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265)

“지검장님은 제게 하늘 같은 분이지만 여기 채윤도 선생도 그 못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검장님 운이 좋은 거지요.”

“용 부장...”

“저 믿고 한 번 맡겨 보십시오. 제가 헛발이면 다시 저 지방으로 좌천 시켜도 군말 않겠습니다.”

“거긴 지긋지긋했다면서?”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자신이라?”

김정엽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없지만 안으로 내공이 깊은 눈. 허투르게 정치검사 짓이나 해서 이룬 자리가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우리 아이...”

김정엽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S병원과 SS병원, AS병원 전문가들도 포기한 초중증도 우울증이오.”

당신이 감당할 수 있어?

김정엽의 눈빛에 담긴 말이었다.

“SS병원에서 손 못 대는 환자도 몇 살린 적이 있습니다.”

윤도는 지검장의 질문 수위에 맞춰주었다.

“못난 놈이라 자살을 두 번이나 시도했소. 아니, 그건 공식적이고 내가 아는 것까지 합치면 네 번이오.”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심해.

지검장이 조금 더 질러갔다.

“그렇다면 장침 두 개 쓸 거 네 개를 쓰면 되겠지요.”

“......”

“죄송하지만 진단은 환자를 보고 하는 것이지 보호자와 논쟁하는 게 아닙니다.”

“허어!”

“기왕 보여주실 거면 빨리 허락하시죠. 실은 제가 밀린 환자들 때문에 준비할 게 많습니다.”

윤도가 조금 빡세게 나갔다. 신침명의를 받으니 오만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자기 혼자 판단하는 보호자. 그 벽을 깨려는 생각이었다.

“지검장님!”

듣고 있던 용천규도 재촉의 지원사격을 날려주었다.

“별 수 없군. 자네 다시 짐 쌀 준비나 하게. 이번에 내려가면 아주 못 올라올 거야.”

지검장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쳐갔다. 윤도의 뚝심에 손을 든 것이다.

부릉!

세 사람이 탄 차가 시동을 걸었다.

“여기가 내 집입니다.”

퇴근 후, 지검장이 거실에서 말했다. 마당이 아담한 단독주택이었다. 거실에서 보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정감이 서린 나무 계단이었다. 그러고 보니 벽이 온통 편백나무 원목이었다. 피톤치드를 발생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는 편백나무. 묻지 않다고 그 아들을 위한 방편임을 알 수 있었다.

“저 위에 내 아들이 삽니다.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되는데 가는 길이 늘 천리는 되지요.”

김정엽의 미소는 텅 비어보였다.

“이제 걱정마시고 채 선생을 믿으시라니까요.”

함께 온 용천규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용 부장은 내 마음 모르네. 저 놈은 이제 나를 남보듯 하지만 내가 저 아이를 얼마나 아꼈는 줄 아나? 자네가 동부지검으로 갔을 때만 해도 딸 바보가 아니라 아들바보라고 소문날 정도였다네.”

“소문은 들었습니다.”

“저 녀석,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내 손을 잡고 다녔지. 초등학교 4학년까지도 내 무릎에 앉았고. 내 아버지가 엄격했기에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네. 친구처럼 삼촌처럼 지내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랬네. 수사 중에도 쉬는 일요일이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농구나 축구를 같이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공부도 곧 잘 했는데... 학원 앞에 가면 저 놈 이름 쓰인 현수막이 즐비했으니까.”

지검장의 눈은 추억으로 깊었다.

사랑하는 자식...

그러나 이제는 회복 불가능의 중증 우울증에 걸린 자식.

권력도 돈도 있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아버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어쩌면 일반인보다 더 심할 일이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 비렁뱅이라면 소주 한 잔 마시며 신세 한탄이나 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젊은 놈이 무슨 우울증이라는 건지... 다 나약해 빠진 성격 탓이지. 여기 이게 진단서들입니다.”

진단서류가 나왔다. 전부 코드 F로 시작하는 정신장애 쪽 진단이었다. 그래도 다른 기능 수치들은 크게 문제가 없었다. 간기능, 신기능, 기타 등등...

“지검장님!”

서류를 보는 것보다 지검장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예.”

“방금 아드님이 나약한 성격이라고 하셨는데 우울증은 성격과 관련된 게 아닙니다.”

“그건 의학적인 판단이겠지만 내가 볼 때는 성격 탓입니다. 저 놈은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요.”

“그렇다면 적극적이고 활발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가요?”

“예?”

“외향적인 사람도 우울증의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아드님 같은 중증 우울증이라면 우울증 자체를 성격으로 착각하기도 하지요.”

“......”

“우울증 환자가 우울증을 성격의 문제로 인지하게 되면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소극적이 되면서 스스로의 문제로 돌려버릴 수 있습니다. 성격 탓이다. 너 자신을 바꿔야한다라는 식의 말은 우울증 환자의 치료에 치명타가 됩니다.”

“알겠소.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지검장이 본안을 비껴갔다. 윤도는 꾸벅 고갯짓으로 예를 갖췄다.

자박자박!

김정엽의 뒤를 따라 윤도가 걸었다. 지검장은 익숙하지만 낯선 걸음이었다. 2층 거실에 있던 가정부가 일어섰다. 아까 차를 주고 간 그 가정부였다. 테이블 위의 풍경을 보니 하루의 상당 시간을 여기서 머무는 눈치였다.

똑똑!

지검장이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 좀 열어라. 아빠다.”

“......”

“이 놈이 이렇습니다. 하루 24시간, 밖으로 나오질 않아요.”

김정엽은 한숨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안 열면 아빠가 연다.”

“......”

이어지는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지검장은 익숙한 얼굴이다. 열쇠를 꺼내더니 구멍에 넣었다.

딸깍!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불이 없었다. 아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윤도 생각이었다. 아들은 거기 있었다. 침대 아래로 내려와 둥글게 몸을 만 채.

“불 켠다.”

지검장의 목소리와 함께 방이 밝아졌다. 방 안은 놀랍도록 깨끗했다. 흐트러진 건 그저 침대에서 떨어진 베개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 저기 보이는 먼지...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하고 사는 지 알 것 같았다.

“일어나거라. 네 병 봐주려고 유명하신 한의사 선생님이 오셨어.”

“......”

아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몸을 웅크린 채 그저 바닥만 보았다. 지검장이 다가가 아들 팔을 잡았다. 아들은 반 강제로 일어섰다. 일어서는 발목이 눈을 차고 들어왔다. 토끼처럼 모아진 발목이다.

“......!”

윤도 시선이 날카롭게 멈췄다. 우울증 외에도 질병이 있었다. 윤도의 시선이 아들의 복부로 향했다. 발목을 보는 것만으로 몇 가지 진단정보를 받은 것이다.

중증 우울증을 깨라-2

“약을 또 제대로 안 먹었네.”

“......”

“얘가 이렇습니다. 그냥 두면 문 잠그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화장실 가는 거 외에는...”

지검장이 윤도를 돌아보았다.

“진맥 좀 보죠.”

윤도가 다가섰다. 환자 앞에서 지검장을 돌아보았다.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채 선생.”

“괜찮습니다. 환자와 한의사인 걸요. 게다가 아드님은 성인이고요.”

“......”

“정말 괜찮습니다.”

“그럼 밖에 있겠소.”

지검장은 두 걸음 밖의 거실로 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이름이 김경호 씨라고요? 난 채윤도라고 합니다. 가방 좀 내려놔도 될까요?”

문소리가 난 후에야 윤도가 물었다. 김경호는 여전히 침묵으로 답했다.

“잠깐 내려놓겠습니다.”

한 번 더 체크하고 가방을 놓았다.

“김경호 씨... 이름 좋네요. 내가 좋아하는 락 발라드 가수도 김경호인데...”

“......”

“혹시 김경호 씨도 노래 잘 해요?”

“......”

“진맥 좀 볼까요?”

“채-윤-도?”

윤도가 다가서자 김경호가 혼자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아 쉰 듯한 소리였다.

“맞습니다. 채윤도...”

“그렇게 애쓸 거 없어요.”

“예?”

“잠깐 있다가 그냥 가세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 돈은 주실 겁니다.”

“김경호 씨...”

“아무 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김경호, 거기까지 말하고 침묵의 셔터를 내렸다. 얼굴은 무릎 속으로 더 깊이 숨었다. 침대 매트리스에 닿을 정도였다.

깊은 침묵!

환자의 우울증은 너무 깊은 곳까지 달려갔다.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 누구의 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자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좋아요. 그럼 아예 까놓고 얘기할까요?”

윤도가 전략을 바꾸었다.

“......”

“김경호 씨 미국에서 학교 다녔다면서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

“한국에서 유학 온 친구들 많았죠? 그 친구들 중에 우울증 앓는 사람 없었어요? 듣기로는 유학 생활도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라고 하던데...”

“......”

“그때 누군가의 우울증을 상담하지 않았나요? 혹은 고민 상담으로라도.”

“......”

“사실 나는 고등학생 때에도 친구의 우울증을 고쳐준 스펙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한의학을 배우다보니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더라고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팼어요. 미치도록!”

“......”

“그 녀석은 맨날 자살만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애들이 다들 포기하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몰라도 친구들은 알잖아요? 문제는 수행평가였어요. 이 친구 때문에 늘 점수가 바닥으로 나와요.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빡쳐서 하교길에 미친 듯이 패주었죠.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세요?”

“......”

“그 다음 날, 그 부모가 찾아왔어요. 아, 씨... 영락없이 학교폭력으로 엮이는구나 싶었는데... 어, 그 부모님이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

거기서 김경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감정의 기복이 왔다는 증거였다. 윤도는 그 틈새를 따라 이야기를 쑤셔넣었다.

“부모님 말씀이 친구가 달라졌다는 거예요. 제 이름대면서 씩씩거리더니 자기만의 담을 조금씩 허물었다나요?”

“......”

“그런데 그게 왜 한의학적으로도 하나의 방법이었냐고요? 왜냐면 분노가 극에 달하면 우울이 되는데 극단의 우울에서 분노로 돌아가게 했잖아요? 말하자면 우울이 분노보다 중증인데 병을 한 단계 낮춰준 셈이죠. 김경호 씨도 내가 좀 때려줄까요?”

“풋!”

듣고 있던 환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기도 안 막히는 일. 감정의 주머니가 잠시나마 열렸다 닫힌 것이다.

“슛!”

윤도가 환자 앞에서 허공을 후려쳤다. 그걸 본 환자가 결국 어이상실 웃음을 지었다. 이유야 어쨌든 웃음이었다.

“김경호 씨.”

윤도가 바짝 다가섰다.

“......”

“나 귀찮죠?”

“알면 나가세요.”

“나 나가라는 이유는 단 하나잖아요? 어차피 내 병 못 고치니까 찌그러지셔.”

“......”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내가 침 딱 한 방만 놓죠. 그래서 김경호 씨 기분이 좋아지면 그때부터 본격 치료, 아니면 Get out!”

윤도가 문을 가리켰다.

“좋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환자가 자포자기로 콜을 받았다.

“땡큐, 그럼 침대에 잠시 누워주시겠어요?”

“......?”

“침이라는 게 그냥 막 찌르는 게 아니거든요. 딱 한 방!”

“후우!”

귀차니즘의 극단에 선 환자가 침대에 누웠다.

딱 한 방.

어디다 놓아야할까? 침에 앞서 환자의 손을 잡았다. 삶을 체념한 환자였기에 뿌리치지는 않았다. 보다 빠르게 진맥을 했다. 환자는 ‘심허증’이었다.

한방에서는 우울증의 원인을 심허로 보고 있다. 심장이 허약한 상태를 말한다. 한문으로 心자는 감정과 연관이 많다. 분노(憤怒), 원망(怨望)... 나아가 우울(憂鬱)에도 이 심(心)자가 어김없이 들어간다.

심장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심장의 기가 약하므로 의욕이 떨어지고 자신감이 가출을 한다. 김경호의 경우에도 전형적인 심허였다. 다만 그 정도가 몹시 심각할 뿐.

혈자리들의 반응도 빠르게 캐칭했다. 우울증에 특효혈이 있다는 것은 그 특효혈이 약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손을 놓다가 윤도의 시선이 멈췄다. 그의 손가락이었다. 굳은살이 보였다.

굳은살...

낯이 익었다. 윤도도 저 살이 생긴 적이 있었다. 저 살은...

‘으음...’

호기심은 잠시 접어두고 시침 준비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