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265)

“그제야 지난번 부원장님의 혜안에 수궁이 가더군요. 부원장님이 환자를 맡길 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진짜 고마워요. 오늘 채 선생 만나면 이 말 하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강기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윤도만 보면 각을 세우던 뾰족함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채 선생.”

접견실에서 국정원 차장보 김광요를 만났다. 오늘은 국정원장도 함께 있었다. 그가 원장을 소개해 주었다. 윤도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반대편 문으로 그 사람이 등장했다. 간 이식을 받은 방수용, 북한 측 고위층이었다.

“이 사람이 채윤도 한의사십니다.”

부원장이 윤도를 소개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나 방수용이오.”

60대의 방수용이 손을 내밀었다. 마른 체형이지만 탄탄한 눈빛과 그에 어울리는 단단한 음성이었다.

“채윤도입니다.”

“채 선생이 내 수술에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지원만...”

“부분이 본질을 넘을 때도 있는 거요. 그래, 침술은 누구에게 배웠소? 우리 서 동무 말을 들으니 거의 신침 수준이라던데?”

방수용의 시선이 수행원에게 넘어갔다. 수술실에서 윤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그 남자였다.

“중요한 수술이라기에 보조에 나서 최선을 다한 것 뿐입니다.”

“괜찮으면 언제 침 한 방 놔주시겠소? 그렇잖아도 수술 후에 어깨 견갑골과 가슴 부근에 통증이 심해서 애로가 있던 판인데...”

“많이 아프십니까?”

“이 나이에 내가 남쪽까지 와서 거짓말을 하겠소?”

“심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놔드릴 수 있습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요?”

“......!”

윤도와 방수용의 대화에 청와대 관계자들이 놀란 눈이 되었다. 스케줄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융통성이 있었다.

“괜찮다면 의무실로 가시지요. 식사가 차려지려면 10-20분 정도 시간은 있습니다.”

결국 뜻하지 않은 시침을 하게 되었다. 청와대 의무실은 좋았다. 그 침대에 방수용이 누웠다. 윤도가 진맥에 들어갔다. 몇 가지 문제점이 나왔다.

우선은 간장이었다. 남의 간이 몸에 들어왔다. 수술은 성공적이라지만 안착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신장과 비장, 간과의 조화가 엉성했다. 견갑골과 흉통 외의 문제는 다리 쪽이었다. 방수용은 다리가 부실했다.

‘고황혈 아래...’

아시혈을 찾았다. 고황혈에 가까웠다. 그 주변을 만지니 뭉친 점이 느껴졌다. 거기에 장침을 넣었다.

“억!”

방수용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동지.”

수행원이 소스라쳤지만 방수용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윤도는 담담하게 침을 돌렸다. 세심한 손길로 혈자리를 따라 침감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딱 거기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손 끝에 힘을 주었다. 침은 혈자리의 끝까지 부드럽게 들어갔다. 구겨졌던 방수용의 미간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침은 발의 태계혈을 취했다. 흉통의 기세가 아래로 내려오는 까닭이었다.

“기가 막히군. 욱신거리던 격통이 바로 사라졌어요.”

방수용이 웃었다.

“그렇습니까?”

긴장하던 수행원이 머쓱하게 물러났다. 방수용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도의 손은 족삼리로 내려갔다. 거기에 장침을 꽂아 다리 힘을 돋궈주었다.

“거기는 족삼리고... 그 아래는 태계혈... 어깨의 혈은 어디였소?”

방수용이 물었다. 의외로 그는 한의학에 조예가 있는 것 같았다.

“고황혈에 가까운 곳입니다. 가벼운 뭉침이 있기에 침으로 풀었습니다.”

“고황혈이라... 역시 서 동무 눈이 제대로였구만.”

“......”

치하를 들은 서경세가 웃었다.

“족삼리 말이오 우리 어린 아들도 다리에 문제가 있는데 선생 같은 명의에게 뜸이라도 뜨면 좋았을 것을...”

방수용이 넌지시 대화를 이었다.

족삼리.

명혈이다. 하지만 명혈이라고 해서 침이든 뜸이든 들이대도 좋다는 건 아니었다. 명약도 사람에 따라서는 독이 되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어린 아이는 족삼리에 뜸을 뜨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간혹 성장에 영향을 주기도 하기에 차라리 신주혈이 유효합니다.”

“오, 그래요? 이거 내가 한의학에 선무당이다 보니... 그러고 보니 전에 족삼리에 뜸을 뜨던 사람이 기절했다는 말도 있던데...”

“그럴 때는 견정혈에 침을 놓으면 괜찮아집니다.”

“신묘하군요. 아무튼 고맙소이다. 내 지금 같아서는 판문점으로 걸어서 집에 가도 될 것 같소이다. 채 선생, 그 침통 좀 봐도 되겠소?”

“그러시지요.”

윤도가 침통을 건네주었다. 그 오래 된 침통이었다.

“침통부터 명의의 향이 그윽하군요.”

방수용은 침통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의학을 아는 게 분명한 방수용. 그의 시선은 안으로 우묵하게 깊었다. 여러 생각이 담긴 눈빛이었다.

북한 초대장-2

북한 초대장-2

“대통령님 나오십니다.”

마침내 식사가 시작되었다. 대통령은 자리에 앉기 전에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채 선생님.”

윤도의 차례는 맨 뒤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에요. 하도 칭송이 자자하기에 어떤 분인가 궁금했는데 굉장히 쿨 하고 젊은 분이로군요. 앞으로도 국정에 협조 많이 부탁합니다.”

“예...”

대통령이 착석하자 일동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은 비서실장, 국정원장과 함께 방수용과 대화를 나누었다. 식사 중이므로 간 이식에 대한 소감과 살아가는 얘기가 주제였다. 물밑 협상은 이미 따로 끝난 모양이었다.

“청와대 식사 어때?”

옆에 앉은 부원장이 살며시 물었다.

“그저 그런데요?”

윤도가 웃었다.

“그렇지? 역시 이런 자리의 식사는 아무리 메뉴가 좋아도 팍팍하단 말이지.”

“예...”

“언제 우리 강기문 박사랑 같이 한 끼 하시자고.”

“그러죠.”

이철중의 제의를 받은 윤도가 웃었다.

“그런데 채 선생님.”

물을 마시던 대통령이 윤도를 호명했다.

“네?”

“방금 우리 방 비서님 장침을 놔드렸다고요?”

“네...”

“그걸로 혹시 충혈도 해결이 되나요? 내가 아까 눈에 뭐가 들어가면서 갑자기 충혈이 되어서...”

“간단합니다. 팔꿈치에 한 방이면 되거든요.”“알겠습니다. 식사 끝나면 좀 부탁해요.”

대통령의 오더가 들어왔다.

원래 대통령의 질병은 국가기밀이다. 만약 중요한 진료라면 은밀하게 말했을 일이다. 하지만 충혈 같은 건 일회적인 것이다 보니 방 비서와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온 말이었다.

차까지 나오자 식사가 끝났다. 청와대 식사도 별 건 없었다. 모두 다 나간 자리에 윤도가 혼자 남았다. 대통령의 시침을 위해 남게 된 윤도였다.

“채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죠.”

잠시 후에 비서관이 들어왔다. 그를 따라 의무실로 향했다. 대통령의 전용 의무실은 따로 있었다. 거기 대통령이 있었다. 국정원 차장보 김광요와 함께였다.

진맥 후에 침을 놓았다. 대통령은 삼초가 좋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미열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 큰 문제는 없었다. 대통령은 각 파트의 주치의들이 정해져 있으니 별 다른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충혈을 잡는 침은 곡지혈로 들어갔다. 혈자리에서 눈의 기를 조절했다. 대통령의 눈은 이내 조금씩 맑아졌다.

“이야, 이거 진짜 마법이네, 마법.”

손거울을 본 대통령이 좋아했다.

“채 선생, 기왕 침 맞은 김에 그걸로 내 열도 좀 내릴 수 있을까? 미열이 있는데 해열제를 먹어도 그만그만 해서...”

“봐드리죠.”

윤도가 다시 장침을 잡았다. 장침은 활육문으로 들어갔다. 활육문만큼 열을 다스리는 요혈도 드물었다.

“끝났습니다.”

발침을 한 윤도가 말했다.

“응?”

대통령이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사라진 것이다. 체온계가 동원되었다. 열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야, 이거...”

대통령은 믿기지 않는 듯 윤도를 바라보았다. 윤도는 가벼운 목인사로 답례했다.

“침술이 대단하시네?”

“고맙습니다.”

“사실 내가 요즘 미열이 잦아요. 주치의가 처방을 주면 곧 괜찮아지기는 하는데 며칠 지나면 또 그러고... 원인이 뭘까?”

대통령이 물었다.

“삼초의 기혈이 부조화를 이뤄서 그렇습니다. 삼초수와 양지혈, 중완혈 등을 자침하면 되는데 그것들을 주관하는 활육문혈에 침을 넣어 부조화를 밀어냈으니 미열은 다시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럼 임시방편이 아니고 완치를 시켰다는 말인가?”

“마침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야, 이래서 방 비서가 채 선생을 초대해달라고 한 모양이군?”

대통령이 차장보를 돌아보았다. 차장보는 조용한 미소로 답했다.

대통령은 한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저런 질문도 이어졌다. 윤도는 아는 대로 답했다. 기분이 좋아진 대통령이 직접 금일봉을 건네주었다. 초청자 모두에게 준 봉투라니 그냥 받았다. 그걸 들고 나오려할 때 김광요 차장보가 운을 떼고 나왔다.

“채 선생님.”

“......?”

“방수용 비서 말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하시더군요. 강기문 박사의 간 이식 집도도 그렇지만 채 선생님 장침에 진짜 매료된 눈치입니다.”

“예...”

“덕분에 우리 회담은 의미 있게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남북관계라는 게 갑자기 좋아지기 어려운 환경에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협상이나 발표까지는 아직도 산 너머 산입니다.”

“......”

“아마 다음에는 우리 대표단이 평양에 가게 될 거 같습니다. 그래도 간 이식 덕분에 길이라도 열린 거지요.”

“......”

“그런데... 방수용 비서가...”

차장보는 윤도를 돌아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북한에 들어올 때 우리 쪽 의사를 한 사람 동행해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달았습니다. 처음부터 간 이식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라 그쪽의 첨단 신기술 도움을 받으려나 생각했는데...”

의사 한 사람.

그렇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강기문이었다. 그는 한국 최고의 간담췌장 이식전문가. 더구나 방수용의 간 이식까지 성공리에 마친 사람이었다. 하지만 차장보의 말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채윤도 선생을 콕 집어버렸습니다.”

“......!”

흘려듣던 윤도가 발딱 눈빛을 들었다.

나?

채윤도?

눈빛이 대신 그 말을 했다.

“바쁜 줄 알지만 이게 남북을 위한 일이라... 죄송하지만 다음 방북 때 저희 측 대표와 동행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대통령님과도 상의했는데 채 선생님께 허락을 구해보라고...”

“......”

“부탁합니다.”

“제가... 제가 지명이 되었다고요? 간 이식을 한 강기문 박사님이 아니고요?”

“예...”

“믿기 어렵군요.”

“정보망을 통해 알아보았더니 연관이 있기는 하더군요. 방수용의 외사촌 형님께서 북한에서 꽤 유명했던 한의사였다고 합니다.”

“......!”

그 말이 윤도 뇌리에 불빛을 당겼다. 그제야 느낌 하나가 왔다. 아까 선문답처럼 던진 어린아이와 족삼리의 뜸 이야기. 비껴가는 질문으로 윤도의 실력을 떠본 셈이었다.

“제가 거기 가서 무엇을 하는 겁니까?”

“글쎄요, 그냥 인사를 위해 오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침을 놓아달랄 수도 있고... 자세한 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만 한의사에게 수술 같은 큰 요구야 하겠습니까?”

“일정은요?”

“일단 2박 3일로 잡았습니다. 자세한 건 저쪽에서 주석궁의 내락을 받은 후에 다시 결정이 될 겁니다. 그때까지 별 다른 의도가 있는지 체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박 3일?’

“이 일로 야기되는 경제적인 손실은 저희가 전부 보전하겠습니다. 그러니 경색된 남북관계를 생각해서 대승적인 협조를 부탁합니다.”

“......”

“부탁합니다.”

김광요는 한 번 더 정중했다.

경색된 남북 관계.

연결고리가 되는 북한 고위층의 특별한 지명.

빼도 박도 못하게 엮여버린 윤도, 북한행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

원장실의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들어온 환자, 기가 막힌 미인이었다. 윤도는 사실 부용이 보낸 연예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공기업의 여직원이었다.

“......!”

화면에 뜬 종합병원의 진단명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녀의 병명은 직장암이었다. 그것도 말기의 직장암...

“원장님.”

첫 마디는 동행한 어머니에게 나왔다. 환자의 모친 또한 왕년에 미스 코리아 쯤은 했음직한 미녀였다. 그 짐작은 그녀의 말에서 적중하고 있었다.

“제가 한참 젊을 때는 미인대회에서 수상도 하곤 했습니다.”

“네... 지금도 굉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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