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65)

침구실에서 침통을 열었다. 긴 탄력의 장침이 티잉 울림을 내며 나왔다. 윤도의 눈이 김다경의 혈자리에 가늠하기 시작했다. 환자의 혈자리. 머리 쪽 혈자리들이 살짝 밀린 감이 있지만 장침을 놓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힐금.

다시 환자를 보았다. 허공으로 올라간 그녀의 시선에는 지향이 없었다. 얼굴에 난 흉터들... 아마 자해를 했을 지도 모른다. 그 옛날 아름답던 얼굴은 간 곳 없고 삐뚤어 기울어진 입술과 콧날. 화려했던 삶을 산 스타였기에 더 괴로울 수 있었다.

장침을 몇 개 넣었다. 외관혈과 양유맥이었다. 이 세트는 기경팔맥법에 따랐다. 원래는 혈이 열리는 시간이 따로 있다. 하지만 윤도의 손가락은 그걸 넘을 수 있었다.

두 혈은 눈초리, 뺨, 목과 어깨를 치료하는 혈자리였다. 준비운동으로써 주변 기혈을 풀어 안면마비를 공략해 나갈 의도였다.

하지만 반응이 오지 않았다. 환자 때문이었다. 완전한 체념으로 스스로를 버린 마음. 그렇기에 얼굴에서 자극을 받지 않았다.

“김다경 씨.”

윤도가 벌떡 일어섰다.

“예?”

“틀렸습니다. 그 얼굴로 살 운명이네요.”

윤도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매정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환자가 눈을 감고 몸서리를 쳤다.

“괜찮아요. 어차피 각오한 일인 걸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윤도는 아무런 위로를 주지 않았다.

“내 인생... 이제 아무 것도 기대 안 해요.”

환자가 흐느꼈다.

“그래요. 실컷 울고 가세요. 어차피 틀린 얼굴입니다.”

거기 기름을 붓는 윤도.

“어어어엉!”

환자는 10여 분을 울었다. 눈자위가 구겨지고 콧날이 벌렁거렸다 뺨도 이리저리 구겨졌다. 그제야 윤도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다시 시침이었다.

“선생님?”

놀란 환자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계속 우세요. 희망이 없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환자분이 너무 무기력하게 있으니까 굳어버린 얼굴에 침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얼굴근육을 쓰도록 자극한 것이니 원망은 마세요. 치료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

그 사이에 윤도의 침이 중완과 족삼리였다. 상초 쪽에 기를 보태기 위한 포석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침감이 잘 받았다.

“이제 그만 울어도 됩니다.”

환자를 위로하며 본격 시침에 들어갔다. 윤도가 뽑은 장침은 모두 세 개였다. 양릉천에 한 방, 간수혈에 한 방, 그리고 근축혈에 한 방이었다. 모두 화침이었다. 수삼리도 생각했지만 통증이 크지 않아 제외했다. 지창혈 역시 일반적으로 침을 놓겠지만 빼놓았다. 많이 찔러서 안정되는 환자가 있고 원샷을 신뢰하는 환자가 따로 있으니 김다경은 후자에 속했다.

양릉천의 침에서 기를 감지했다. 침끝을 세밀하게 움직여 보사를 조절하며 마비를 몰았다. 침감의 기세가 약했다. 손끝이 후끈 힘을 밀어보지만 불뚝 성질을 부린 마비는 쉽게 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하긴 이 정로로 물러날 놈이라면 다른 한의원에서 끝장이 났겠지.’

이미 휴우증으로 굳어버린 안면마비. 때도 찌들면 잘 안 빠지는 편인데 질병이 오죽할까? 윤도가 장침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약침으로 들어갔다. 그 역시 안면신경마비에 많이 쓰이는 수구혈이었다. 입술 위의 혈자리를 차지하고 공세의 수위를 올렸다. 탄력을 받은 외관혈과 양유맥혈에 기가 실리는 감이 왔다.

한 번...

“......?”

환자의 입술이 제 자리로 돌아오다 다시 삐뚤었다. 이번에는 끌어올렸던 기를 뚝 떨어뜨렸다. 입술은 더욱 삐뚤었다. 기를 올렸다. 원래 얼굴로 돌아왔다. 그 과정을 반복했다.

가고.

오고.

환자의 안면은 마비와 풀림을 반복하며 윤도의 침감대로 움직였다. 그 활성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할 때 윤도가 남은 침끝을 다 밀어넣었다. 다시 삐뚤어진 상태로 돌아가려고 꿈틀거리던 입술... 제자리에서 완전히 고정이 되었다.

‘빙고!’

윤도가 쾌재를 불렀다. 보기 불편하던 김다경의 얼굴은 어느새 매력 만점의 여배우로 돌아와 있었다.

“잘 된 거 같습니다. 그대로 조금만 쉬세요.”

시간을 세팅하고 옆 침구실로 옮겼다. 옆 환자는 60대로 중풍을 맞아 손이 펴지지 않는 상태였다. 팔이 당기면 소장수혈을 잡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이 환자는 달랐다. 곡지혈에 장침을 넣으니 침감이 닿는 곳이 있었다. 극문혈과 심경 부근이었다. 본래의 혈자리는 아니지만 그 자리에 장침을 넣었다. 환자의 팔이 단숨에 펴졌다.

“아휴, 팔이 너무 편해.”

환자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따르릉!

김다경 쪽의 타이머가 울었다. 윤도가 돌아가니 승주가 타이머를 치우고 있었다. 윤도가 거울을 내주었다.

“어머!”

거울을 본 김다경이 비명을 터트렸다. 거울 안에 든 건 저주스러운 안면마비가 아니라 그녀의 진짜 모습이었다. 만인의 사랑을 받던 아름다운 얼굴...

“세상에...”

자기 얼굴이지만 이렇게 반가울 때가 없었다. 볼 때마다 저주와 한이 되었던 안면마비. 그리하여 스타의 길은커녕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그녀. 비로소 잊어버린 얼굴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고맙뜹니다, 선생님.”

눈물범벅 김다경이 함박미소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윤도의 시선은 출렁 흔들렸다.

“왜요? 뭐가 잘못되떠요?”

되묻던 김다경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은 돌아왔지만 발음이 풀리지 않은 것이다.

“괜찮습니다. 별 거 아니에요.”

윤도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다른 건 어때요? 두통하고 어깨 뻐근한 거, 얼굴 땡기는 거 등등...”

“괜탄은 거 가타요.”

김다경이 대답했다.

“그럼 마지막 정리에 들어가볼까요?”

윤도가 김다경의 등 뒤로 돌았다. 장침이 겨눈 건 유명한 아문혈이었다. 목덜미의 끝에 있어 자침을 꺼리거나 얕게 넣는 혈자리. 광희한방대학병원에서 수련의들의 의문을 단숨에 잠재웠던 그 아문혈. 마치 그날처럼 자연스럽게, 아문혈에 침이 들어갔다.

아문혈은 혀신경이 나가는 자리. 혀가 굳은 사람에게 더 없이 명혈이었으니 아문혈을 다룰 줄 아는 윤도가 걱정할리 없었다.

따르릉!

다시 타이머가 울었다. 윤도가 김다경을 바라보았다. 다소 긴장한 그녀는 바로 말을 하지 않았다. 혀 운동부터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 안에 고인 침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아...”

“......”

“선생님.”

“제 목소리 괜찮아요?”

“좀 길게 말해보세요.”

“아아,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들릴 거 같은데 듣기 괜찮나요?”

“한 번 더요.”

윤도가 핸드폰의 녹음 앱을 눌렀다.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아아, 저는 대한민국 여배우 김다경입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톡!

윤도가 녹음 앱을 눌렀다. 김다경의 목소리가 그대로 나왔다.

<저는 대한민국 여배우 김다경입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어때요? 이게 원래 김다경 님 목소리 맞나요?”

“우와, 맞아요. 저 한 번만 더 들려주세요.”

“그러죠 뭐.”윤도가 부탁에 응했다. 백 번이라도 틀어줄 용의가 있었다.

“선생님...”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걸 확인한 김다경, 그 큰 눈망울을 출렁이며 윤도를 바라보았다.

“저랑 두 가지 약속한 거 알죠? 잘 지키셔야합니다.”

“걱정마세요. 앞으로 제 삶의 제1원칙으로 삼을 거니까요.”

김다경이 소리를 높였다. 늘어졌던 그녀의 어깨는 스타답게 시원하게 올라가 있었고, 바닥에 질질 끌리던 자존심 역시 묵직하게 일어나는 게 보였다.

병 앞에 장사 없다.

병이 나을 때 행복하지 않을 사람도 없다. 본명 김성희의 김다경. 그녀는 나갈 때 마스크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녀를 알아본 예약환자들이 기념촬영을 원했다. 들어올 때는 죄인처럼 몰래 들어온 그녀. 이제는 거침없는 스타기질을 누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그 누구의 촬영에도 응했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마다 행복이 묻어났다.

장침, 평양 상륙-1

장침, 평양 상륙-1

방북.

그 역사적인 순간을 하루 앞두고 윤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방수용은 왜 윤도를 지목한 걸까? 그의 외사촌 형님이 한의사라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았다.

지난번 청와대, 그때의 진맥으로 보아 그에게는 이제 큰 문제가 없었다. 간 이식이 안정화된다면 평탄한 노년의 삶을 살아갈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감사의 마음으로 부를 리는 없었다. 그런 의미라면 강기문이 적합했다. 하지만 강기문이 아니고 윤도였다.

‘우린 어린 아들이 다리가 부실한데...’

단서가 될만한 사항은 딱 하나. 만약 그 일로 윤도를 원하는 거라면 아들이 앉은뱅이 정도는 된다는 얘기였다.

약제실 약장에서 영약을 바라보았다. 영약은 언제나 간당거렸다. 지금 몇 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도 한두 명 정도 약침으로 쓸 정도에 불과했다.

[언산]

독을 없애주는 영약.

[순초]

얼굴빛을 곱게 만드는 영약.

[웅황]

나쁜 기운과 독을 물리치는 영약.

[요초]

눈이 나빠지지 않고 색맹을 낫게 하는 영약...

하나하나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김광요 차장보의 당부 때문이었다.

“침 도구와 생활용품 외의 어떤 물품의 휴대도 금합니다.”

그건 북측의 괜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러니 영약이든 약침이든 휴대할 수 없었다. 남북의 경색을 풀자고 동행하는 마당에 빌미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푹들 쉬고 나오세요.”

오후에 대기실에 모인 직원들에게 윤도가 말했다. 국정원의 말대로 북한행을 숨기고 중국 왕진이라고 얼버무렸다. 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는 종일이 하고 남해 산 좀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진경태가 말했다.

“그동안 고생하셨는데 좀 쉬지 않고요.”

윤도가 진경태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게 쉬는 겁니다. 한동안 산에 가지 않았더니 약초 잊어버릴 지경입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원장님도 원행길 조심하십시오.”

진경태가 웃었다.

정나현을 통해 직원들에게 휴가비를 챙겨주었다. 일요일까지 붙이면 나흘을 쉴 수 있는 찬스. 직원들 입장에서는 황금의 시기가 될 테니 당연히 돈이 필요할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국정원에서 연락이 왔다.

“곧 차량이 도착합니다. 소지품 들고 도로 앞 편의점으로 나오십시오.”

전화는 간단하게 끊겼다. 일상용품 외에는 금지라했으니 챙길 건 침통 밖에 없었다. 침은 종류별로 넉넉하게 넣었다.

“중국간다고?”

어머니가 현관에서 물었다.

“네, 베이징대학에 침술 연수가 있어서요.”

“잘 다녀오세요, 우리 채 의원님.”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윤도를 배웅했다.

편의점이 가까워지자 차량이 보였다. 국정원 직원들은 평범한 회사원 차림이었다.

“티켓입니다. 심양에 내리면 저희 직원이 나와 있을 겁니다.”

조수석의 여직원이 비행기 티켓을 건네주었다. 좌석은 BUSINESS CLASS였다.

“그냥 타면 되나요?”

“네.”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물을 분위기도 아니라서 추가질문은 하지 않았다.

콰우우웅!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이륙했다. 대한항공이었다. 윤도는 침통을 꺼내들었다. 기도환의 것이었다는 낡은 침통에도 이제 반질한 손때가 오르고 있었다. 쓰임새가 잦은 까닭이었다.

옛날 한의사들은 자신의 침통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개념이 필요 없다. 침은 한 번 쓰고 버린다. 한의원 밖의 왕진도 거의 없다. 그러니 침통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도는 이 침통을 보면 괜히 안정이 되었다. 근현대 한국 한의학에서 최고의 침술가로 회자되는 기인 기도환. 그런 명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의 하나였다.

비행기는 이내 중국 땅에 닿았다. 입국 수속을 끝내고 나가니 30대 초반의 여자가 따라붙었다.

“채 선생님?”

“네.”

“따라오세요.”

그녀가 자연스레 앞서 걸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차에 올랐다. 한참을 달리자 아담한 음식점이 나왔다. 거기서 차가 멈췄다. 그녀가 안내한 건 작은 내실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여자는 공손한 인사를 남기고 나갔다.

‘헐.’

상당히 뻘쭘했다. 보안상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지만 윤도는 국정원 직원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놓인 차를 마셨다. 그때 복도에 발소리가 들렸다.

똑똑!

노크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더니 네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정원 차장보 김광요와 수행과장, 그리고 낯익은 정치인과 또 다른 국회의원이었다.

“오느라 고생했죠?”

차장보가 다가와 윤도 손을 잡았다.

“여긴 이번 밀담의 주역을 맡으신 오병길 의원님, 지지난 정부에서 중국대사를 역임하신 분이십니다. 그 옆은 박상직 의원님. 오 의원님 보좌역을 맡으셨습니다.”

김광요가 대표단 소개를 했다.

“채윤도입니다.”

윤도는 그저 인사를 할 뿐이었다.

“북측 방 대표가 채 선생에게 호의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회담의 유의미한 성과를 위해 분위기 조성을 잘 부탁합니다.”

오병길이 묵직한 당부를 날려왔다. 윤도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그럼 간단히 때우고 준비하시죠. 비행기 시간이 가깝습니다.”

김광요 차장보가 식사를 권했다. 오병길은 살짝 긴장된 모습이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을 먹다가 식체를 당하고 말았다.

“소화제 있나?”

수행원을 불러 약을 찾는 오병길 대표였다.

“제가 도와드리죠.”간단히 맥을 짚은 윤도가 장침을 꺼내들었다. 침은 발바닥의 이내정혈에 들어갔다. 대개는 합곡혈을 취하는 식체. 하지만 오병길의 요혈은 이내정혈이었다. 식체는 단숨에 해결되었으니 원샷 원킬의 처방이었다.

“오, 신침이시라기에 설마했더니?”

오병길은 단 한방에 윤도의 팬이 되고 말았다. 갑갑하고 더부룩하던 속이 시원하게 뚫린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차 편 두 대가 마련되었다. 윤도는 김광요 차장보와 한 차에 탔다. 목적지는 다시 심양공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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