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265)

“곧 간다고 해.”

손석구가 젓가락을 놓았다.

“미안하지만 제게 시간을 좀 주셔야합니다.”

윤도가 제동을 걸었다.

“지금요?”

“아니면 언제일까요? 저는 곧 제 한의원으로 가야하고 선생님은 늘 바쁩니다. 그러니 응급조치에 이은 나머지 침술을 받아야합니다. 아니면...”

뒷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지금까지의 침술이 응급조치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윤도. 의사인 손석구가 그 말뜻을 모를 리 없었다.

딸깍!

다시 두 눈의 스위치가 꺼지는 것이다.

“별 수 없군요. 그나마 멀티플 립프랙처라면 우리 스태프들만으로도 감당할만 하니...”

“그럼 가시죠.”

“장 선생, 미안하지만 좀 부탁해. 급하면 호출하고.”

손석구가 의사들을 향해 말했다.

“걱정마시고 완쾌해서 오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게 더 중요합니다.”

스태프들은 흔쾌히 책임분담을 수용했다.

병원의 빈 특실 한 자리를 빌려 시침에 들어갔다.

“누우시죠.”

“어이쿠, 덕분에 또 편안하게 쉬게 되는군요.”

손석구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도무지 미운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근본시침이었다. 손석구의 기혈은 신장부터 바닥이었다. 그 다음은 비장, 간, 심장 순으로 기를 채워야할 판. 수(水)→토(土)→목(木)→화(火)로 가는 수순이었다. 여기에 응급조치에서 생략한 담경을 더 하면 당분간은 버틸 것으로 보였다. 그런 다음에 탕제를 상당 기간 복용하면 안정화될 시력이었다. 윤도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그 이후로 또 다시 무리를 계속한다면 눈은 또 위험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건 윤도의 영역이 아니었다.

하나...

둘...

장침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움을 위해 배석한 여자 인턴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때로는 다향투자침이 되고 또 때로는 일침다혈이 되었다. 마지막 장침이 들어갔을 때 윤도의 몸은 샤워장에서 갓 나온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민 선생!”

보다 못한 손석구가 인턴을 불렀다.

“네.”

“우리 채 선생 수건 좀 챙겨드려.”

“네.”

인턴이 수건을 가져왔다. 한 장으로 모자라 두 장을 써야했다.

보였다.

손석구의 몸에 휘도는 기혈의 조화. 물은 힘찬 계곡수처럼 흙을 향해 스며들었고 나무는 그 뿌리로 목을 축였다. 나무가 성성해지자 불씨가 되었다. 심장은 그 불 기운을 받아 힘차게 돌아갔다.

쿵쾅쿵쾅!

안정된 심박소리라 듣기가 좋았다.

“눈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은데요?”

손석구가 말했다.

“기의 배터리가 차오르는 모양입니다.”

윤도가 웃었다.

“참 신기하지 말입니다.”

“뭐가요?”

“세상과 의학 말입니다. 다 아는 것 같으면 또 모르는 것 투성이고, 그걸 배우고 나면 또 다른 게 터지고... 솔직히 침 하나에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 병원... 그리고 SS병원의 최고 전문의들도 손을 든 눈인데...”

“그 눈의 임자는 하늘입니다.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공감 가는 말이군요. 어쩌면 죽을 것 같은 환자 같은 데도 버티고 회복되는 사람이 있거든요.”“그런 사람들 많이 살려주세요.”

“아, 침 다 맞으면 탕제를 먹여야한다고요?”

“그래야합니다.”

“그럼 치료비와 탕약값은?”

“서울 가면 제가 직원들 시켜서 약 보내는 편에 청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보내주세요. 억만금이라도 치루겠습니다.”

“예.”

“채 선생님...”

“예?”

“죄송한 말씀이지만 의사의 호기심인데... 선생님의 장침은 대체 어디까지 가능한 겁니까? 침이 제 안구에도 들어오는 것 같던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눈처럼 정밀하고 미세한 조직을 드나든다면 기타 장기도?”

“믿어만 주신다면 인체 어디든 가능합니다.”

“진단과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까?”

“현대의학과 달리 한의학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 진료가 많습니다.”

“가능하다는 말씀이군요?”

“......”

“나이도 가리지 않습니까? 소아든 노인이든?”

“침이 나이를 가릴 리 없지요.”

“이야, 굉장하군요.”

손석구의 눈에 호기심과 경탄이 번져갔다. 비웃음 같은 건 없었다. 과연 명의는 명의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제 눈을 뜨게 해주셔서...”

“별 말씀을... 의술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일 뿐이었습니다.”

“비단 제 생체학적 눈 뿐만이 아니라 의술의 눈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채 선생님이야 말로 제게 의술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양방이라는 눈에 가린 한방의 진가를...”

“누구든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지요.”

“게다가 저 때문에 중국에서 날아오셨다고...”

“좀 큰 구급차 부른 거죠. 대한민국 넘버 원 응급환자였지 않습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하군요. 저도 채 선생님 나이 때는 그렇지 못했는데...”

“정말요? 저는 선생님이 인턴 때부터 열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만에요. 그때는 제 몸 편한 거 찾기 바빴습니다. 박애고 히포크라테스 선서고 다 귀찮았거든요. 내가 왜 의사가 되었나 하는 자괴감 뿐이었죠.”

“괜히 하시는 말이죠?”

“아닙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제대로 각성을 했지요. 레지던트 1년 차 때였는데 과장님은 마침 유럽에 연수를 가시고 머리 깨진 환자가 왔는데 내 사수께서 당시에 임신 중이라 대처가 안 되는 거예요. 진짜 넋 놓고 매달려서 환자를 살렸죠. 다들 포기한 환자였는데 매달리니까 그게 되더라고요? 그 날 생각했죠. 이제부터라도 나이롱 뽕 말고 진짜 의사가 되자...”

“감동적인데요?”

“하핫, 솔직히 말하면 첫 고백입니다.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마세요.”

“뭐 실은 저도 그런 쪽이거든요. 비밀은 절대 엄수해드리죠.”

“하핫, 그래요? 우리, 나이를 떠나 통하는 데가 있군요. 앞으로 잘 해봅시다.”

“일단 침부터 뽑겠습니다.”

윤도가 발침에 나섰다. 마지막 침 하나까지 보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히야, 이거 거짓말 좀 보태서 시력 재면 2.0은 문제 없을 거 같은 데요?”

손석구의 눈망울이 초롱거렸다. 딱히 과장만은 아니었다. 보조적으로 충혈 혈자리까지 잡아 시야를 터준 까닭이었다. 20여 시간을 직진으로 달려온 수술이 아니었던가?

“언제 한 번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그게 언제일지는 잘 모르지만...”

손석구가 고개를 조아렸다. 윤도도 함께 조아렸다. 두 영웅은 숙이는 각도까지 닮아보였다. 두 명의는 그렇게 마음으로 통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길. 로비로 나오며 생각하니 서울 갈 일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길이 있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김광요가 나타난 것이다.

“채 선생님!”

김광요는 박 과장과 함께였다.

“언제 입국하셨습니까?”

“채 선생 가시고 몇 시간 있다가 들어와서 바로 내려왔습니다. 결국 북한병사 한 명을 살렸군요.”

“차장보님의 결단 덕분이었지요.”

“대통령께서도 굉장히 고무되어 계십니다. 북한에서의 일, 북한병사의 일까지 다 보고가 되었거든요.”

“예...”

“서울 가셔야죠?”

“예...”

“일정이 어제까지였으니 급하시죠?”

“그게...”

“따라오세요. 일침 한의원에 전화해 봤더니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쩌다 보니 예정보다 시간이 지체되어서...”

“그래서 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헬기라고요?”

“당연히 모셔야죠. 헬기가 아니라 전투기라도 띄울 수 있습니다.”김광요가 헬기장을 가리켰다. 거기 정말 헬기가 이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투투투투!

헬기는 바로 이륙을 했다. 윤도의 형편을 아는 까닭이었다.

“채 선생님!”

옆 자리에 앉은 김광요가 하늘에서 말문을 열었다.

“예.”

“주석궁 얘기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탁일범 진맥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혹시 뭐 좀 알아낸 게 있습니까?”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세부질병 진단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저런, 아쉽군요.”

“살을 좀 빼준 일화는 들으셨죠?”

“예, 그건 오병길 의원을 통해서...”

“이제야 인사를 드리지만 덕분에 북한에서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이번 방북의 결실은 모두 채 선생 덕분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보상이 있을 겁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아무 소리 말고 계십시오. 채 선생이 한 역할과 공이 엄청납니다. 그런 차에 공로까지 챙겨주지 못한다면 저도 이 자리 지킬 명분이 없지요.”

“......”

“조만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김광요가 마무리에 들어갔다. 서울상공이었다. 헬기는 한의원이 가까운 곳에 내렸다. 거기 국정원의 차량이 나와 있었다. 윤도는 착륙 5분 만에 한의원 앞에 도착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최종 수행을 책임진 박 과장의 인사를 들으며 한의원으로 뛰었다.

**

“원장님!”

윤도가 들어서자 정나현과 승주가 토끼눈이 되었다.

“예약환자들은요?”

“진료 가능하세요?”

“차례로 들여보내세요.”

윤도는 약제실로 직행했다. 지도자에게서 얻어온 약재 때문이었다.

“원장님!”

반색하기는 진경태와 종일도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진경태가 물었다.

“그보다 이것부터 부탁해요.”

윤도가 약재꾸러미를 건네주었다. 국정원 직원들 덕분에 중국 공항에서도 문제가 없이 통관된 물건이었다.

“우와!”

약재 상자를 연 진경태가 자지러졌다. 그 품질은 윤도가 이미 체크한 상황. 진경태 역시 육안으로 알아볼 만큼 놀라운 것들이었다.

원장실로 들어선 윤도는 노숙자의 침통부터 꺼내보았다. 사연을 알고 보니 제대로 보였다.

<五臟直刺鍼法>

그 단어에 눈이 멈췄다. 한지에 그려진 그림... 오장육부와 장침, 그리고 새털... 그때는 난해한 낙서 같던 그림, 그러나 알고 보면 비기를 담은 그림...

역시 세상은 아는 만큼 보였다.

딸깍!

첫 환자가 들어섰다.

“원장님, 환자분 모셨습니다.”

함께 들어선 승주가 말했다.

“아, 김 샘, 혹시 저번에 소란을 피운 노숙자가 다시 오지 않았어?”

“안 왔는데요?”

“혹시 오면 내 방으로 좀 데려와.”

“알았습니다.”

대답을 듣고 진료에 착수했다.

돌아버릴 것 같은 불면.

돌아버릴 것 같은 불면.

첫 환자는 낙상으로 허리를 다친 중년 여자였다. 두 번 째는 류머티스가 심했다. 소장수혈에 장침을 넣어 원샷으로 끝냈다. 다음으로 들어온 환자는 치질이었다. 병원에 갔다가 수술을 하자는 권유에 놀라 윤도를 찾아왔다고 했다. 혈자리의 포인트는 공최혈 부근이었다. 더러는 이렇게 진짜 혈자리보다 그 인근에 포인트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었다. 장침을 넣으니 공최혈이 반응을 했다. 경혈은 여전히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진도가 제법 나갔다. 늦은 건 윤도였으니 쉬지 않고 시침을 한 까닭이었다. 거기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새 환자를 맞았다. 불면증 환자였다. 긴 밤을 꼴딱 새운 윤도처럼 잠들지 못하는 남자... 62세의 남자는 5대 대기업 이사로 퇴직한 사람이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요?”

문진으로 진료가 시작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몇 년 되었죠.”

남자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쓸쓸했다.

“계기가 있었나요?”

“아내가 죽었어요.”

“......?”

“흔한 갑상선암이었어요. 크게 심하지 않다기에 치료를 받았죠. 병원에서 아무 이상 없다길래 집에서 요양하며 살았어요. 그러다 1년 쯤 후에 몸이 안 좋아서 다시 병원에 갔더니 유방암 판정이 나오더라고요. 내 생각에는 전이 같은데 병원에서 아니라고 하니 도리는 없고... 수술을 했는데 다른 곳으로 전이되는 바람에 항암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고 말았어요.”

“저런...”

“남자가 직장 떨어지고 아내 죽으니까 이건 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더라고요. 옛날에 충성 맹세하던 부하직원들도 술 한 잔 하는 것조차 꺼리고 친척들도 내가 방문하면 빨리 갔으면 하는 눈치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줄면서 불면증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그러다 말려니 하고 동네 병원에서 수면제 몇 알 받아먹는 걸로 때웠는데 이제는 수면제를 10여 알씩 먹어도 잠이 잘 오지 않아 하얗게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졌어요. 그런 날이면 한 마디로 미치죠. 머리가 팽팽 돌고 구토까지 올라온다니까요.”

극악의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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