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진짜 연수 받으러 갈 거예요. 잊으시면 안 돼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안미란이 복도에서 소리쳤다.
땡!
문이 닫혔다. 솔직히 안미란의 말은 잘 듣지 못했다. 윤도는 기도환의 낡은 침통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마음을 끌던 침통. 이게 명침명의 기도환이 쓰던 침통이라니... 근현대 한국침술의 전설 기도환의 침통이라니...
‘차 씨 성을 가진 기도환의 첫 제자... 부산...’
다행이었다.
기도환의 신묘한 침술이 남은 것이다. 이 대한민국에...
1층 문이 열릴 때까지도 윤도는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깐베이!”
율리안이 중국어로 건배 재창을 했다. 윤도와 맥과이어가 소주잔을 들었다. 한국에 오면 소주에 삼겹살을 먹고 싶다던 둘이었다. 윤도가 그 거창(?)한 소원을 들어주었다. 셋의 언어는 영어였다.
“그나저나 닥터 채,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율리안은 흥분해 있었다.
“침술 말인가요?”
“맞아요. 나랑 중국 명의순례를 갔던 그 닥터 채가 맞습니까?”
“맞죠. 내가 율리안을 헤이싼시호에서 살렸잖아요.”
“그건 죽어도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 닥터 채는 솔직히 침술의 달인이 아니었잖습니까?”
“거기 다녀온 후에 침술에 조금씩 눈을 떴습니다.”
“맙소사, 그럼 맥과이어와 나는요? 일본의 료마도 그렇지 못한 거 같던데...”
“료마와 연락하십니까?”
“그럼요. 이번에도 오고 싶어 했는데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오지 못했습니다.”
“율리안도 머잖아 잘 하게 될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장지커는 중국 10대, 아니 5대 침술가에도 꼽히는 대가입니다. 그 사람조차 닥터 채를 인정했어요. 더구나 아까 그 난해할 취혈은 정말이지...”
“운이 좋았지요.”
“말도 안 되요. 혈자리는 확신이 없으면 침을 놓지 못합니다. 자칫하면 환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
“닥터 채.”
폭주하던 율리안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내려갔다.
“왜요?”
“비법 공개하세요. 대체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좋은 스승을 만난 겁니까? 아니면 중국 전설처럼 득도를 한 겁니까.”
“비결은 이 손입니다.”
윤도가 손을 들어보였다.
“손?”
“손의 감각을 섬세하게 다듬었더니 혈자리의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맥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선문답을 듣자는 게 아닙니다.”
“아무튼 드릴 말씀은 그것 밖에...”
“좋아요. 그럼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뭐죠?”
“어차피 명의의 조건이라는 게 스스로의 깨우침이 아니면 알려줘도 이룰 수 없는 거죠. 그러니 실리적으로 나한테 침이나 한 방 놔주세요. 아까 그 실력의 침술이라면 내 두통도 잡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두통이 있어요?”
“닥터 채에게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아까부터 머리가 아프네요. 진통제 스타일은 아니고...”
“그러자면 술을 그만 마셔야할 텐데...”
“상관없습니다. 술보다 좋은 친구들 만났으니 차로 바꿔도 좋습니다.”
율리안이 다가앉았다. 윤도가 즉석에서 장침통을 열었다. 기도환의 유품이라는 침통은 괜한 신뢰감이 아른거렸다. 어쩐지 윤도 자신이 명의처럼 느껴졌다.
쏙.
장침은 그 자리에서 일침사혈로 들어갔다. 이마 위의 상성혈에서 신회를 지나 전정과 백회혈까지 도달한 것이다. 침감은 율리안에게 또렷하고 부드럽게 전달되었다.
“우어어!”
지켜보던 맥과이어가 소주잔을 떨어뜨렸다.
“왜요?”
율리안이 맥과이어에게 물었다.
“우어어!”
맥과이어가 핸드폰 사진을 찍어 율리안에게 인증을 시켰다.
“우어어, 일침사혈!”
율리안 역시 윤도의 침술에 놀라 몸서리를 쳤다. 단순히 일침사혈이라 놀란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 작은 혈자리의 축을 틀림없이 지나고 있었다.
“닥터 채. 나, 나도... 오늘 다리가 많이 부었거든요.”
맥과이어도 다리를 걷고 나섰다.
“그러죠.”
윤도는 사양하지 않았다. 이런 질환 정도는 이제 윤도에게 껌에 속했다. 이 침은 발뒤꿈치의 수천을 통해 조해와 연곡, 공손혈을 따라 일침오혈로 들어갔다.
“어버버버...”
맥과이어는 그 신기에 취해 깨어나지 못했다.
“어때요?”
발침을 한 후에 윤도가 물었다. 두 외국 한의는 대답을 안했다. 귀신처럼 신묘한 시침에, 귀신처럼 감쪽 같은 치료효과... 둘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날 윤도를 바라보는 율리안의 시선은 아주, 매우, 몹시 특별했다. 뭔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촤아아!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몸이 개운했다. 메일을 여니 정나현의 보고서가 들어와 있었다. 일침한의원의 두 번째 결산이었다. 순익은 굉장했다. 그것들은 대개 탕제에서 나온 돈이었다. 첫달에도 그랬지만 두 번째 달에도 괄목할 흑자였다. 비용과 인건비, 적립금 등을 제하고도 억대의 이익금이 남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수입은 껌에 속했다. 정작 큰 돈은 왕진과 신약개발계약 등의 큰 건에서 들어왔다. 그 돈들은 억대에 동그라미 하나를 더 붙여야했다.
돈...
윤도의 꿈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명예와 침술에 대한 평가 역시 차곡차곡 쌓였다. 그래도 부용에 대한 배당은 오직 계약서대로 입금하도록 지시했다. 생각 같아서는 원외 수입에 대한 배당을 얹어주고 싶지만 계약은 계약이었다. 부용이 원하는 일이었다.
다른 메일은 강외제약 류수완 사장의 것이었다. 그는 지금 미국에 있었다. 윤도가 개발한 알레르기 비염과 아토피 피부염 신약 샘플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고 했다. 내친 김에 미국에 특허를 출원하고 아예 미국시장에서 먼저 출시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글로벌 제약회사의 합작생산 제의도 받은 상태였다. 류수완은 최적의 조건을 타진하고 있었다. 신약에 뻑간 그는 거의 올인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신약의 메이저 시장부터 장악.>
생각만 해도 매력적이었다.
그 와중에도 새로운 제의는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역시 타고 난 제약사 사장 같았다. 게다가 그 제의는 다소 엉뚱하기도 했다.
미용침!
출발은 그곳이었다. 전세계 모든 여성들의 꿈은 무엇일까?
건강일까?
한의사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류수완의 생각은 달랐다. 온세상 여성들의 꿈은 건강이 아니라 예뻐지는 거였다. 건강은 손에 쥐어져있으니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손 닿는 곳에 있는 건 늘 그런 취급을 받았다.
얼굴 미백.
주름 제거.
피부 탄력.
피부 보습.
그 무엇이건 하나만 건지면 초대박이었다. 류수완의 생각은 약용화장품으로 달려가 있었다. 변방의 제약회사가 메이저급으로 발돋움하기에 그만한 아이템이 없다는 것이었다.
의기투합이 되었다.
길은 있었다. 산해경의 ‘순초’였다. 부용에게 처방했던 그, 얼굴빛이 고와지는 영약. 부용은 그 약 하나로 단연 주목 받는 얼굴로 변신을 했다. 성분에 대한 분석과 대용 약제의 탐색은 이미 진경태가 맡고 있었다.
신약에 대한 또 하나의 욕심은 치매치료제였다. 거창하게 인류복지를 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평균수명이 확 늘어난 인간의 노년을 위해서는 암 극복이나 당뇨, 고혈압약 못지않게 필요했다. 누구 하나 치매에 걸리면 가족의 행복이 작살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신비경을 꺼내들었다. 산해경을 펼치고 중산경으로 갔다. 시원하게 흐르는 황하가 보였다. 청둥오리처럼 생긴 오리 떼가 날았다. 보기에는 그냥 오리지만 영약이다. 먹으면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었다. 그 인근에서 순초를 보았다. 류수완의 제의가 아니더라도 쓸모가 널린 순초를 손에 넣었다.
‘어머니에게도 한 번 써야겠네.’
혼자 웃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지난 시간. 발신자를 보니 율리안이었다.
‘아직까지도 어디서 한 잔 하고 있는 건가?’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율리안, 어쨌든 먼 나라에서 날아온 사람이니 전화를 받았다.
“헤이, 닥터 채.”
율리안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귀를 때렸다.
‘사고?’
불안한 예감에 촉각을 세웠다.
“지금 어디입니까? 좀 도와줄 수 있습니까?”
“무슨 일 생겼습니까?”
“설명이 곤란합니다. 미안하지만 아주 급한 일이니 시간을 좀 내주세요.”
“지금 말입니까?”
“부탁합니다.”
“......”
“닥터 채. 제발...”
“알았어요. 지금 어디입니까?”
“한강변의 빅 그랜드 호텔입니다. 1109호예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가능한 한 빨리 좀 부탁합니다.”
한 번 더 강조한 율리안이 전화를 끊었다.
‘뭐야? 누가 다치기라도 했나?’
옷을 챙기며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이다. 누군가 위급하면 병원으로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윤도를 호출했다. 무슨 일일까?
바릉!
윤도의 흰색 스포츠카가 굉음을 울리며 출발했다. 위급상황이니 속도를 올렸다. 늦은 밤이라 차가 많지 않았다. 스포츠카의 위력을 살짝 발휘했다.
“닥터 채.”
호텔 입구에 들어서기 무섭게 율리안이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설명은 나중에 하고 빨리...”
율리안이 윤도를 재촉했다. 키를 도어맨에게 던져주고 로비로 뛰어들었다.
땡!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멈췄다.
“여깁니다.”
그가 객실문을 열었다. 침대가 보였다. 남녀가 있었다. 담요를 덮은 둘은 불안에 찬 눈동자로 윤도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독일인, 여자는 한국인. 마약이라도 먹은 건지 푹 늘어졌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율리안!”
윤도가 돌아보았다. 남녀가 옷 벗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 호텔 안이니 흠이 될 것도 없었다. 이걸 보여주려고 그토록 호들갑을 떨었단 말인가? 윤도의 마음을 읽은 건지 율리안이 침대로 다가섰다. 그런 다음 굳은 표정으로 담요를, 천천히 벗겨냈다. 아주 천천히.
“......!”
담요 안의 풍경을 본 윤도가 얼어붙었다. 남녀결합 자세였다. 음양이 하나를 이룬 남녀. 문제는 그 음양의 요철이 빠지지 않은 상태라는 거였다. 독일인 남자는 당혹스러워 보였다. 여자 역시 수치심의 절정 위에 위태롭게 서있었다.
“문제가 이겁니다.”
율리안이 침묵을 깼다.
“세 시간 째랍니다. 아무리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답니다.”
“......”
“오해하실 거 같아 말씀드리는데 이 분은 제 사촌형님입니다. 지금 현재 독일 정부의 재무담당관으로 일하고 있고 여자 분은...”
율리안이 설명하는 동안 여자가 고개를 떨구었다. 척 봐도 콜걸은 아니었다. 율리안이 그녀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한국 외교부에서 일하는 분입니다. 두 사람이 업무상 연락관계에 있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서 교재를 하는 중이었고 법률이나 정서 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형님은 이혼을 했고, 여자 분은 아직 미혼이거든요.”
“......”
“한국정부와 협의할 일이 있어 저랑 같이 들어왔는데 이유야 어쨌든 이런 모습을 하고 구급차에 실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연락을 해왔는데 내 실력으로는 해결이 안 되네요. 그래서...”
율리안은 허덕이고 있었다. 그 말은 맞았다. 이런 상태로 실려 가면 해외토픽이 될 판이었다.
<독일 고급 공무원 한국 외교부 여사무관과 열애 중 합궁분리 안 돼 응급실행.>
<복상사 직전에 119에 구조되어 응급실에 실려 온 두 남녀, 알고 보니?>
인터넷과 언론에 불이 날 일이었다. 한국 네티즌이라면 착하게도 신상까지 살짝 털어준다.
뎅, 데엥...
인생 종치는 소리가 들릴 일이다.
허얼!
“......”
“닥터 채...”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에 독일인 레오폴트가 윤도를 불렀다. 윤도가 그를 돌아보았다.
“부탁합니다. 당신 침술이 신묘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탁해요...”
여자도 한 마디를 보탰다. 30대 초반의 그녀는 몸둘 바를 몰라 했다.
“혹시 약 먹었어요?”
윤도가 레오폴트에게 물었다.
“......”
말이 없다.
먹었군.
쓰레기통을 보니 흥분제와 발기제 포장이 보였다. 하나가 아닌 것을 보니 함께 먹은 모양이다. 눈이 맞은 동서양의 남녀, 작심하고 열차를 달렸다.
칙칙폭폭!
어느 정도 가면 역이 나와야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쉬지 않고 달렸다. 약 때문이었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남자가 먼저 이상을 느꼈다. 거시기의 힘은 빠지지 않았지만 피스톤 동작이 힘들었다. 알고 보니 아래의 여자가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남자의 ‘요’와 여자의 ‘철’이 단단히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
그제서야 이상을 느끼고 빼보지만 ‘요’가 나오지 않았다. ‘철’ 입장의 여자도 물 밖으로 나온 숭어처럼 히프 발광신공을 펼치지만 별 수 없었다. 완전한 합체를 이룬 남녀는 도무지 분리가 되지 않았다. 한 시간이 흘렀다. 두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빠지지 않았다. 결국 율리안에게 SOS를 치게 되었다.
“옷 좀...”
윤도가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옷을 받아 여자부터 걸치게 했다. 수치심에 몸을 웅크리면 근육이 수축된다. 그건 음양분리(?)에 득이 되지 않았다. 30대 초반이지만 나름 미모를 가진 여자. 몸매까지 나쁘지 않으니 벽안의 독일인 홀애비 가슴을 설레게 할 만도 했다.
“남자 쪽은 대략 이완이 되는데 여자 분이...”
율리안의 설명이었다. 살펴보니 침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윤도가 장침을 뽑아들었다.
복상사...
주로 알코올에 심취한 후에 여자라는 거산(巨山)의 향락봉에 오르다 발생한다. 주로 심장마비가 원인이다. 심장마비를 피한다고 해도 신장이 망가진다. 따라서 술을 많이 상태에서는 자제하는 게 좋다.
복상사에도 등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