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265)

“그건 음력이고요 제가 양력으로 생일을 지내는 편이라...”

부용이 웃었다.

“선물부터 사러가야겠네요.”

윤도가 엉덩이를 들었다.

“아뇨. 제 생일이 뭐 중요한가요.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갈매도의 별장을 귀곡산장 삼아 미역국을 먹고 있을 텐데요.”

“부용 씨...”

“일단은 여기 천사가 먼저. 우리 미우가 선생님께 부탁이 있대요. 그래서 불렀어요.”

부용이 미우를 돌아보았다.

“미우가 할아버지를 정말 좋아해요. 엄마 아빠를 후쿠시마 지진 때 잃고 혼자 살아나 그때부터 할아버지 품에서 자랐거든요.”

‘후쿠시마 지진?’

그렇다면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말이다. 윤도의 눈동자가 조금 더 초롱해했다.

“선생님 오셨으니까 이제 미우 능력으로 꼬셔봐. 나도 함부로 못하는 분이시거든?”

부용이 미우에게 공을 넘겼다.

“저는...”

미우라는 일본 아이돌, 송아지 같은 눈동자를 꿈벅이더니 단정하게 일어섰다.

“채윤도 선생님.”

“......?”

“저는 선생님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대표님 말씀에 따르면 선생님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의이자 침술가라고 합니다.”

미우는 마치 주장 발표라도 하듯 또렷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제 할아버지는 원전사고 때 엄마 아빠를 찾기 위해 보름 동안 후쿠시마 현에서 살았습니다. 사고가 난 제일 원전 반경 15km 안에서 말입니다.”

“......”

“그때부터 할아버지 몸 속에 병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나마 거기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닥터 다카노 레이카가 있어 잘 돌봐주었는데 이제 레이카도 죽고 없습니다.”

“......”

“할아버지는 지금 굉장히 아픕니다. 병원에서도 몇 달 살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돕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명의명침이시라면 저희 할아버지를 치료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대표님을 졸라 따라 나왔습니다.”

이야기 하는 내내 미우는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물을 쥐어짜는 것도 아니었다. 진지하지만 슬프지 않은 태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프신데요?”

“처음에는 갑상선 암이 발견되었어요. 수술을 했는데 나중에는 몸 전반의 피부암으로...”

흔들림없던 미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일본에 계신가요?”

“아뇨. 지금은 겸사겸사 한국의 절로 나와 계세요. 서울에서 멀지 않은데 거기 스님하고 친분이 있어서...”

“한 번 봐드릴 게요. 우리 한의원으로 모셔오세요.”

“한의원은...”

미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거동이 불편하세요?”

“그것보다 지금 계시는 절 외에 다른 장소는 잘 안 가시려고 하십니다. 게다가 며칠 후에 중요한 일로 일본으로 돌아가실 계획인데 이번에 가시면 다시 오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내가 왕진을 가야겠군요.”

“죄송합니다.”

미우가 허리를 조아렸다.

“내일 시간 낼 게요. 할아버지에게 연락이나 해두세요. 자리 비우시면 곤란하니까.”

“아리가또,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미우는 허리를 세 번이나 90도로 접고 돌아갔다.

“제가 괜한 부담드리는 거 아니죠?”

미우가 나가자 부용이 물었다.

“아닙니다. 환자 보는 거야 제 생업인 걸요. 게다가 방사능 환자라니 호기심도 있고...”

“정말 괜찮으면 청탁 하나 더 드려도 되요?”

“얼마든지.”

“실은 다른 팀 주요 멤버 하나가 좀 좋지 않은 습관이 있어요. 하지만 워낙 노래와 춤이 발군이다 보니 미국 측에서 그 친구의 인터뷰를 요청해 왔어요.”

“어떤 습관인데요?”

“눈을 깜박거려요. 지나칠 정도로요.”

“경련이 아니고요?”

“아니에요. 대학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봤는데 의학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네요. 아마 심리적인 요인이 아닐까 하던데 그 친구는 신경도 예민하지 않거든요.”

“내일 중으로 데려오세요. 아까 그 친구 할아버지 보러가는 길에 진료해드리죠.”

“고쳐만 주시면 치료비는 얼마든지 부르셔도 되요.”

“알겠습니다. SN이 거덜 날 정도로 청구하죠.”

“이제 비즈니스 끝났으니까 조촐하게 생일 술 한 잔 하러 가요. 초대 받은 곳이 있거든요.”

부용이 손을 내밀었다.

탁!

문을 열었다. 불 꺼진 별실은 어두웠다. 부용의 SN에서 쓰는 별실이었다. 먼저 들어선 윤도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 순간, 별꽃처럼 박수와 폭죽이 터졌다.

펑펑펑!

짝짝짝!

딸깍!

순간, 스위치가 들어왔다.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짝짝짝!

박수는 더 크게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는 폭죽의 바다였지만 이제는 미녀의 바다였다. 장현서를 필두로 이가인, 김다경, 박연하...

걸그룹들까지 두세 팀 강림했으니 셀 수도 없었다.

“채 선생님!”

미녀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야, 이 것들이... 생파 해준다고 시간내라고 생떼를 쓰더니 왜 채 선생님만 반기는 거야?”

부용이 볼멘소리를 냈다.

“에이, 대표님은 고작 생일이지만 채 선생님은 우리의 은인이잖아요.”

장현서가 바로 응수했다.

“저도 공감요.”

이가인이 손을 든다.

“Me too.”

박연하와 김다경도 빠지지 않았다.

“아, 왕짜증. 그럼 나 간다. 채 선생님 모시고 생파해라.”

부용이 돌아섰다. 순간 한 번 더 폭죽이 터지며 꽃술이 날아와 부용 앞을 막아섰다.

“갈 때 가시더라도 꽃은 가져가야죠.”

장현서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저는 실용적으로 먹을 걸로 가져왔어요.”

이가인이 내민 건 금가루 뿌려진 김밥 꽃다발이었다. 꽃은 금세 부용의 가슴을 덮고도 남았다.

“대표님, 생일 축하합니다!”

합창과 함께 걸그룹들의 즉석 생일축하곡 공연이 펼쳐졌다. 해피버스데이 해비버스데이, 미녀들은 입을 모아 합창을 했다.

“나 참.”

부용은 허얼, 코웃음을 치며 웃어넘기고 말았다.

“자자, 남는 건 사진 뿐이니까 다른 인증샷 대형으로 집합.”

장현서가 소리쳤다. 미녀들이 윤도 옆 쪽으로 몰려들었다.

“아, 진짜... 나 삐진다?”

부용이 또 한 번 목청을 높였다.

“그래도 할 수 없어요. 대표님은 자주 보지만 채 선생님은 자주 못 보니까요.”

걸그룹들이 입을 모았다. 천하의 부용도 이제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럼 지금부터 친애하고 총애하는 이부용 대표님의 생파를 시작하겠습니다. 대표님은 주빈 자리에 서주세요.”

박연하가 부용을 바라보았다.

“주빈석이 어딘데?”

“어디긴요? 테이블 앞이죠.”

박연하가 빈 테이블을 가리켰다. 부용은 등을 떠밀려 테이블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림이 완전 노처녀 각이니까 채 선생님은 그 앞에...”

이번에는 윤도가 끌려갔다.

“그림 좋습니다. 이제 눈을 감으세요.”

“야, 또 무슨 장난을 하려고?”

부용이 물었다.

“에이, 속고만 사셨나? 이제부터는 완전 진지 레알 축하모드로 갈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눈 뜨면 안 돼요. 눈 뜨면 30년 동안 남자 없는 세상에 살기.”

박연하가 재수 없음 코드로 쐐기를 박았다.

“채 선생님도 눈 감으세요.”

그 화살은 윤도에게도 날아왔다. 별 수 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

딸깍!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뭔가 부산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너희들 진짜 엉뚱한 장난하면 다 죽는다.”

부용이 슬쩍 주의를 주었다. 그래도 수상한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는 오히려 조용해졌다. 주변이 돌연 조용해지니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다 됐습니다. 두 분은 셋을 세고 눈을 뜨세요.”

박연하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하나, 둘, 셋!”

윤도와 부용이 합창을 하고 살며시 눈을 떴다.

“......?”

윤도와 부용의 눈이 마주쳤다. 그 가운데서 타고 있는 건 촛불이었다. 아래는 케이크였고 와인과 멋진 까나페 안주도 보였다. 하지만 꽉 채워진 테이블과 달리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미녀들이 모두 퇴장한 것이다.

“아, 얘네들 장난은 정말 못 당한다니까요.”

부용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불부터 꺼야할 거 같은 데요?”

윤도가 말했다.

“불요?”

“부용 씨 생일이니까.”

“아, 정말...”

“생일 축하합니다...”

황당해하는 부용을 두고 윤도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까 미녀들의 합창 때 제대로 끼지 못한 윤도였다. 더구나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생일의 주인공이 촛불을 끄는데 노래가 빠질 수는 없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거기까지 달려간 윤도가 잠시 주저했다. 부용의 시선은 윤도의 입에 꽂혀 있었다. 다음 가사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냥 노래잖아?’

윤도가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노래를 이었다.

“사랑하는 부용 씨, 생일 축하합니다!”

짝짝짝!

윤도가 박수를 쳤다. 하지만 부용은 불을 끄지 않았다. 그저 윤도를 바라볼 뿐이다.

“뭐해요? 불 꺼야죠.”

윤도가 재촉했다. 그러자...

“아, 몰라요. 선생님 때문에 애들한테 졌잖아요.”

부용이 낭패의 진저리를 쳤다.

“예?”

“노래 말이에요.”

“노래?”

“와아아!”

순간 다시 불이 켜졌다. 사라졌던 미녀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이 것들이 나 벗겨먹으려고 내기를 걸었단 말이에요. 선생님이 생일축하곡을 불러줄 것이다, 아니다...”

“부용 씨는 어디다 걸었는데요?”

“안 부른다에다...”

“허얼...”

“게다가 옵션까지도 졌잖아요.”

“옵션은 또 뭐...?”

“노랫말요. 사랑하는...”

“......!”

“대표니임!”

박현서가 새침하게 두 손을 내밀었다. 봉투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가져가. 속 시원하냐?”

부용이 카드를 던졌다.

“에이, 그래도 우리 덕분에 고백 들었잖아요. 사랑하는 부용 씨...”

박현서가 코맹맹이 소리로 리바이벌을 했다.

“야! 박현서, 너.”

“야, 튀자. 대표님 열 받았다.”

박현서가 문으로 뛰었다. 미녀들도 우르르 그 뒤를 따라갔다.

“대표님, 생일 축하합니다. 좋은 시간 되시고 앞으로도 우리 많이 많이 키워주세요.”

“채 선생님도 고맙습니다.”

미녀들은 새처럼 재잘거리고 사라졌다.

“어휴, 정신이 다 없네.”

한바탕 소란에 부용이 몸서리를 쳤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촛불부터 끄시죠.”

“어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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