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원장님, 오늘 광희한방 워크샾 주제 발표 가시죠?”
탁상명이 자가용에서 물었다.
“예...”
“저도 공부 좀 하러 참가합니다. 같이 가시죠?”
“그러죠 뭐.”
“제가 앞서 갑니다. 따라오세요.”
탁상명이 먼저 도로에 올라섰다. 윤도는 내려두었던 닭다리를 문 채 뒤를 따랐다. 닭다리 맛은 기가 막혔다. 기름이 쪽 빠져 담백하기 그지없는 맛. 윤도의 세로토닌이 콸콸 솟아나왔다.
그리고 이날, 윤도의 기이한 인연도 콸콸 솟았다.
대륙 침술대가 장지커-2
대륙 침술대가 장지커-2
“채 선생님!”
“채 선생!”
광희한방대학병원에 도착하자 난리가 났다. 안미란을 필두로 마혁과 송재균 등이 달려나와 주었다. 친분이 있던 간호사 몇도 인사를 빼먹지 않았다.
“여기서도 인기가 굉장하군요. 저 먼저 워크샾 장소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분위기를 본 탁상명이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요즘 상종가던데 한의원은 어때?”
송재균이 다가와 물었다.
“덕분에 잘 됩니다.”
“선생님, 저 다음 주에 연수 좀 가도 돼요? 이틀 휴가 받았는데...”
안미란은 옆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휴가면 쉬어야죠? 인턴 생활도 녹록치 않은데...”
“어? 그 말 누가 들으면 내가 무지하게 굴려먹는 줄 알겠네?”
송재균이 조크로 방어를 했다.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허락하면 바로 달려갑니다.”
“편한 대로 하세요. 저야 뭐 안 선생님 오시면 일도 시켜먹고 좋지요. 각오하고 오세요.”
윤도는 반승락으로 넘어갔다.
“이어, 채 원장.”
복도 끝에서 길상구 부원장이 다가왔다. 다른 과장들도 셋이나 있었다. 조수황은 러시아 침술전수 차 출국한 관계로 보이지 않았다.
“안녕들 하셨어요?”
“우리 한의의 보물이 어려운 걸음해 주셔서 정말 고맙네.”
부원장이 반색을 했다.
“깜냥도 못 되는 게 주제넘게 발표자로 나서서 망신이나 사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 마시게. 채 원장 침술이야 이미 공인된 마당에... 이번 발표 주제가 치매혈이라고?”
“예... 아는 게 많지 않아서...”
“기대가 크네. 가세나.”
부원장이 길을 가리켰다. 윤도는 그들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엇!’
접수장 앞에서 윤도는 또 한 번 뒤집어졌다. 거기 서있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중국 명의순례에서 만났던 율리안과 맥과이어였다.
“헤이, 율리안!”
특별히 율리안과 더 친했던 윤도, 반가이 다가가 악수를 나눴다. 둘의 언어는 영어였다. 윤도는 영어도 어느 정도 가능한 상태였다.
“여기 웬일입니까?”
윤도가 물었다.
“워크샾에 참석차 왔습니다. 중국 쪽에서 굉장한 침술가들이 온다고 해서... 닥터 채는요?”
“아, 저도...”
윤도가 얼버무렸다. 헤이싼시호 이후에 엄청난 각성을 한 윤도였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율리안이니 대충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맥과이어와도 힘찬 악수를 했다. 맥과이어 뒤로 한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베이징대학을 나온 왕민얼이었다. 바로 중국에서 윤도와 혈자리 승부를 겨룬 그 재원...
“반갑습니다.”
왕민얼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다소 거만이 담긴 손길이었다. 진행표를 받아들고 이유를 알았다. 왕민얼이 발표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진행표를 흝어본 왕민얼, 거기 실린 윤도의 이름을 보더니 풋, 실소를 터트렸다.
“채 선생이 한국 대표 발표자?”
묻는 목소리도 착하지 않았다.
“아, 예...”
“한국 발표자는 이창수 선생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분이 갑자기 사고를 당하는 통에 대타로..”
“허! 장지커 박사님은 이창수가 나오는 걸로 알고 계시던데...”
왕민얼의 입에서 짧은 숨이 나왔다. 어이상실의 표정이었다.
“진짜 닥터 채가 한국 측 대표로 발표하는 겁니까?”
율리안 역시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과 일본의 시침 발표자들은 쟁쟁한 침과 뜸의 달인들. 특히 장지커가 그랬다. 그는 상해중의학대학의 거두. 상해와 소주, 베이징 일대를 통 털어 최고의 침술가로 칭송 받는 사람이었다.
일본의 경우도 굉장한 스펙의 소유자가 왔다. 하지만 한국의 발표자 채윤도. 다른 발표자들에게 비해 스펙이 헐렁했다. 게다가 서른 미만의 나이였다.
장지커...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포스부터 달랐다. 무심한 듯 안으로 깊은 눈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 옆의 중국 중의들 또한 면면이 굉장한 실력자들이었다. 장지커를 영접해온 건 장 박사와 한의사협회 회장이었다. 정부 측 관계자들과 함께 그들이 입장했다. 워크샾의 시작이었다.
국제침구협회 회장이자 워크샾의 대회장을 맡은 한의사협회 회장이 개회인사를 했다. 윤도는 의제 발표자로서 앞 줄에 앉았다.
“채 선생님 말이에요.”
대회장의 뒤쪽 좌석에 앉은 안미란이 송재균과 마혁에게 운을 떼었다.
“제일 반짝거리지 않아요?”
“채 선생 침술이야 반론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중의들에게는 밀릴 지도 몰라. 특히 저 장지커 박사...”
마혁의 반응은 신중했다.
“저는 채 선생님 침술이 최고라고 봐요. 화타나 편작이 오지 않는 한...”
“어차피 우리는 배우는 입장이니까 지켜보자고. 우리도 언제 저 자리 한 번 서야지.”
송재균의 눈이 반짝거렸다.
몇 편의 논문이 먼저 발표되었다. 워크샾 언어는 영어였다. 개중에는 권위 있는 과학지에 실린 것도 있었다. 윤도는 외상후증후군에 대한 한약처방안과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혈자리와 호르몬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논제 발표자는 한국의 공광태였다. 대한민국 10대 침술 한의사에도 꼽히는 인물. 그는 공부하는 한의사로도 유명했는데 그런 성향답게 외상후증후군이라는 표제를 들고 나와 관심을 끌었다.
한의학에서는 외상후증후군을 ‘탈영실정(脫營失精)’이라는 의미로 포용한다. 동의보감에 이르기를 탈영은 고관대작으로 살다가 대역죄나 가문의 몰락으로 천민이 됨으로써 생기는 병을 이른다. 거부로 살다가 갑자기 비렁뱅이 거지가 되면서 생기는 병은 ‘실정’이라고 한다.
둘 다 상실감과 함께 심리적 충격이 클 일이다. 여기에 경계(驚悸)와 정충(怔忡)의 관점을 더해진다. 경계는 분노, 불안, 수면장애, 공포 등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현상이고 정충은 경계의 증상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걸 뜻한다.
공광태는 체질별 대응과 함께 사물안신탕, 교감단, 가미온담탕, 청왕보심단 등을 기본으로 삼고 기가 막혔을 때는 향부자, 담음으로 인하면 반하 등의 사안별 처방을 덧붙였다. 실제로 샘플 탕약까지 들고 나와 시음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참가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알코올중독과 호르몬의 관계는 중국 측 참가자의 주제였다. 알코올 환자는 윤도도 경험했던 일. 하지만 이 연제의 포인트는 금단현상의 관리 차원에서 침술과 호르몬의 상관관계를 연결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 역시 요혈로는 신문혈을 내세웠다. 신문혈에 자침한 이후 코르티코스테론,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등의 변화에 연계한 내용이었다.
신문혈에 자침하면 이들 신경내분비계 물질의 변화로 인해 불안장애가 감소한다. 침으로 불안증상을 해소하는 게 단순한 근육자극이나 안정이 아니라 호르몬의 분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깊이를 갖춘 내용이었다.
짝짝짝!
뜨거운 박수와 함께 연제발표가 끝났다.
“이창수 선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잠시 휴식 시간이 되자 장지커가 한의 회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는 이창수와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발표자의 한 사람인 그가 보이지 않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죄송하지만 이창수 선생은 오늘 참가하지 못합니다.”
“못한다고요? 지난 번에 보내준 참가자 명단에서 분명 보았는데?”
“그게... 2주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저런, 그럼 오늘 한국 측 발표자는 누가 나오는 겁니까?”
“여기 채윤도 선생입니다.”
회장이 장 박사 옆에 앉은 윤도를 가리켰다 .
“......!”
거기서 장지커의 눈빛이 출렁거렸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뒤편의 왕민얼 표정도 함께 일그러졌다. 그는 조금 전에 사실을 알았지만 차마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이창수 선생 대신이란 말입니까?”
“예. 나이 어리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침술의 명인입니다.”
“회장님!”
장지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급작스러운 사고라 중국 측에 일일이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채 선생의 실력이 출중하니 기대를 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날더러 저 새파란 신인 한의와 같은 자리에 서란 말이오?”
“박사님, 여기 채윤도 선생은 우리 한국 한의의 희망봉입니다. 지켜보시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장 박사까지 나서서 장지커를 달랬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렇다면 나도 내 제자로 발표자를 대체하겠소.”
“......!”
폭탄선언이 나왔다. 내외신 기자에 더불어 많은 관련자들이 참석한 워크샾. 그들이 장지커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그런데 장지커가 발표자로 나서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면 제가 발표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상황을 직시한 윤도가 의견을 개진했다.
“채 선생이라고 했소? 당신에게 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고 주최 측의 실례를 짚는 것이오. 본래 우리 침술 워크샾은 각국의 침술 체급에 맞춰 발표자를 선정하는 게 관례였다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려니 했거늘 이리하다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창수 선생께서 갑자기 교통사고를... 해서 저희가 부랴부랴 대타를 알아본 결과 여기 채 선생 침술이 신의에 버금가기에...”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채 선생을 내세우지 않았소?”
“.......!”
회장의 설명이 장지커에게 막혔다. 사안만 보면 그가 노여워하는 게 맞았다. 주최 측의 배려가 부족했으니 기분 나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최 측 역시 생각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미리 설명하면 콧대 높은 장지커가 불참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워크샾의 유명무실해질 일. 그렇기에 현장에서 설명을 하려던 게 의도와 어긋나고 있었다.
“박사님, 부디 해량을 하시고...”
“이건 경우가 아니외다. 우리 중국도 한국 측 발표자의 수준에 맞춰 젊은 신예로 교체하겠습니다. 이거야 원, 혹 기도환의 수제자나 된다면 또 모를까.”
기도환!
그 말에 윤도의 귀가 반응을 했다.
“박사님께서 기도환을 아십니까?”
윤도가 물었다.
“젊은이야 말로 한국 근대침술의 거목 기도환 선생을 아신단 말인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은 들어본 모양이군. 그 분은 내 스승이시라네.”
내 스승.
장지커의 발음은 또렷했다.
“......?”
윤도가 휘청 흔들렸다. 기인 침술명인 기도환. 그는 한국인이다. 광복과 한국 동란 이후 부산에서 침술을 행한 후로 행방이 묘연해지기는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중국인과?
“그 분의 노년기에 항주에서 만났지. 그분은 평생 딱 두 명의 제자를 가르쳤는데 한국에서 한 명, 그리고 중국에서 한 명이었소. 중국의 한 명이 바로 나라오.”
장지커가 침통을 빼들었다. 순간 윤도의 정신줄이 우르르 더 흔들렸다.
“그 침통...”
오죽하면 발음도 새었다.
장지커의 질박한 침통...
눈에 익었다. 아니 윤도에게도 있었다. 윤도도 자신의 침통을 꺼내들었다. 장지커의 것과 똑 같았다.
“이, 이럴 수가?”
윤도의 침통을 본 장지커도 휘청 흔들렸다. 스승에게 물려받은 침통. 아니, 사실은 거의 떼를 써서 얻은 것이었다. 침통은 스승이 직접 만들었다. 그렇기에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걸 윤도가 가지고 있다니... 자신의 것과 똑 같다니...
장지커가 윤도의 침통을 열었다. 안팎을 살폈다. 밑바닥에 스승의 사인이 있었다.
ㄱㄷㅎ.
한글 이니셜을 세로로 배열한 사인. 오래 되어 빛이 바랬지만 자신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침통보다 더 오래되어 보였다.
“당신, 이걸 어디서 어떻게?”
묻는 장지커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한의원 터에서 발견했습니다만...”
“당신 한의원 터?”
“종로 끝에 있습니다. 일침 한의원이라고...”
“일침 한의원?”
그 말을 들은 장지커가 주저앉아버렸다.
“박사님!”
놀란 중국 측 참가자들이 몰려들었다. 장지커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물렸다. 그리고 질문을 계속 쏟아냈다.
“일침 한의원이 아직도 있단 말이오? 스승이 떠났으니 없어진 것으로 아는데?”
“한의원 문을 닫았던 건 맞습니다. 출판사가 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제가 매입해서 원래대로 한의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윤도가 한의원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일침 한의원>
빛바랜 휘호가 선명했다.
“이거...”
놀란 장지커가 자기 핸드폰을 열었다. 사진들을 펼치자 놀라운 컷 하나가 나왔다.
<일침 한의원>
윤도가 쓰는 그 현판이었다. 그 현판 앞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깡마른 몸매에 별처럼 단정한 눈, 기도환이었다. 그가 기도환이라는 건 한국의 원로 한의사가 인증해 주었다.
“기도환이 맞습니다.”
순간 대회장이 통째로 술렁거렸다.
<기인 한의사 기도환.>
<해방 전후 고작 30대의 나이로 허임에 버금가는 명침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
<근대한국 침술의 전설이자 최고봉.>
<비기 침법 창안자.>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후, 나아가 60년대 격랑의 소용돌이 이후에 자취를 감춘 그의 종적이 뜻밖의 장소에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거목은 서로 통한다!
“인연이군.”
장지커의 목소리에서 각이 확 무너졌다.
“내 스승의 제자는 아니다...”
“그런데 스승의 본산을 차지하고 스승의 침통까지도 가지고 있다...”
혼자 몇 마디를 중얼거린 장지커, 결단을 내린 듯 한의 회장에게 선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