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지도자 동지, 저 방수용입니다.”
전화가 차평재에게 넘어왔다.
“이어, 인민의 영우 차평재 동무!”
수화기를 넘어오는 지도자의 목소리가 화통 같았다. 윤도는 가만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채 선생!”
잠시 후에 방수용이 뛰어나왔다.
“예.”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우리 지도자 동지께서 채 선생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대표단과 함께 주석궁으로 들어오라는 데요?”
“......!”
의자에 앉아있던 윤도가 벌떡 일어섰다.
약속...
그 약속이 스쳐갔다.
<차 선생까지 회복 시켜준다면 남에서 온 대표단을 만나줄 용의가 있소.>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한 약속. 그게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남한 대표단에는 채 선생이 직접 전하시오. 그들도 내심 지도자 동지를 만나고 싶어 했으니 희소식 중의 희소식이 될 겁니다.”
방수용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전화를 받아든 윤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느닷없는 돌발사고로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할 것 같던 살벌한 분위기. 그 분위기를 깨고 주석궁의 초대를 받았다.
김광요에게 전달한 윤도가 전화를 끊었다. 귓가에는 흥분한 김광요의 목소리가 오래 남았다.
“으아악, 이런 기적이... 채선생, 정말 수고했어요. 정말!”
그가 잡으면 젓가락도 명침이 된다.
그가 잡으면 젓가락도 명침이 된다.
“채 선생.”
호텔 방에서 오병길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예.”
“대단합니다. 덕분에 우리가 굉장한 성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별 말씀을...”
“방수용 비서의 외사촌형을 치료했다고요?”
“그 분이 북한에서 유명한 한의사시더군요. 아마 제 침술법이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그래, 무슨 병이었소?”
“암이었습니다.”
“암?”
오병길과 박상직이 소스라쳤다.
“암도 침으로 고친단 말이오?”
오병길이 물었다.
“고칠 수도 못 고칠 수도 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무슨 암이었길래요?”
박상직의 질문이 이어졌다.
“췌장암이 간장과 폐장, 어깨와 이마 부위로 전이된 케이스였습니다. 그저 죽을 날을 받아두신...”
“......!”
윤도의 설명에 두 사람은 입을 쩌억 벌렸다. 그냥 췌장암을 고쳤다고 해도 믿기지 않을 판에 여러 장기에 전이된 케이스라니...
“허어!”
둘은 한숨만 쉬었다. 판세가 돌아가는 걸 보니 농담은 아닐 일이었다. 자그마치 죽은 사람조차 살린 윤도가 아닌가?“이거 사과부터 해야겠소. 이제 보니 명의가 아니고 신의가 아니오?”“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된 일이지요.”
“......?”
“채 선생,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이건 우리 국익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말씀하시죠.”
“이제 주석궁으로 가서 북쪽 지도자를 만나게 되면 선생의 의술을 최대한 발휘해 주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 지도자의 건강 말입니다. 가능하면 질병이 있는지 없는지의 유무를 함께 알아달란 말입니다.”
“......”
“주석궁 연회초대 말입니다. 이쪽 친구들에게서 의례적인 인사와 정찬 얘기 외의 정치적인 발언은 금한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특사로 왔으니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돌아가야만 합니다. 지도자의 건강에 대한 정보도 중요한 정보지요.”
“가능한 한 노력해 보죠.”
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경색 국면 끝에 이루어진 남북 밀담. 서로 입장차이를 확인하는 것 외에 특별한 합의가 나오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윤도는 오병길의 말을 이해했다.
주석궁으로 출발하기 전, 윤도와 오병길 등은 북한 정보 당국자들에게 한 번 더 주의사항을 들었다.
<정치적 발언 금지>
그들의 주문이었다.
“채 동무!”
48세의 북한 지도자 탁일범.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의 액션은 지난번보다도 크고 굵었다. 목소리도 카랑카랑 주석궁을 울렸다. 검은 인민복 차림의 그는 성큼 다가와 윤도의 손부터 잡았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보니 훌쩍 큰 키에 두툼하게 튀어나온 뱃살이 푸짐해 보였다.
“고맙소. 우리 공화국 영웅 둘을 구해주다니...”
“과찬입니다.”
윤도는 평상적인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자, 다들 앉읍시다. 오늘 준비되고 있는 요리 재료가 아주 좋아요.”
지도자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북한 측에서 세 명, 한국에서 세 명이었다. 북한은 지도자와 한길상, 방수용이 나왔고 한국은 윤도와 오병길, 그리고 박상직이었다. 김광요는 초청에서 빠졌다. 국정원 간부이기에 꺼린 조치로 보였다.
“그래, 채 동무의 침이 가히 신의급이라고?”
정찬 좌석에서 지도자가 물었다.
“침술 하나는 차평재 선생에 버금가는 모양입네다.”
한길상이 대답했다.
“그럼 차상광 동무와는 어떻소?”
“아무래도 차상광 동무에게는...”
한길상이 말을 아꼈다. 그들에게는 편작이나 화타에 다를 바 없는 차상광. 그렇기에 그 반열에 윤도를 올려주지 않았다.
“하긴 아버님 말하시길 차상광 동무는 척 보기만 해도 아픈 곳을 알아낸다고 했지.”
“우리의 민족적 영웅이 아닙네까?”
“어떻소? 채 동무... 동무도 척 보면 아픈 데를 알 수 있는 건가?”
지도자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순간 오병길의 미간이 꿈틀 흔들렸다. 그가 기대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런 일은 제나라의 태창공 쯤 되어야 가능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윤도가 겸허히 답했다.
“하지만 죽은 장교를 살리고 가망이 없다던 차평재 동무를 살리지 않았나? 그 정도라면 될 것도 같은데?”
“그렇게 되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럼 내 이 뱃살은... 침으로 뱃살도 뺄 수가 있나?”
지도자의 말과 함께 오병길이 젓가락질을 멈췄다. 이제는 더 긴장하는 그였다.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그럼 나도 침 좀 부탁해볼까?”
지도자가 방수용을 바라보았다.
“지금 말씀입니까?”
“왜? 오래 걸리나?”
방수용의 반응을 본 지도자가 윤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부탁합시다. 기왕이면 빼고 먹으면 더 좋지. 요즘 배가 자꾸 더 나오는 거 같아서 말이야.”
지도자가 웃었다. 졸지에 즉석에서 침을 놓게 되었다. 하지만 윤도 앞에 놓여진 건 북한산 호침이었다. 주석궁에 들어서면서 소지품을 모두 맡기고 들어온 윤도. 북한 측은 지도자의 안전을 우려해 안전한 호침을 내 준 것이다.
가늘고 여린 호침!
지도자의 배와 규격(?)이 맞지 않았다.
“침 대신 이걸 써도 될까요?”
윤도가 기다란 젓가락을 들어보였다. 끝이 뭉툭했으니 안전상의 문제도 없을 젓가락이었다.
“젓가락으로 침을 놓는다고?”
지도자가 물었다.
“본래 침의 유래가 폄침(砭鍼), 즉 돌침입니다. 이만하면 돌침 역할은 할만합니다.”
“하핫, 그거 재미있군.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지도자가 흔쾌히 수락했다.
꿀꺽!
지켜보는 오병길과 박상직의 목으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젓가락으로 침이라니? 마법이 아닌 다음에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먼저 맥을 좀 짚겠습니다.”
윤도가 말하자 지도자가 손목을 내주었다. 그 맥을 잡았다. 윤도도 살짝 긴장이 되었다. 북의 지도자라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탄탄한 뱃살을 가진 사람. 동시에 미식가 유전자로 불리는 사람의 건강은 어떨까? 이렇게 푸짐하면서도 건강할 수 있을까? 한국의 중장년들처럼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을까? 한의사로서 호기심이 땡긴 것이다.
고도비만은 많은 질병을 부를 수 있다. 암도 그렇다. 대장암, 간암, 신장암이 특히 그랬다.
“......!”
맥을 잡던 윤도의 눈가에 파르르 전율이 일었다. 복부의 끝... 나란히 펼쳐진 족양명위경의 혈자리가 복부에서 끝나는 곳. 아련한 사기(邪氣)가 느껴졌다. 한 번 더 체크하려는 찰라, 지도자가 몸을 움직였다.
“어디 이상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윤도가 손을 놓았다. 아쉽지만 종합진찰을 의뢰받은 일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지도자의 두툼한 뱃살을 문질러 주었다. 혈자리 주변이 풀리자 젓가락을 뒤집어 잡았다. 더욱 뭉툭한 쪽이었으니 한길상의 경계심은 조금 더 풀렸다.
“혹시 저울이 있으면 체중을 재보시죠.”
“체중?”
“이걸로 얼마나 빠지겠습니까만 그래도 눈으로 확인하면 재미가 붙을 겁니다.”
“그거 좋지. 제대로 되면 내가 좋은 선물을 주겠네.”
지도자는 수행원이 가져온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그 몸무게 또한 비밀이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젓가락 장침.
그게 뱃살을 누르고 들어갔다. 옷을 입은 그대로였다. 배꼽 좌우의 천추혈과 배꼽 아래의 중극혈이었다. 옷 때문에 혈자리 각을 확보하기 힘들었지만 윤도의 손가락은 달랐다. 옷 너머에서 전해오는 혈자리의 감각을 기어이 잡아낸 것이다. 한 혈을 1분 정도 누르고 떼었다. 그렇게 하기를 서너 번 반복했다.
“이제 저울에 올라가 보시죠.”
윤도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지도자는 성큼 걸어가 체중계에 올랐다. 그리고는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이야, 이거, 이거...”
“빠졌습네까?”
한길상이 거리를 둔 채 물었다.
“빠졌소. 무려 2.5kg이나...”
지도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짝짝짝!
북한 측 인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한국 특사단도 예의를 갖춰주었다.
“체중관리가 필요하면 오미자를 즐겨 드시기 바랍니다. 그걸 먹으면 과식을 막을 수 있습니다.”
윤도는 오미자 추천으로 젓가락침을 마무리를 했다.
덕분에 정찬 자리 내내 한의학 얘기가 오갔다. 차평재가 건강을 되찾으면 남북 한의학 교류 한 번 해보자는 말도 나왔다.
윤도에게 안겨진 선물도 엄청났다. 무려 대물 차가버섯과 산삼을 안겨준 것이다.
‘분석...’
직업은 못 속인다. 북한산 약재가 궁금한 윤도는 생체분석기부터 작동 시켰다.
[원산] 북한
[약재수령] 66년
[약성함유등급] 中下품
[중금속함유] 미량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기존 용법에 준함.
[약효기대치] 中中
산해경 기준 中下품이니 현실에서 적어도 上급에 속하는 차가버섯. 산삼 역시 80여 년을 묵은 대물. 혹시나 핵 미사일 방사능 찌꺼기가 있을까 하던 걱정은 깨끗이 사라졌다. 윤도는 환대를 받으며 주석궁을 나섰다. 북한 방문의 마지막 밤이었다.
“잊지 못할 거외다. 채윤도 선생.”
다음 날, 공항으로 향하기 전에 차평재가 찾아왔다. 휠체어에 앉은 그는 눈빛이 더욱 성성했다. 단 하루 사이지만 놀라운 회복에 들어섰다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해도 거동은 무리였지만 그가 고집한 모양이었다.
[인민의 영웅.]
[북한 한의의 대표자.]
그런 호칭이 아니더라도 방수용을 당 서열 10위권까지 올려주고 북한 지도자들에게 대를 이어 신뢰를 받게 한 원동력 차평재. 방수용은 차평재의 고집을 막을 수 없었다.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윤도가 웃었다. 북한에서 처음 만났지만 오래 지인 같은 느낌이 왔다. 인연이란 묘했다. 기도환에게서 비롯된 가지로 연결되다보니 각별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안녕히 가시라요.”
나중에 보니 수란과 정길도 있었다. 둘도 단정하게 인사를 해왔다.
“채 선생님.”
차가 출발하기 직전 접객부로 있던 아가씨가 음료수를 건넸다. 그녀 역시 윤도에게 도움을 받았다. 화농의 피부염이 있길래 곡지혈을 잡아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 잘 모셔라.”
방수용은 수란에게 당부를 남기고 윤도가 탄 차에 올랐다.
부릉!
“안녕히 가시라요.”
“또 오시라요.”
수란과 정길의 풋풋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차가 출발했다.
“채 선생...”
옆 좌석의 방수용이 입을 열었다. 조수석에는 이제 그의 심복 서경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
“길고 긴 사흘이었습니다. 안 그래요?”
“그렇군요.”
“형님 일은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이 침통...”
윤도가 기도환의 침통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