 대접 못 받는 관행요? 팀장님 같으면 이런 대우 받으면서 즐겁게 스타일리스트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직원들 이렇게 대우하라고 했어요?”
“죄송합니다.”
팀장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진료 끝났나요?”
부용이 윤도에게 물었다.
“네. 조금 안정하면 움직이는데 지장 없을 겁니다.”
“두 사람 우리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
“네 달이오.”
“저는 세 달...”
부용이 묻자 두 스타일리스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제 꼼짝없이 짤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곽 팀장님.”
“네.”
“이 두 친구, 멤버들 하고 똑같이 안정시키고 정규 직원으로 채용하세요. 근무기간 동안 임금 소급해서 지급하도록 하고요.”
“예?”
“정규직으로 채용하라고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 식의 얼렁뚱땅 열정페이 절대 용서 안 합니다. 이건 착취예요.”
“예, 대표님.”
“두 사람...”
부용이 스타일리스트에게 다가섰다.
“대표님...”
“대표로서 미안해요. 아픈 데 가라앉으면 정식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공연을 보조해주세요. 알았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표님!”
두 스타일리스트는 언제 아팠냐는 듯 일어나 합창을 했다.
“선생님...”
차에 오른 윤도에게 부용이 말을 건넸다.
“네?”
“고마워요.”
“별 말씀을...”
“두 가지에요. 하나는 응급출동으로 위기에서 구해주셔서. 또 하나는 방금 스타일리스트들요. 가까운 곳에 있던 저는 간과했는데 먼 곳의 선생님이 찾아주셨네요.”
“나도 고맙습니다. 부용 씨가 큰 포용력으로 안아줘서... 저 두 사람 굉장히 일 열심히 할 거 같아요.”
“제 말이 그거예요. 덕분에 회사 이미지 개선도 되고 좋은 직원도 구하게 되었어요.”
“흐음, 그럼 다음에 오늘 몫까지 더해서 빡세게 한 턱 쏘세요.”
“언제든 콜만 하세요.”
“아, 그건 그렇고...”
“......”
“혹시 제가 말하던 연예인, 선생님께 연락왔나요?”
“안 왔는데요.”
“그럼 다른 사람으로 보내도 될까요?”
“그러세요. 환자는 닥치고 환영입니다. 최선을 다해 봐드리죠.”
“고마워요.”
“공연 성황리에 마치세요.”
윤도가 작별의 손을 들었다. 한의원의 진료시간이 코앞이었다.
“형.”
도로에 올라서자 윤철이 말했다.
“왜?”
“형 의술만 짱이지 연애는 꽝이네.”
“뭐가?”
“조금 전 그거 키스 타임 아니야?”
“죽을래?”
“아, 진짜... 연예 못하는 우리 형 옆에는 능력 있고 빵빵한 여자들이 득실거리고 연애 잘 하는 나는 손만 내밀면 다 튀어버리니...”
“또 쫑 났냐?”
“내 말이... 요즘 여자 애들은 이 채윤철의 매력을 모른다니까.”
“까불지 말고 달려라. 환자들 기다린다.”
윤도의 주먹이 윤철 이마에 알밤을 날렸다.
살짝 피한 윤철이 속도를 높였다. 저만치 아침 햇살이 찬란했다. 마치 조금 전에 본 비정규직 스타일리스트들의 미소 같았다.
비정규직 둘을 구한 윤도, 총알처럼 도로를 달려갔다.
북한 초대장-1
북한 초대장-1
새로 주문한 장침이 도착했다.
많았다.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윤도만의 방식으로 길들이기 과정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모든 걸 윤도가 했지만 지금은 진경태가 마지막 과정까지 진행해준다. 윤도는 처음과 끝을 확인한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어보이는 건 모두 폐기했다. 구하기 힘든 마함철이지만 아낄 일이 아니었다.
짬이 나는 시간에는 장 박사가 보내준 탕약에 대한 공부도 했다. 장침이 중요하지만 탕약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진경태가 뒤를 받치고 있다지만 진료하고 처방을 하는 건 윤도의 몫이었다.
옛날에는 비방이 많았다. 혈액을 보하는 사물탕이나 신장을 보하는 육미지황탕도 거기 속한다. 고려시대 명의 설경성 같은 한의는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고질병을 탕약으로 원샷 처리해 버렸다. 왕실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원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친 건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당시에는 한의들 간에 의술을 겨루는 일도 잦았다. 세도가 있는 집안에 병자가 생기면 여러 한의들을 초빙해 처방을 받았다. 그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을 지은 한의가 명의로 알려지는 식이었다.
최근 윤도도 한 처방에 심취되고 있었다. 바로 기본처방이었다.
‘곽향정기산...’
윤도는 그 재료가 되는 11가지 약재에 윤도식의 3가지를 더 얹었다. 14가지 약재가 들어가는 이 약은 주로 초기 감기나 몸이 나른할 때 내는 처방이다. 하지만 여기에 숨겨진 의미가 있었다. 이 약의 진가는 바로 음양의 기초균형을 도모하는 약이었다. 질병은 음양의 조화가 깨짐으로써 비롯되는 것. 그러니 공연한 보약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여기 합당한 환자가 둘 있었다. 둘 다 60대 후반 연령의 남자들이었다. 한 때는 잘 나갔다. 공기업의 대표이사였고 또 한 사람은 증권회사의 중역이었다. 그러나 퇴직을 하고 보니 찬밥이 되었다. 가진 돈도 많고 머리에 든 것도 많지만 일상이 무료해진 것이다.
우울증이 생겼다. 이런 저런 약을 먹었지만 오히려 병이 깊어갔다. 윤도가 둘을 보았을 때 둘은 마치 로봇같았다. 얼굴표정근이 다 마비된 듯 무료해 보였다. 장침을 원했지만 놓지 않았다. 보약을 원하기에 군말없이 곽향정기산을 내주었다.
그리고 다시 내원한 두 사람을 배연재에게 딸려보냈다. 이제 그 두 사람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끼익!
연재의 자가용이 주차장에 멈췄다. 두 환자가 내렸다. 윤도는 보았다. 아까보다 활기와 생기가 실린 동작들. 원장실로 들어오는 발소리도 아까보다 힘이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윤도가 두 환자를 맞았다.
“기분 어떠세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좋습니다.”
“나도 그래요.”
두 환자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대답했다.
“두 분은 이제 치료 끝났습니다. 안 오셔도 됩니다.”
“응? 장침은 끝내 안 놔주는 건가?”
마른 환자가 물었다.
“마지막이니 피로도 풀고 힘 좀 나라고 놔드리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봐서는 안 맞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게.”
“사실 두 분은 우리 한의원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 우울증의 특효약은 웃음이지 약이나 침이 아니거든요.”
“웃음?”
“방금 보고 오신 연극 말입니다. 창자가 찢어질 듯이 웃겼죠?”
“그랬지. 태어나서 그렇게 웃은 건 처음이라오.”
“그동안 상실감 때문에 쌓인 무력증이 우울증이 된 겁니다. 그저 우울하게 집에만 계셨으니 병이 된 거지요. 그랬기 때문에 파안대소가 몸의 컨디션을 바꿔준 겁니다.”
“아하...”
“웃을 일이 없으면 화라도 내세요. 노여움도 우울을 이깁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보다는 웃고 화내는 일상으로 돌아가시면 우울증은 사라질 겁니다.”
“......”
“이제 말씀입니다만 그동안 드린 약은 기본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약에 불과합니다. 기본은 잘 다져졌으니 웃음과 해학이 넘치는 연극이나 영화를 자주 보시고, 사람들과의 친교를 강화해서 희로애락을 즐기시면 우울증은 재발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
윤도의 설명을 들은 두 환자가 무릎을 쳤다. 두 환자는 돈도 많이 내지 않았다. 말하자면 거의 거저 병이 나은 것이다. 윤도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곽향정기산의 기본정신을 공진단 등의 보약보다 값지게 써먹는 순간이었다.
이 치료법의 원안은 제나라의 명의 문지의 이야기가 유명하게 전한다. 제 나라 민왕이 우울증에 걸렸다. 우울증이 심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명의 문지가 초청된다. 문지는 왕의 치료를 자신하지만 완쾌되면 왕이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치료법이 환자의 화를 돋구어 기혈을 순환시키는 노승사(怒勝思)에 속했던 것이다. 노승사는 화내는 것이 우울한 걸 이긴다는 뜻이었다.
문지는 치료일자를 받아주고는 왕에게 가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신하된 주제에 왕과의 약속을 어기자 문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결국 문지가 도착했지만 그는 용포를 밟는 등 왕의 염장을 질러댔다. 결국 핏대 오른 왕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문지를 끓는 물에 넣어 죽이고 말았다. 문지의 말대로 왕은 살고 문지는 죽었다.
오지상승법(五志相勝法)은 한의학에서 쓰이는 심리요법의 하나다.
1) 노승사(怒勝思)
2) 사승공(思勝恐)
3) 공승희(恐勝喜)
4) 희승비우(喜勝悲憂)
5) 비승노(悲勝怒)
등의 요법이 있다.
다음 환자의 막간, 낯선 사람 둘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류수완 대표의 강외제약 임원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실은...”
둘 중 한 사람이 내민 건 청와대 공무원증이었다.
‘청와대?’
윤도가 소스라쳤다. 옆의 남자는 국정원 쪽이었다. 둘은 용건만 간단히 하고 돌아갔다. 북한 고위층 간 이식에 대한 연결 건이었다.
“오늘 저녁 청와대에서 만찬이 있습니다. 그쪽 방수용 비서께서 내일 당장 북으로 간다고 해서 부득...”
오늘 저녁 시간을 내주시오.
그 말을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강기문 박사님과 이철중 박사님이라면 몰라도 제가...”
“방수용 비서 쪽에서 선생님의 참석도 간곡히 청한 지라... 바쁜 줄 알지만 밀담의 원만한 마무리를 위해 참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저녁에 저희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 또한 기밀을 유지해 주셔야합니다.”
두 남자는 바로 원장실을 나갔다.
“......!”
윤도는 어안이 벙벙했다. 지진 이재민에게 의료봉사를 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도 느닷없는 요청으로 헬기를 타고 날아간 SS병원. 그런데 이번에는 청와대 초청이라니...
그 저녁은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원장님, 저녁 왕진 있다고 하셨죠?”
퇴근 직전의 승주가 침통을 준비해주었다.
그런데... 새침통이 아니라 이 한의원 공사 와중에 발견한 그 침통이었다.
“응?”
윤도가 장식장을 바라보았다. 자리가 비었다. 승주가 이걸 꺼낸 것이다.
“그게 좀 품위가 있어보여서요. 왕진 때는 그걸 쓰는 게 어떨까요?”
“품위?”
“네, 왠지 고수의 향을 풍기는 것 같아 원장님께 딱이에요. 정 실장님도 동의하시길래 제가 멸균해서 준비했어요.”
“그럴까?”
승주의 의견에 따랐다. 청와대에 간다지만 초청자는 방수용이었다. 혹시라도 남한 침에 호기심이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승주 말이 옳을 것 같았다. 게다가, 승주 말처럼 오랜 기품이 스며있다. 폼을 잡으려는 건 아니지만 왕진 때는 이걸 써도 좋을 거 같았다.
빠라빠라빵!
윤도 핸드폰이 울렸다. 간호사들이 퇴근한 원장실, 윤도가 핸드폰을 받았다. 저들이 지정한 곳은 평범한 건물이었다. 진경태에게 인사를 하고 스포츠카를 몰았다. 건물은 한가했다. 주차장에 내리자 미리 대기하던 두 대의 세단에서 그 남자들이 내렸다. 거기서 그들의 차에 올랐다. 차는 건물을 나와 청와대를 향해 달렸다.
끼익!
청와대 경내에 서자 세단이 멈췄다. 윤도가 내렸다. 저만치 또 다른 세단이 보였다. 그 세단에서 내린 건 강기문과 이철중이었다.
“채 선생.”
이철중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 왔다. 강기문도 이제는 웃는 얼굴이었다.
“모시겠습니다.”
비서실 직원이 나와 윤도 일행을 안내했다.
“채 선생.”
강기문이 나란히 걸으며 말을 건네 왔다.
“예?”
“나중에 따로 인사를 전하려 했는데...”
“......”
“채 선생 말이 맞았소. 내 판크레아스, 아니, 췌장에서 캔서가 나왔어요.”
캔서(Cancer)...
암이다.
“......”
“채 선생이 말한 그 부위였소. 다행히 전이 소견이 없어 후배에게 집도를 맡겨 수술 날짜를 잡았다오.”
“예...”
“솔직히 절실하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한의학이라니...”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제 의견을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이거 몇 달만 지났어도 주변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암이라는 증거들이 나오는 순간 아찔하더군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