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65)

“채 선생!”

“예...”

“기어이 죽은 사람을 살린 겁니까?”

“하늘이 도와 다행히 잘 되었습니다.”

“이야, 이거 정말...”

“저는 잠깐 또 다른 진료가 있어서...”

“그러세요. 이 소식을 오병길 대표께 전하겠습니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작은 도로로 접어든 차량이 속도를 올렸다. 방수용은 거푸 엄지를 세워보였다. 하지만 윤도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윤도 머리 안에 든 한 마디 때문이었다.

<차 선생까지 회복 시켜준다면 남에서 온 대표단도 만나줄 용의가 있소.>

북한 지도자의 약속.

차평재를 회복시켜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비기秘記, 오장직자침법

비기秘記, 오장직자침법.

“채 선생님.”

차평재의 대문 앞에 차가 멈추자 수란이 달려나왔다. 방정길도 있었다. 정길의 걸음은 거의 정상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방수용이 수란에게 물었다.

“......”

대답 없는 얼굴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대답은 그냥 두고 안으로 뛰었다.

“......!”

방문을 연 윤도,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꼬박 하룻밤을 넘어온 시간. 그럼에도 차평재는 갈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동안 엄청난 통증과 고통에 시달렸을 일. 그러나 미동도 없는 몸에서 그의 기품을 알 것 같았다.

“차 선생님.”

옆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오셨군.”

그가 고요히 대답을 했다.

“힘드셨죠?”

“아니, 견딜만했소. 이보다 더 아픈 환자들도 많이 보았거늘...”

“일이 있어 좀 늦었습니다. 다시 계속해볼까요?”

“좋지요. 나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차평재 입가에 미소가 스쳐갔다. 극악의 병마와 싸우면서도 해탈할 수 있는 사람. 과연 한 분야의 대가다운 거두의 모습이었다.

윤도는 혈문부터 확인했다. 닫아둔 문들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 다음에 약침을 갈았다. 췌장과 간장, 폐장... 그리고 견갑골과 이마의 암세로 덩어리들...

새로운 약침이 들어가자 차평재의 몸이 움찔 뒤틀렸다.

‘참으세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서 하니 윤도가 더하지 않아도 되었다.

암세포들의 발악이 느껴졌다. 무너지고 녹아나는 와중에 몇 무리가 혈류를 타고 부유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혈자리를 막은 까닭에 혈류는 멀리 나가지 못했다.

운명...

그걸 생각했다.

기도환이라는 이름에 엮여 만나게 된 차평재.

침이 그를 살리는 게 아니라 운명이 그를 살리는 것이다.

윤도는 차라리 겸허했다. 장침에 욕심을 더하지 않았다. 의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 그 겸허함을 마지막 시침으로 삼아 치료를 끝냈다.

“아버지...”

문 밖의 여학생 수란이 거친 숨으로 조바심을 드러냈다. 윤도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둘은 한 몸이 되어 늘어졌다. 윤도는 췌장의 암부위에 직접 자침한 침을 잡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진기까지 모두 손가락에 실어버린 것이다. 차평재도 잠이 들었다. 그 역시 버틸만큼 버텼다. 비고 또 빈 탈진이었다.

“채 의원.”

누군가 윤도를 불렀다. 윤도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오동나무 잎들이 한 보따리 쏟아졌다. 그걸 치우려고 집어들자 잎이 그대로 침통이 되었다. 침통에서 사람 하나가 걸어나왔다. 장지커가 보여준 사진 속의 기도환이었다.

“채 의원.”

그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밀려나왔다. 피에 녹아드는 목소리였다.

“예...”

“오장직자침...”

“예?”

“배운 적 없건만 스스로 체득한 그 침법... 내가 간 길과 닮았노라.”

“......?”

“내 그 탐구가 가상해 나의 비법을 전해주마.”

‘비법?’

“가지려말고 비우거라. 침은 힘이 아니라 마음으로 놓는 것이니.”

“......”

“거친 병소일수록 부드럽게... 침끝이 아니라 마음 끝을 넣어라. 그래야 병소가 침을 받아들이는 법.”

“......”

“다시 해보거라. 이제는 아주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 의원님.”

“마무리를 해야지. 마지막 불씨를 꺼야지.”

마무리를...

마지막 불씨를...

그 말과 함께 윤도가 잠에서 깨었다.

윤도 손에는 장침이 하나 들려있었다. 마무리... 뭘 말하는 걸까? 기이한 인연에 홀리다보니 개꿈이라도 꾼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꿈이 너무 생생했다. 침을 내려놓고 진맥을 했다.

“......!”

거기서 윤도의 잠이 활짝 달아났다. 잔재였다. 약침이 꽂힌 그 아래. 감춰진 싹이 느껴졌다. 다시 장침으로 시선이 갔다.

기도환.

오장직자침. 장부의 환부를 직접 찔러 치료하는 절정의 침법. 꿈의 계시를 생각하며 침을 넣었다. 침감이 새로운 암 덩어리에 닿았다.

매끈.

암 덩어리가 침 끝을 피했다. 이번에는 힘을 주지 않았다. 바람결로 침을 놓는 듯 한 가볍게. 침은 새털처럼 암 덩어리 안으로 들어갔다.

“아!”

윤도 머리에 빛이 들어왔다. 자침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처음으로 단 한 방에 암세포 덩어리를 꿰뚫는 윤도였다. 침을 잡은 채 시선을 돌렸다. 기도환의 침갑을 보았다. 착각이라도 좋았다. 암시라도 좋았다. 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은 건 분명했다.

침 하나를 더 꺼내들고 약침을 묻혔다. 한 번 더 시도였다. 이번에도 원샷이었다. 작디 작은 하나의 암세포에 두 개의 장침을 꽂은 것이다.

‘마무리를 했습니다.’

윤도가 침통을 향해 말했다. 기도환에 대한 보고였다. 어쩐지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발침을 했다. 침을 뽑는데만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차평재는 잠이 들었다. 어쩌면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숨소리는 분명 있었다.

“기가 바닥이 났습니다. 장침으로 대략 기의 문을 열어두었으니 푹 쉬시게 그대로 두시는 게...”

방을 나온 윤도가 방수용에게 말했다. 방수용은 수란을 그 방에 앉혀두었다. 식사가 나왔다. 칼칼한 장국이었다.

“고맙습니다.”

식탁을 세팅한 차평재의 아내가 인사를 전해왔다. 방수용과 더불어 식사를 했다. 다른 가족들은 이미 식사를 끝낸 눈치였다.

“죄송하지만 방 비서님.”

식사를 마친 윤도가 말문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우리 대표단에 전화를 할 수 있을까요? 너무 오래 혼자 떨어져 있게 되어서...”

“그러시죠. 그렇잖아도 방금 전에 남한 특사단이 2차 회담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갔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방수용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전화 너머에서 김광요가 나왔다.

“괜찮습니까?”

그는 윤도의 안부부터 물었다.

“예, 차장님은요?”

“채 선생 덕분에 유의미하게 회담이 끝났습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조금 더 걸릴 듯 합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광요의 전화가 끝났다.

“남측 대표단의 공식 일정은 끝났습니다. 채 선생님이 호텔로 돌아가면 남한으로 가게 될 겁니다.”

“네...”

“아쉽군요. 생각 같아서는 여기 계속 머물게 하고 싶은데...”

“또 기회가 오겠지요.”

윤도가 웃을 때 수란이 문을 열고 나왔다.

“선생님, 아버지께서 깨어나셨어요.”

그 소리를 따라 윤도가 일어섰다.

“채 선생...”

차평재의 눈은 한층 맑아져 있었다. 눈가에 가득하던 통증도 가셨다. 암세포를 녹여버림에 따라 기가 바닥났지만 사기가 가득하던 때보다는 생기가 더 하고 있었다.

“기분 어떠세요?”

“오장에 봄 햇살이 들어온 기분이오. 아주 싱그럽소.”

“암세포는 모두 녹아버린 듯 합니다. 이제 서서히 기력만 찾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맙소. 내 평생 다른 사람에게 침을 놓기만 했지 내가 이런 명침을 맞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잘 참아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말씀하시죠.”

“궁금한 게 하나 생겼소. 자침을 보다보니 망침이 분명 내 장기를 관통하고 나갔소이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약침은 혈자리가 아니라 환부에 직접 찔렀소.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채 선생께서 오장직자침을 익힌 겁니까? 병소직화침이라고도 불리는 그 신법을?”

“차 선생님께서는 그걸 아시는군요?”

“모른다는 겁니까?”

“호텔에 비치된 한의학 책자에서 단어를 보았습니다. 지은이가 차상광이더군요.”

“그 분이 바로 기도환의 유일한 제자라오. 동시에 내 아버지이기도 하고...”

“이제야 말씀인데 기도환의 유일한 제자는 아닙니다. 제가 일전에 한국의 침술 워크샵에서 중국 명의 장지커를 만났는데 그 분 역시 중국 항주에서 기도환의 침술을 전수 받았다고 했습니다.”

“중국?”

“예...”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 선친께서도 겨우 제자가 되었을만큼 제자 들이기를 꺼려하는 분이신데...”

“그 분도 이 침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윤도가 침통을 들어보였다.

“맙소사. 그럼 채 선생은 기도환의 흔적을 모두 만난 셈이군요. 두 제자와 기도환 그 자신이 쓰던 침통에 그 분이 침술을 펼치던 한의원...”

“그렇게 되는군요.”

“그래서 그럴까요? 채 선생이 아까 내게 펼친 신묘한 침술. 인간의 몸으로 침이 들어가 병소를 직접 치료하는 오장직자침은 바로 기도환 선생께서 우리 아버지께 보여주신 신법이라오.”

“......!”

차평재의 말에 윤도가 출렁 흔들렸다.

“그게 실제가 있는 침법이란 말씀입니까?”

“그럼요. 나는 몇 번이고 들은 걸요. 기도환은 그 비법을 우리 아버지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칫 시도하다가는 사람 목숨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연히 보게 된 내 선친도 그 기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통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채 선생이...”

“......”

“선친이 스승의 뜬 구름 같은 신침법을 친필로 적어 내게 보여주기도 했지만 나 역시 역부족이었지요. 지금은 그 메모마저 선친의 한의원에 들락거리던 후학이 훔쳐가는 바람에 망실된 마당이고...”

“후학이 훔쳐갔다고요?”

“그래요. 그래서 선친이 지은 책자에도 이름만 실리고 있습니다. 훼손되지 않았다고 해도 득침하기 힘든 내용이지만요.”

“......!”

“왜 그렇게 놀라시죠?”

“그 내용이 혹시.. 오장육부와 새털 그림 아닙니까?”

“채 선생이 그걸 어떻게?”

차평재의 동공이 풍선처럼 커졌다.

“혹시 그 후학... 차 선생님도 아십니까?”

“그럼요.”

“여기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친구는... 십여 년 전에 탈북을...”

‘탈북?’

“채 선생...”

“제가 그 사람을 서울에서 만난 거 같습니다. 나이는 50대였고 체구가 광대뼈가 많이 나오는...”

“맞아요. 이름은 노윤병입니다. 평양에서 한의학을 전공하다 중퇴를 했는데 선친이 그 재주를 아껴 침방에 데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품성이 좋지 않고 남한을 동경하는 바람에 아버지께서 내치고 말았습니다.”

콰앙!

윤도 뇌리에 벼락이 스쳐갔다. 노숙자... 그러니까 그가 소지하고 있던 침법이 바로 기도환의 침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 그 실오라기 같은 침 대에 묻어있던 혈흔... “허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채 선생의 나이로 보아 만날 수 없는 기도환... 그런데 그의 신법이 채 선생 손에 있다니...”

“실은 저도 알고 한 일은 아닙니다. 상황이 어려워 심혈을 기우린 일인데... 탈진해 잠든 후에 선생님의 선친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분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흉내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감을 잡고 있습니다.”

“득도로다!”

차평재가 무릎을 쳤다.

“득도야. 채 선생이야 말로 하늘이 내린 한의요. 내 아버지와 내가 그토록 애를 써도 깨우치지 못한 비법을 저절로 배우다니...”

“맞습니다. 형님을 시침하기 전, 채 선생은 리수창 비서동지의 죽은 아들까지 소생 시키고 온 참이었습니다.”

거기서 방수용이 끼어들었다.

“리수창 비서의 아들을?”

“평양병원에서 사망선고를 내린 지 2시간이 넘은 무렵이었죠. 지도자 동지께서도 친히 병원에 와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저런, 내 앞의 의원이 저승사자인 줄 알았더니 영락없는 편작이셨구만.”

차평재의 눈 안에는 감탄과 경악이 쉴 새 없이 교차했다. 대물은 대물을 알아보는 법. 북한 한의학의 거두인 그였으니 윤도의 출중한 침술에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졌다.

“이럴 게 아니라 지도자 동지께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제가 걸어볼 테니 동지께서 받으시면 형님이 통화를 하십시오. 형님이 쾌차한 줄 알면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들뜬 방수용이 전화를 걸었다. 그 태도는 방금 전과 달리 반듯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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