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인연이니 그대로 시작합시다.”
그 한 마디에 워크샾 실내에 활기가 돌았다.
장지커가 먼저 발표자로 나섰다. 거기 발표보조 중의로 나온 게 왕민얼이었다. 당대 최고 침술가의 하나인 장지커. 그러니까 왕민얼은 그의 최측근이자 제자가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에 힘을 줄만한 일이었다.
소소한 시침 시범은 왕민얼이 맡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건 아니지만 그도 장족의 발전을 한 것으로 보였다.
침술의 주제는 심허(心虛)에 의한 공황장애였다.
심허는 심장의 음양, 기혈 부족으로 야기되는 여러 질환을 말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프며 불안해 잘 놀라며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심허는 공황장애의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심허는 간이나 신장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시침 사례는 40대 중반의 티벳거주 여성이었다. 중국에서도 내놓으라 하는 직장에 다니던 그녀, 아버지가 당 고위직이라 집안도 좋았다. 원인은 티벳 탄압에 항의하는 스님의 분신 장면이었다. 흐린 날이었다.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나와 광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몇 미터 옆에서 스님이 분신을 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았다.
이후로 머리가 무겁고 배가 더부룩했다.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는 것 같고 직장에서도 감시를 받는 것 같았다. 불안감 때문에 직장도 그만두었다. 이후 우울증이 겹치며 자살까지 시도했다. 잠만 자면 악몽을 꾸었다. 스님 옆에서 함께 불타는 꿈이 수십 번이나 지속되었다.
정신병 치료에 우울증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 지인의 소개로 장지커를 찾아왔다. 장지커는 심허로 판단했다. 심허면 폐실(肺實)이어야 했지만 특이하게도 폐허(肺虛)였다.
설명에 이어 화면에 진단화면이 떴다.
치료가 시작되었다. 장지커의 침은 기본부터 지켰다.
곡지혈이 우선이었다.
이는 허약으로 인한 실신을 막으려는 기본 조치였다. 명의의 명침은 기본부터 출발한다. 신의 손가락을 쓰는 윤도이기에 곡지혈 우선 원칙을 생략할 때가 많지만 머리에 잘 새겼다.
다음으로 백회혈을 잡았다. 백회혈은 인체의 모든 혈의 조정자로 불린다. 만백(百)을 모은다고(會) 해서 백회(百會)혈이다. 이어진 혈자리는 대저와 폐수, 심수와 격수혈이었다. 마무리로는 중완, 중부, 거궐과 기해, 태계혈을 꿰었다.
발표에는 영상이 뒤따랐다. 영상의 일부는 왕민얼이 찍었다. 침구실의 장지커는 신선처럼 보였다. 그는 몰입했고 집중했다. 그러나 시침만은 부드러웠다. 새털처럼 어루만지되 소리없이 들어가는 경지가 거기 있었다.
영상에서 시침이 될 때마다 왕민얼의 손이 인체모형 마네킹에 시연을 했다. 무엇도 표시되지 않은 모형이지만 왕민얼의 손은 틀리지 않았다.
“첫날부터 굉장히 편안하게 잤어요. 왜 진작 침을 맞지 않았나 후회가 들더라고요.”
모델이 된 환자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이 환자는 이틀만에 퇴원을 했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환한 표정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남자환자였다. 20대 후반이었다. 병의 시작은 다르지만 다른 조건은 비슷했다. 다만 폐허가 아니라 폐실이었다. 취혈은 간으로 심허를 돕는 방법으로 변했다. 처방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전반적인 진행은 같았다. 이 남자는 아침에 병원에 들어와 오후에 나갔다.
탕제의 처방은 귀비탕과 유사했다. 구성 약재의 면면이 따뜻한 성질이었다. 인삼과 백복령, 백출과 감초를 베이스로 한 구성이었으니 사군자탕과도 유사했다.
마지막은 장지커의 시침 시범이었다. 광희한방병원에서 자원한 환자 둘이 보호자와 함께 나왔다. 왕민얼이 준비하고 장지커가 시침을 했다. 참관을 원하는 사람 10여 명을 무대에 세웠다. 율리안과 맥과이어에 이어 탁상명까지 뛰어나왔다. 물론 무대에서는정숙이었다. 환자를 위한 배려였다.
임시 침구실은 투명부스로 구분되었다. 밖의 참관자들이 볼 수 있지만 감염을 우려한 당연한 조치였다. 장지커가 침을 잡자 참관자들이 마른 침을 넘겼다. 좌석의 참가자들도 숨을 죽였다. 장지커의 침술은 화면으로도 중계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의 시침은 솜털을 다루는 느낌이었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시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발침을 하자 환자가 가뜬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굉장히 편해요.”
환자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장지커는 그들과 함께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뜻밖의 행운을 받은 환자들은 장지커에게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짝짝짝!
장지커는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며 차례를 끝냈다.
“이야, 역시 침술은 중국이야.”
자리로 돌아온 율리안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발표자는 한국 대표 채윤도 선생입니다.”
사회자가 영어로 윤도 차례를 알렸다. 윤도가 일어서자 안미란과 송재균도 함께 일어섰다. 둘은 손을 흔들며 윤도를 응원했다. 딱 그 둘인 건 아니었다. 문 쪽 통로에 간호사들도 있었고 전설로 남은 윤도의 이름을 기억하는 환자들도 몇 명 동참하고 있었다. 탁상명 역시 빠지지 않았다.
“닥터 채.”
율리안과 맥과이어의 응원은 단순히, 형식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직 윤도를 몰랐다. 그저 대타 발표자 쯤으로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예상은 처음부터 깨졌다. 발표석에 선 윤도가 즉석 환자침술로 가닥을 잡아버린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이론적인 발표보다 실례를 보여주겠다는 것. 이번 워크샾 주제가 침술의 실연이었으니 이의를 달 일도 아니었다.
치료를 희망하는 치매 환자가 나왔다. 미리 선발된 80대 초반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정신신경과 계통의 요양병원에 있던 환자였다. 최근 잠만 자는 경향이 있어 아들이 잠시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침 맞기가 소원인 어머니를 위해 광희한방병원을 찾은 것.
진맥부터 했다. 시침 직전 곡지혈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건너뛰었다. 부작용 방지를 위한 기본이지만 윤도와는 상관없는 혈이었다. 이제는 신들린 손가락이 알아서 대처하는 덕분이었다. 기본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필요하지 않은 경우까지 행할 필요는 없었다. 축빈혈부터 시작했다. 할머니 또한 향정신성의약품이 찌꺼기가 오장육부에 가득한 까닭이었다.
오장육부 정화.
그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참석자들이 우 하고 우려의 소리를 냈다. 혈자리 때문이었다. 윤도가 축빈혈 근처에서 해맨 것이다. 손으로 눌렀지만 혈자리가 아니었다. 주변 혈과 비교할 때 명백한 축빈혈 자리. 하지만 할머니는 축빈혈이 없었다. 혈문이 막혀 폐쇄된 케이스였다.
“......!”
황당했다. 그렇다고 축빈혈의 역할을 포기할 수 없는 일. 별 수 없이 호침으로 갈았다. 축빈혈의 흔적에서 서푼 정도 멀리 찔렀다. 혈문의 반응이 오지 않았다. 다른 호침을 꺼내 서푼을 더 갔다. 그렇게 한 치 반을 가고서야 혈문을 대신할만한 신호를 받았다.
인간의 몸은 신묘한 것이니 기능 하나가 죽으면 반드시, 그 기능을 대신하는 또 다른 무엇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기에 장침을 넣었다. 화면의 정보로 환자의 상태를 아는 한의사들, 탄성은 윤도가 실수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약독성을 밀어냈다. 마지막 남은 사기가 밀려나갔을 때 오장의 모혈에 장침이 들어갔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 간수의 기문혈이었다. 여기서 또 한 번 야유가 나왔다. 이번에도 혈자리 문제였다. 이유는 축빈혈과 같았다.
태생적으로 작은 혈자리 소유자였던 할머니. 노화에 더불어 찾아든 병마로 인해 하나하나 퇴화해버린 것이다. 기문혈 역시 축빈혈처럼 호침을 앞세워 혈자리가 될만한 곳을 찾아냈다. 기문혈은 심수와 거궐혈을 지원할 회심의 혈자리. 그렇기에 약침을 듬뿍 묻혀 넣었다. 부드러운 침이기에 할머니는 침감을 느끼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렸다.
기문혈에서 심수혈과 거궐혈에 기를 보태주었다. 바닥난 심장에 기의 게이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전체 침감을 조절했다. 심장의 기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강력할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는 노령이고 인체 각부 기관은 노쇠했다. 그러니 병상생활을 할 정도면 되었다.
심장의 불씨가 살아나자 막힌 구멍이 열리기 시작했다.
다음은 역시 삼초의 조절이었다.
‘후우’
기가 상초까지 오르자 호흡을 고른 윤도가 치매정벌에 나섰다.
신문과 내관, 후계혈과 백회혈이었다. 신문혈과 내관혈도 원래 자리와 달랐다. 이 경우는 지나치게 달랐다. 이제는 야유도 나오지 않았다. 실내를 채운 건 우려와 웅성거림이었다. 중증 치매환자를 두고 멋대로 폭주하는 시침.
‘뭘 믿고 저러는 거야?’
‘저러다 대형사고 나지.’
참석자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눈빛은 몇 없었다. 그래도 안미란은 달랐다. 청중들의 야유 속에서도 안미란은 흔들리지 않았다. 혈자리 하나 못 찾을 윤도가 아니었다.
백회혈에는 약침을 썼다. 조율의 통제소 역시 백회혈에 차렸다. 거기서 365혈의 반응을 치매박살에 세팅했다.
화아악!
혈자리를 따라 기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막힌 곳은 뚫리고 정체된 곳의 기가 움직이는 것이다.
“아흠!”
할머니가 하품을 했다. 그걸 신호로 눈빛에서 광기가 흐려졌다. 윤도의 시침은 성공이었다. 다시 한 번 치매를 퇴치한 것이다. 화면이 할머니의 얼굴을 비쳤다. 처음의 얼굴과 비교된 얼굴이었다. 참석자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로 가도 서울을 간 것인가?
“뭐야?”
“운 좋네?”
한의사들이 중얼거렸다.
짝짝짝!
박수도 어설프게 나왔다. 힘차게 울린 건 안미란과 송재균에 탁상명, 부원장과 장 박사 정도였다.
실내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또 하나의 이상이 생겼다. 이번에는 침이 빠지지 않는 것이다.
“......!”
윤도의 등골에 긴장감이 스쳐갔다. 침술을 하는 국가가 적다지만 어쨌든 국제 워크샾. 여기저기 카메라까지 돌아가는 마당에 절침의 실수가 나와서는 곤란했다. 손을 움직여 각 모혈의 침을 잡았다. 역시 뽑히지 않았다. 살과 함께 붙어 움직일 뿐이었다.
‘근축혈, 양릉천혈...’
윤도의 머리가 바삐 돌았다. 서둘러 두 혈자리에 장침을 넣었다. 그제야 다른 침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두 혈자리에서 근육을 이완시킨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확실히 특이한 혈자리의 소유자가 분명했다.
‘휴우.’
윤도가 비로소 숨을 골랐다.
“아범아, 예가 어디냐?”
정신이 맑아진 할머니가 보호자로 따라온 아들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듣던 쇳소리 섞인 치매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동자 또한 치매 전의 그것이었다.
“큰 한방병원이에요. 저 한의사 선생님이 어머니 병을 고쳐주셨네요.”
대답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장지커가 그랬듯 윤도도 환자와 기념촬영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잘 모르는 할머니는 윤도 손을 잡고 소박하게 웃었다.
이제는 윤도가 설명할 차례였다.
“상세진단을 보시다시피 치매환자였습니다. 신장과 비장의 기혈부족으로 시작된 치매입니다. 그게 심장으로 이어져 발병했습니다. 본래의 치료는 신장과 비장의 원기를 북돋워야했지만 시간상 실효적인 시침법으로써 간장의 기를 올리는 변법을 썼습니다. 간장의 기로써 심장을 도왔으니 이는 침술의 기본원리 응용입니다.”
윤도가 설명하는 사이에도 한의사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버벅거린 혈자리 취혈법에 대해 입들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심장의 약한 기를 올리기 위해 오장육부의 조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장의 요혈을 일제히 자침했습니다. 문제는 침감으로 오장의 기를 조절해야하는 건데 이때 오행의 원리에 따라 취혈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즉 심장을 돕는 간수혈의 경우에는 정통 혈자리를 취하고 기타 장부의 요혈들은 오행에 따라 원혈에서 거리를 두어 자침하는 겁니다.”
윤도가 화면을 가리켰다. <오장>의 요혈을 찌른 영상이 멈춰 있었다. 과연 윤도의 설명대로 장침은 오행의 원리에 따라 혈자리에서 가깝고 멀었다. 모든 한의사가 윤도처럼 신의 손가락을 가졌을 리 없으니 보편적인 침술에 따라 혈자리를 취한 윤도었다. 다만, 기문혈만은 혈문 폐쇄로 인해 예외가 되었다.
“나아가 단전과 삼초를 조절해 치매 치료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치매의 요혈로 불리는 신문, 내관, 백회혈 등에 자침을 했다면 이 치매는 더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면 환자의 몸이 요혈의 기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했기에 오히려 부작용이 될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시침의 요점은 오장육부의 기 조화를 먼저 이루어 치료의 제1 처방으로 삼고, 단전과 삼초를 조절해 제2 처방으로 삼으며, 이 1-2처방을 바탕으로 치매혈을 공략했을 때 비로소 완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한 약침은 치매에 기본으로 쓰는 약재의 엑기스를 바탕으로 구성하였으며 본 환자의 알츠하이머형 치매는 물론 혈관성 치매에도 유용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윤도의 설명은 이쯤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질문 받습니다.”
윤도 발언이 끝나자 진행자가 멘트를 날렸다.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손을 들었다. 진행자는 장지커 뒤에 앉은 왕민얼을 지목했다. 그의 궁금증은 역시 혈자리였다.
“발표자께서 짚은 혈자리는 어떤 혈이었습니까?”
<너 실수했지?>
그와 다를 바 없는 돌직구가 날아왔다. 윤도가 실내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들이 원하는 질문을 왕민얼이 한 모양이었다.
“질문자께서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윤도가 왕민얼을 불러냈다. 그 역시 혈자리에는 일가견이 있는 중의. 긴 말보다 실제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이의를 제기하는 혈자리가 혹시 네 군데 입니까?”
“......?”
윤도의 질문이 너무 송곳이었을까? 벼르고 나온 왕민얼이 주춤거렸다.
“네 군데 아닙니까?”
다시 확인에 들어가는 윤도.
“맞습니다만...”
“한 번 직접 짚어보시죠. 보호자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윤도가 시침 박스 안의 보호자에게 동의를 구했다. 왕민얼이 들어가 할머니 옆에 섰다.
“제가 짚고자했던 건 축빈, 기문, 내관, 그리고 신문입니다. 한 번 짚어봐 보시죠.”
윤도가 권하자 왕민얼이 혈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손 끝에 전해오는 게 없었다.
“혈자리가 잡히나요?”
“......!”
당황한 왕민얼의 손이 바빠졌다. 그 손은 기본 혈자리의 한두 푼 위치에서 세밀한 스캔을 하며 혹시나 잡혀줄 혈자리 탐색에 여념이 없었다. 윤도는 지켜볼 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
누렇게 뜬 얼굴이 된 왕민얼, 그제야 윤도가 취혈했던 곳으로 손이 이동했다.
첫 변칙 혈자리 축빈혈...
“......!”
왕민얼의 숨이 멈췄다.
두 번째 기문혈...
“쉿!”
미간이 구겨졌다.
세 번째 신문혈...
“......!”
등골이 오싹해지고...
네 번째 내관혈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세하디 미세한 혈자리의 반응. 그건 변용 혈자리도 아니었다. 그야 말로 윤도가 창조한 혈자리.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 혈자리였다.
‘이럴 수가...’
왕민얼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출 수 없었다. 혈자리의 창조는 그가 말로만 들은 오장직자침(五臟直刺鍼) 못지않은 경악이었다.
“어떻습니까?”
윤도가 물었다.
“......”
“닥터 왕.”
“사실 나는...”
왕민얼이 겨우 입을 열었다.
“채 선생이 실수한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막힌 혈자리에 유사 혈자리를 세운 시침입니다. 실로 4대 기혈 시침이나 8대 기혈 시침에 못지않은 명침이니 순간의 의심을 사과하며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왕민얼의 승복선언이 나왔다. 그는 이 워크샾 최대 명의로 꼽히는 장지커의 수제자 역. 의문으로 가득하던 눈동자들은 단숨에 꺾였다.
그러자 일본 측 참가자이자 태극침법의 대가로 불리는 쇼우스케가 나왔다. 그도 혈자리 확인에 들어갔다. 그는 윤도를 향해 합장의 자세로 인증에 참가했다.
진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장지커가 먼저였다. 그조차 윤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니 대물은 대물끼리 통한 것이다.
짝짝짝!
짝짝짝!
박수는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안미란이 그랬다. 율리안과 맥과이어, 탁상명이 그랬다. 자신들은 꿈도 못 꿀 것 같은 치매환자 완치. 그걸 원샷으로 끝내버린 윤도. 율리안의 시선 안에 비로소 경외감이 생겨났다. 더구나 그렇게 신묘한 혈자리를 짚어내는 능력이라니...
채윤도.
그는 이미 명의순례에서 본 그 초짜 한의사가 아니었다.
분리되지 않는 남녀 합궁.
분리되지 않는 남녀 합궁.
윤도는 장 박사와 협회장, 부원장의 담소에 끼어 장지커를 만났다. 기인 침술명의 기도환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우리 스승님...”
장지커가 회상을 더듬었다.
“해탈한 신선 같았지. 숨 쉬는 것 외에는 오직 침술이었으니까.”
장지커는 찻잔을 든 채 기억을 이어갔다.
“한 번은 식사시간에 장침에 밥알을 끼워요. 내가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않고 좁쌀까지 끼우시는 거 아니겠나? 나중에 알고 보니 먹거리가 인간의 음양과 기혈의 원천을 이루기에 그것들의 침감을 알려고 그러셨다고 하더군.”
“......”
“결국에는 상지수와 지장수, 감로수, 약수도 떠다놓고 장침으로 찔러보시더군. 하루 종일 찌르시더니 그러셨네. 역시 상지수가 침빨이 좋아. 찌르면 소리 없이 길을 내주거든.”
“......”
“나중에 나도 흉내 내보았지만 깨닫지 못했지. 스승께서 곁에 계실 때 더 정진했어야 했는데...”
“돌아가신 겁니까?”
윤도가 물었다.
“워낙 떠돌기 좋아하는 분이라 항주에 수년 머물다 온주를 거쳐 복주로 떠나신 후로 연락이 끊겼네. 몇 사람을 말에 의하면 광둥성에 괴질이 돌았을 때 달려가 그들을 치료하다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고...”
“그럼 혹시 한국의 제자에 대해서는?”
“차씨 성을 가졌다는 것 밖에는 모르네. 한국전쟁 때 한국의 부산 일대에서 인연을 맺은 모양이던데...”
‘차 씨...’
“아무튼 채 선생과 내가 기연이군. 내 스승의 자취 속에 사는 사람이라니...”
“저도 박사님을 만나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중국에서 워크샾이 개최되면 한국 대표로 오시게. 내가 책임지고 초청자 명단에 넣도록 하겠네. 우리 왕 선생과도 아는 사이라니 더 기연 같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복도로 나왔다. 율리안, 맥과이어와의 약속이 또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