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는 약성이 차다. 열을 내리고 독을 풀며 염증을 삭힌다. 새살이 돋는 것도 돕는다. 그렇기에 암이나 간질환, 동맥경화 등의 탕제 처방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윤도의 생체분석기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원산] 북한.
[약재수령] 7년
[약성함유등급] 中上품
[중금속함유] 미량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기존 용법에 따름
[약효기대치] 中中
약성함유 中上에 약효기대치 中中, 산해경 기준이 이러니 현실기준으로 맞춰보면 굉장한 약재였다. 무려 최상급 약재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양도 꽤 많았다.
‘흠흠...’
그러고 보니 실내에 탕약냄새도 그윽했다. 그윽하다는 건 일회성 탕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치에 관심이 있습니까?”
방수용이 눈치를 차리고 물었다.
“예... 북에서 처음 본 한약재라서요.”
“온통 한의학에 대한 관심 뿐이군요. 그래서 그 나이에 명침을 놓을 수 있는 겁니까?”
“과찬이십니다. 이제 겨우 침감을 체득한 병아리일 뿐입니다.”
“채 선생이 병아리면 남한의 침술 수준이 그렇게 높다는 겁니까?”
방수용이 물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틈이 없는 질문이었다.
남한의 침술...
그 한정(限定)이 윤도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침술이라면 거의, 윤도가 최고봉이었다. 전주의 공광태, 삼척의 김남우, 칠곡의 지용균, 동래의 이창수... 거기에 더해 서울의 조수황...
전국 각지에 침술로 유명한 한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윤도의 신침을 당할리 없었다. 그렇다고 윤도 입으로 내가 최고요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국 땅이 좁은 듯 해도 넓거든요. 더구나 침술이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공부길이라 우열을 논하기 어렵습니다.”
짝짝짝!
윤도의 대답에 느닷없는 박수가 나왔다.
“역시 채 선생은 솔직담백하군요. 난 거짓말이나 나불거리는 족속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방수용의 얼굴에 깃들었던 각이 풀려나갔다.
“그래, 보기에 우리 지치는 어떻습니까? 남에도 지치가 있을 일이니...”
“약성이 굉장히 좋은 거 같군요. 제가 보기에 하늘 아래서에서 최상급일 것 같습니다. 약재로 구하신 거라면 그 안목에 놀랄 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공화국에서 최고로 좋은 등급이지요. 하지만 내가 더 놀랍군요. 채 선생은 약재 보는 눈까지도 기가 막히니...”
“고맙습니다.”
“오면서 궁금했었죠? 내가 왜 채 선생을 초청했는지?”
“조금은 그렇습니다. 보답으로 부른 거라면 저 대신 강기문 선생님이 올 자리입니다.”
“아까 제 아이 다리를 보셨는지요?”
방수용이 말문을 돌렸다.
“예...”
“교통사고 이후로 다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고스럽지만 한 번 봐주실 수 있을 지요?”
“그렇게 하죠.”
“수란아.”
윤도가 답하자 방수용이 문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구석 쪽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남쪽 선생님이 정길이 병을 봐주시겠단다. 준비를 하거라.”
“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공손히 답했다. 10분 쯤 지난 후에 그녀가 다시 문을 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여학생이 말했다.
“가서 정길이 데려오너라.”
방수용의 말에 따라 여학생이 나갔다. 그녀는 곧 아까 본 소년의 손을 잡고 들어섰다.
“그럼 부탁합니다.”
방수용이 정중히 상체를 기우렸다.
“......!”
옆 방에 들어선 윤도가 흠칫 멈췄다. 특이한 거실에 이어지는 방... 그 안에서 나는 약재 냄새 때문이었다. 안에는 약재가 많았다. 한의원의 물품도 보였다.
‘유서 깊은 한의사 집안이군.’
윤도가 장침통을 꺼냈다. 침통을 본 여학생의 눈이 출렁 흔들렸다. 그걸 알 리 없는 윤도는 방수용의 어린 아들의 진맥을 잡았다.
“어떻습니까?”
윤도가 손을 놓자 방수용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윤도가 손을 놓고 물러섰다.
“왜죠?”
방수용이 물었다. 그는 눈썹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아드님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 혈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습니다. 등 아래와 다리 쪽 혈자리입니다. 아마 사고 수술 때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씨익!윤도 말을 들은 방수용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당신은 명의일 뿐만 아니라 심의(心醫)이기도 하군요. 다른 한의사들은 그조차 모르고 어떻게 한 번 해보려다 애 눈물만 보태놓던데.”
“혈자리는 없지만 대체 혈자리를 세울 수는 있습니다.”
“대체 혈자리라고요?”
“말하자면 가짜 혈자리입니다. 진짜가 아니니 100%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나올 겁니다. 허락을 하신다면 거기까지는 가능합니다.”
윤도의 목소리는 겸허했다. 윤도가 시침하려는 혈자리가 무혈인 것은 사실이었다. 소년은 그 부위의 살이 죽었다. 물론 거짓말을 하고 진행할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어느 정도 호전 시키는 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윤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한의학에 조예가 깊은 방수용. 눈 가리고 아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왼쪽 다리와 오른팔이 좋지 않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
“내키지 않으시면...”
“허락하겠소. 기꺼이!”
방수용의 대답이 시원하게 나왔다. 윤도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사락.
윤도가 침통을 꺼냈다. 소년은 낮은 침상에 누운 채였다. 이미 한두 번 겪은 게 아닌지 특별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윤도의 첫 침은 대릉혈에 들어갔다. 치료와 상관없는 혈자리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레이더용으로 넣은 혈자리였다. 질병의 원인을 알기 힘들거나 병소를 찾기 힘들 때 쓸 수 있는 묘방이었다.
거기서 대체 혈자리의 감을 잡았다. 호침 세 개를 꺼내 주변에 찔렀다. 세 침의 침감으로 대체 혈자리를 선정했다. 거기 들어간 건 장침이었다. 소장수혈자리를 그런 식으로 대체했다.
침을 주목하는 방수용의 시선은 뜨겁다 못해 불이 날 것 같았다. 그건 단순히 보호자의 시선이 아니었다.
장침, 평양 상륙-3
장침, 평양 상륙-3
“어떠니?”
윤도가 소년에게 물었다.
“팔이 땡겨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양릉천혈자리를 잡았다. 그 또한 같은 방법이었다.
“지금은?”
“괜찮은 거 같아요.”
‘오케이.’
숨을 돌린 윤도가 다음 침을 잡았다. 다음 혈자리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단숨에 중완과 좌양지혈을 공략했다. 오그라든 다리의 근육이 펴지는 게 보였다. 여세를 몰아 풍부혈에서 마무리를 했다. 굳었던 소년의 표정은 쭉 펴진 다리 근육처럼 시원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장침의 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규칙하게 틀어졌던 혈자리 몇 군데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중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윤도는 방수용을 위해 설명을 곁들였다.
“첫 침이 들어간 게 소장수혈 자리였습니까?”
방수용이 물었다.
“예.”
“분명합니까?”
“예... 100%는 못 되지만 90%는 대체가 된 것 같습니다.”
“허어, 역시 명의시군. 많은 한의사들이 그 때문에 낭패를 보았었는데...”
방수용의 말을 들으며 발침을 했다. 소년이 일어섰다.
“걸어볼래?”
윤도가 어깨를 쳐주었다. 소년이 걸었다. 크게 절뚝이지 않았다.
“정길이가 제대로 걷습네다.”
여학생이 소리쳤다. 방수용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고맙습네다.”
소년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좋은 지 볼이 잔뜩 상기되었다.
“더 도와드릴 일이 있는지요?”
윤도가 방수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염치불문하고 우리 외당질도 부탁합니다.”
방수용이 여학생을 가리켰다. 외당질은 외사촌형의 아들 딸을 가리킨다. 그녀는 생리불순이었다. 말하자면 월경이 막혔다. 심하면 일 년에 서너 번 하는 게 고작. 지금도 세 달 째 그것이 없었다.
“이름이 수란이라고?”
“네.”
“그럼 말이지...”
윤도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학생은 얼굴을 붉히고 일어나더니 방에서 나갔다가 돌아왔다. 윤도가 장침을 뽑았다. 관원과 경골혈을 취하고 삼음교혈을 잡았다. 소년에 비하면 누워 떡먹기였다. 여기까지 진행해도 다소 기혈공세가 부족했다.
중극혈을 하나 더 보탰다. 그러자 자궁에 신호가 갔다. 여학생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윤도는 태연히 시간을 쟀다. 그녀를 위한 조치는 이미 해둔 바였다. 생리에 대비하기 위해 생리대 착용을 권했던 것이다.
“끝났습니다.”
발침을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여학생은 주춤주춤 화장실로 달려갔다. 방수용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 또한 원샷 원킬의 신기였다.
“채 선생...”
지켜본 방수용의 눈매가 파르르 떨었다. 여학생이 돌아와 인사를 할 때까지 그랬다.
“은인이시다. 절을 올리거라.”
방수용이 두 아이에게 말했다. 소년과 여학생은 그대로 따랐다.
“수란아.”
“네.”
“가서 그걸 가져오거라.”
“예.”
지시를 받은 여학생이 다시 나갔다. 그리고 뭔가를 들고 와 방수용에게 건넸다. 그 뭔가가 윤도 앞에 내밀어졌다.
‘윽!’
윤도의 시선이 시간정지 마법처럼 굳어버렸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침통을 체크했다. 침통은 손에 있었다. 하지만... 방수용의 손에도 있었다. 두 침통은 거의 똑 같았다.
“방 비서님.”
윤도의 시선이 벼락처럼 일어섰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같은 분위기가 나는 침통. 그것 또한 기도환의 침통이 분명했다.
“어떻소?”
방수용이 물었다. 윤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침통을 살피는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손으로 깎아 만든 오동나무 침통. 안의 구조와 겉모양, 바닥의 이니셜까지 같았다.
ㄱㄷㅎ...
“이게 어떻게?”
“나도 남쪽에서 채 선생처럼 놀랐습니다. 채 선생의 침갑 때문에 말이오.”
“이 침통...?”
“내 외사촌 형님의 것이오.”
“......?”
“우리 가문의 영광이자 인민의 자랑인 차평재 한의사...”
‘차평재?’
“그 분이 그 분의 아버지이자 인민의 영웅 차상광에게 물려받은...”
“......!”
윤도의 뇌리에 우르르 지진이 일었다. 차평재와 차상광. 장지커가 말한 차씨 성의 남자들이 맞았다.
“이 침갑의 주인 이름을 아시오?”
방수용이 침갑을 보며 물었다.
“기도환...”
“아시겠지만 그 분이 바로 차상광의 스승이시오. 저 먼 옛날, 동족비극의 전장 피난터인 부산에서 만났다고 하더이다.”
“......”
“차상광은 거기서 2년 남짓한 피란 생활 중에 기도환의 침술을 전수 받았소. 그리고 휴전이 되기 전에 북으로 돌아와 인민의 질병을 고치기 시작했지요.”
“......”
“전화(戰禍)로 참혹한 시대의 구국영웅이었소. 수 많은 부상자들이 그 분의 침으로 건강과 웃음을 되찾았으니까.”
“......”
“어버이 수령의 주치의로까지 활약했지만 각지의 인민들을 보살피느라 무리를 했어요. 마지막 날도 응급환자 소식을 듣고 달려가다가 빙판길에서 차가 전복되어 그만...”
‘맙소사...’
“하지만 다행히 그 아들 차평재, 즉 내 외사촌형이 침술을 물려받은 후였어요. 아버지를 따라 인민을 구하는 동안 차평재도 조국의 등불이 되어 있었지요. 우리 수령 동지 역시 대를 이어 차평재를 주치의로 정하고 모든 걸 맡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지도자 동지 역시... 그런데...”
‘그런데?’
“불행히도 아버지의 유전자까지 고스란히 전수받았는지 지나친 과로로 팔 마비가 왔어요. 서너 해 전 수해로 인한 전염병과 함께 당 지도자들의 건강이 집단으로 악화되었는데 그들의 살리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한 거지요.”
“......”
“설상가상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니 췌장암이...”
“......!”
“나 역시 형님이 그 지경이 되는 통에 부득 남쪽 신세를 지게 된 거였는데...”
“그 분...”
숨소리를 죽이던 윤도가 입을 열었다.
“아직 생존해 계십니까?”
“예.”
방수용이 한 마디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