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선생님.”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김광요가 말문을 열었다.
“예.”
“긴장되시죠?”
“조금은 그렇습니다.”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떤 뜻이신지?”
“정치적인 견해 말고... 그냥 마음 속에 든 북한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잘 모릅니다. 가본 적도 없고 갔다 온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요.”
“솔직해서 좋군요.”
“미리 알고 가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가 좋습니다. 다만 말만 조심하면 됩니다. 정치적인 것, 남북의 비교, 나아가 저들 정권 실세들에 대한 비판은 금지입니다.”
“예...”
“나머지는 채 선생님 평소 소신대로 하십시오.”
“북한에도 한의사가 있겠죠?”
“물론이죠?”
“혹시... 만날 기회가 있으면 만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아직도 저쪽에서 왜 저를 요청한 건지 이유를 모르시나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우리가 워낙 한의사에 관련된 정보는 전무하다시피 해서...”
“......”
“다만 이건 사견인데... 예전에 북한에 기이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기이한 사건?’
윤도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북한 최고위 장성의 하나가 러시아에 갔을 때의 일인데 급살을 맞아 절명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측에서 의료진을 동원했지만 진단은 변하지 않았죠. 사망.”
“......”
“해서 바로 평양으로 후송이 되었는데 공항에서 살아났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채 선생에게 더 호의적인 게 아닌가...”
“공항에서요?”
“거기 대기 중인 의료진 중에 한의사가 있었는데 다리에 장침 한 대 놓는 것으로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하더군요. 하도 전설 같은 얘기라 액면대로 믿고 있지는 않은데 목격자가 많은 것으로 보아 사실로 판단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다리에 장침.
그렇다면 그건 족삼리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믿지 않겠지만 한의학적으로는 가능했다. 이는 고래로 명의들에게 따라다니는 일화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한의학적으로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김광요가 물었다.
“가능합니다.”
윤도가 잘라말했다.
“호오, 채 선생 같은 분이 말하니 믿기는군요. 죽은 사람도 살린다...”
“모든 경우에 그런 건 아니고 몇 가지 실례가 있습니다. 아마 그 경우에 해당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어쩌면 북한 내에서 채 선생은 따로 행동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채 선생은 한의사입니다. 나머지 우리는 정치적인 협상팀이니 협상 테이블에 함께 앉힐 리는 없고... 나아가 북한에서의 저쪽 대표는 방수용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라고 통보가 왔습니다. 그러니 한의학에 조예가 깊은 방수용 비서가 채 선생에게 개별 침술을 맡기지 않을까 하는 게 우리 자체 분석입니다.”
“......”
“뭐 그렇다고 해도 저녁에는 숙소로 데려다줄 것으로 봅니다. 혹시라도 저희가 없는 곳에서 난처한 일이 생기면 즉답을 피하고 저녁에 와서 상의하세요.”
“예...”
“그리고 핸드폰 말입니다. 평양에서는 국제통화가 거의 불가능하니 참고하시고... 혹시라도 저쪽 정권에 대한 문자나 메모 같은 게 있으면 미리 지우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특별한 일이 생기면 핸드폰 조사를 당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 건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참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윤도가 답했다. 다시 심양공항이 코앞이었다. 보안수속은 올 때와 달랐다. 북한 측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대표로 수속을 밟아주었다. 한국 대표단은 윤도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었다.
평양공항, 북한 측 안내자 두 명이 나와 대기 중이었다. 신분확인이 끝나자 차량으로 안내했다. 윤도네 숙소는 깔끔한 호텔이었다. 그리 높지 않았다. 그 로비에 방수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방수용은 군관들을 거느리고 남측 대표단을 맞았다. 오병길, 박상직과 악수를 나누고 김광요를 거친 후에 윤도에게 다가왔다.
“채 선생, 와줘서 고맙소.”
윤도에게는 악수가 아니라 가벼운 포옹이었다. 앞선 인사들보다 극진한 모습이었다. 인사가 끝나자 일단 숙소로 안내되었다. 윤도네 객실은 빌딩의 최고층인 6층 전관이었다. 객실은 1인 1실로 배정이 되었다. 방은 꽤 넓었지만 침대는 싱글 하나였다.
‘북한...’
침대를 만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객실은 깔끔했다. 침대도 그렇고 인테리어도 그랬다. 욕실을 여니 그 또한 해외의 호텔과 다르지 않았다. 욕조도 괜찮고 샤워부스도 좋았다.
적막이 어색해 방송을 틀었다. 북한은 어떤 방송이 나올까? 전원에서 일하는 목가적인 풍경이 나왔다. 리모콘을 돌리자 뉴스가 나왔다. 한국에서 많이 보던 그 여자 아나운서였다.
“제국주의자들의 반공화국 책동이 극악에 달한 오늘, 우리 혁명전사의 고깃배들은 조국과 인민을 보위하는 군함의 심정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있으니...”
고조된 멘트 뒤로 서해바다가 보였다.
“미제의 몰골을 보면 구역질로 오장이 뒤집힐 지경이니 저들이 도발하면 우리는 저들의 심장부까지 정밀 타격하여 지구상에서 멸종 시킬...”
이번에는 미사일 자랑이다. 아나운서는 여전히 고조되었다. 한 뉴스 안에서 목표지점만 골라 핵으로 정밀 타격하겠다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었다. 얌전히 방송을 껐다.
똑똑!
잠시 후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옷가지를 정리하던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방문을 연 건 한국 대표단이 아니라 여자 접객원 둘이었다. 깍지 않은 통과일을 들고 있었다.
“지도자 동무께서 하사하신 과일입네다.”
접객원은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갔다. 쓰다달다 말도 없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뜻밖에도 북한 맥주가 보였다.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뽕!
소리가 좋았다. 컵에 따라 한 잔을 마셨다.
똑똑!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김광요 차장보였다. 그 뒤로 방수용이 보였다.
장침, 평양 상륙-2
장침, 평양 상륙-2
“아아, 편하게 쉬세요.”
방수용이 손짓을 하며 들어섰다.
“방 비서께서 채 선생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차장보는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아버렸다. 자리를 비킨 것이다.
“맥주?”
방수용이 테이블을 보며 뒷말을 이었다.
“맥주 좋아합니까?”
“아닙니다. 그냥 목이 좀 말라서...”“좋아하면 사양말고 드세요. 내 한 트럭이라도 넣어주라고 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잠깐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예...”
“남에서 맞은 침 말입니다. 효과가 정말 좋더군요. 그 후로도 가뜬합니다.”
“예...”
“채 선생.”
“예.”
“채 선생의 침은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네?”
“혹시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도 고쳐본 적 있습니까? 침으로 말입니다.”
“경계가 애매하니 말하기 곤란하군요. 불치와 난치도 종류가 많아서요.”
“스쳐갈 듯 진맥을 해도 칼날에 닿는 것처럼 날카로운 맥.”
“......?”
“허겁지겁하다가 달팽이처럼 느려지는 맥.”
“......!”
“그 안이 허공이라 새털을 만지는 듯 한 맥...”
“......!”
방수용의 말에 윤도의 시선이 굳었다. 그가 말하는 건 저승사자를 예약해둔 맥. 한의들이 가장 우려하는 진장맥이었다. 그러니 방수용의 질문은 죽을 사람도 고칠 수 있냐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의술은 장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라고 배웠습니다.”
“내 말은... 그런 경험이 있냐고 묻는 겁니다.”
“......”
“말하기 어려우면...”
“있습니다.”
윤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상대의 의도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저 진실을 말할 뿐이었다.
“굉장하군요. 그렇다면 그런 맥을 짚을 수도 있다는 뜻?”
“비서님이야 말로 그렇습니다. 한의사도 아니신데 어떻게 그런 걸 알고 계신지...”
“하핫, 내가 남쪽의 청와대에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의학의 선무당이라고.”
“선무당 수준이 아닌 거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혹시 침 가져오셨습니까?”
“그렇긴합니다만.”
“침통 좀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죠.”윤도가 가방에서 침통을 내주었다. 받아든 방수용의 시선이 또 다시 안으로 깊어졌다.
“이거 나한테 잠깐 빌려줄 수 있으시겠소?”
“그건 안 됩니다.”
윤도가 단칼에 잘랐다. 진귀한 침통이기에 내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으시죠.”
윤도가 대안을 내놓았다.
“특별히 아끼는 침통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수용이 핸드폰을 꺼내 낡은 침통을 찍었다.
“그럼 또 봅시다.”
촬영이 끝나자 그는 바로 객실을 나갔다.
‘뭐야?’
윤도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뭔가 있는 건 같은데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김광요 차장보가 다시 들어왔다.
“우리는 첫 회담이 있어 나갑니다. 채 선생 이름은 명단에 없으니 여기서 대기하셔야겠어요.”
“그러시죠.”
“이쪽에 물어보니 가까운 곳으로 나가는 산책 정도는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갑갑하면 나가서 저기 공원이나 산책하고 계세요.”
“제 걱정은 말고 다녀오십시오.”
윤도가 답했다.
창을 보니 오병길과 박상직 등이 차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호텔에는 윤도만 남았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재미가 없었다. 원래도 잘 보지 않는 방송이었다.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니 바로 여자 접객원이 달려왔다.
“필요한 거 있으십네까?”
“아, 혹시... 북한 한의학 책 같은 거 좀 볼 수 있을까요?”
“한의 서적 말씀입네까?”
“예.”
“잠깐만 기다리시라요.”
접객원은 복도 끝으로 가더니 책 몇 권을 안고 와 생긋 웃었다. 아마 미리 준비를 해둔 모양이었다.
북한 한의서.
흥미가 당겼다. 책상에 앉아 과일을 물어뜯으며 책을 넘겼다. 여기서도 윤도의 관심을 끄는 건 침술이었다. 북한에서 침술 책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차상광>
저자의 이름부터 확인했다. 침술은 생각보다 수준이 깊었다. 특이 이 침술책이 그랬다. 마지막에 언급된 ‘오장직자화침(五臟直刺火鍼)’은 윤도도 못 듣던 시침법이었다. 하지만 단어만 언급되었다. 단어만 봐서는 오장을 직접 공략하는 시침. 궁금증이 더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누굴까?
선뜻 받지 못하다가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발신자는 방수용이었다. 통화 후에 윤도는 객실을 나섰다. 여자 접객원이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러주었다. 방수용의 요청이었다. 차를 보냈다고 했다. 김광요 차장보에게 행선지를 알리려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메모를 써서 김광요 방에 붙이고 호텔을 나왔다.
“타시라요.”
남쪽에서 본 서경세였다. 방수용을 수행하던 그 사람...
운전수는 안에 따로 있었다. 무작정 차를 보낸 방수용.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윤도가 차에 올랐다.
탁!
문이 닫히고 서경세가 조수석에 올랐다. 차는 그대로 출발했다.
차는 중심가를 끼고 한참을 달렸다. 그러다 작은 강변에 도착했다. 버들가지가 수려한 곳이었다. 한갓진 도로에 접어들자 이 층 가옥이 나왔다. 주변 집들보다 좋아보였다. 그 대문 앞에 방수용이 있었다. 옆에는 여덟 살 쯤 난 소년이 서있다. 흰 상의 카라에 두른 붉은 마후라가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세요.”
윤도가 내리자 방수용이 맞았다. 소년은 방수용을 따라 인사를 해왔다.
“들어가시죠.”
방수용이 대문을 가리켰다. 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차평재>
대문의 문패가 스쳐갔다. 방수용의 집은 아닌 모양이었다. 방수용을 따라 걸었다. 소년의 걸음이 눈에 들어왔다.
절뚝!
왼쪽 다리를 절었다. 심했다.
거실에는 책이 많았다. 소박한 실내와 잘 어울렸다. 장년의 여자가 차를 내왔다. 묘향산에서 왔다는 차였다. 여자는 누구일까? 방수용이 깍듯한 걸 보니 아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도의 진짜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창가 오동나무 반상 위에 소복한 약재였다.
‘지치...’
윤도는 약재를 알았다. 지치는 뿌리를 보라색 염료로 사용한다. 하지만 염료로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약재다. 단품으로 쓰는 약재 중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약재였다. 민간에서는 지치를 고질병이나 난치병에 많이 쓴다. 뿌리의 보랏빛 덕분에 자초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