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265)

<생일 축하합니다.>

다시 윤도의 노래가 이어졌다. 부용은 절반 쯤 타들어간 초를 단숨에 꺼버렸다.

“우리 애들이 저렇다니까요. 순 내숭덩어리들. 다들 카메라 앞에서만 여신인 척 하지...”

“좋잖아요. 늘 여신으로 살면 숨 막힐 거 같습니다.”

“음, 뭐 그렇긴 해요. 선생님 말대로 기왕 이렇게 된 거 건배해요. 주단 깔아줬으니 즐겨야죠.”

“그럴까요?”

윤도도 잔을 들었다.

챙!

맑은 소리와 함께 샴페인을 마셨다. 청량감이 기 막히는 샴페인이었다. 이름을 보니 벨 에포크, 나중에 알았지만 병 당 수십 만원 하는 명품 샴페인이었다. 하지만 가격보다 매력적인 건 이름의 의미였다.

벨 에포크(Belle Epoque)를 영어로 옮기면 beautiful epoch, 즉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혹시 조지훈 님의 시 사모 아세요? 그 끝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멋지네요.”

“내용 자체는 좀 슬프지만 마지막 구절은 심쿵이죠. 거기 보면 술 세 잔을 마시더라고요. 이건 제가 선생님께 주는 잔이에요.”

부용이 잔을 따랐다. 둘이 함께 마셨다.

“그럼 제가 한 잔 더 따라야 세 잔이 되겠군요.”

윤도가 병을 집었다. 부용은 기꺼이 샴페인을 받았다.

세 잔의 샴페인...

알코올 도수는 12도 가량이지만 양이 많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알딸딸해지는 윤도였다.

“고마워요.”

부용이 다가와 윤도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녀를 당겨 입술을 가졌다. 잠시 사이를 두고 얼굴을 바라본 후에 한 번 더 키스. ..

“키스도 세 번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윤도가 웃었다. 그러자 부용이 윤도의 얼굴을 덮쳐왔다. 윤도는 그녀의 전면전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혀는 점점 달콤하게 변했다. 나아가 윤도 심장을 직격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그 느낌이 알코올과 시너지를 이루면서 심장의 화산이 폭발했다.

그녀를 당겨 소파로 갔다. 까만 소파 위에 드러나는 부용의 나신이 연꽃처럼 고결해 보였다. 윤도는 연꽃을 한 겹 한 겹 벗겨나갔다.

윤도는 긴 목과 하얀 쇄골 위를 애무했다. 손은 아래로 내려가 가슴을 잡았다. 두 개의 봉오리가 윤도를 맞았다. 입술이 거기 머무는 동안 손은 또 그 아래로 내려갔다.

손...

그 손이 원초의 샘물에 닿았다. 그 촉촉함만으로도 윤도의 중심은 쇠방망이가 되었다.

후끈!

단숨에 달아오른 활화산은 거칠 것이 없었다. 마침내 연꽃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부용은 당기고 윤도는 밀었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한없는 목마름. 그 목마름의 끝에서 용암이 방출되고 말았다.

츗, 추웃!

시원했다. 몸 안의 진기가 다 빠진 느낌이지만 비우고 새로 채워지는 둣 가뜬한 느낌이었다.

“선생님...”

한바탕의 몸서리 후에 부용이 윤도의 뺨을 쓰다듬었다. 윤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호수가 담긴 듯 안으로 깊었다.

“저 실은 선생님을...”

그녀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출렁거릴 때 윤도의 전화기가 울었다.

빠라빠라빵!

분위기 모르는 놈.

그런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미우였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처음에는 소용없다고 거절하셨지만 제 부탁을 받아주셨어요. 이제는 선생님 차례입니다. 부탁합니다.”

미우는 많이 고조되어 있었다.

“알았어요. 내일 봐요.”

가만히 도닥여주고 전화를 끊었다.

“선생님!”

돌아보니 부용이 샤워실에서 손짓을 했다.

촤아아!

그녀가 등을 씻어주었다. 비누칠 하는 손길마다 부드러운 정성이 맺혀왔다.

“별 거 아니지만 선생님의 장침처럼 피로가 쫙 풀려나갔으면 좋겠어요.”

부용의 등을 밀었다. 가슴도 밀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 그대로 당겨 안았다. 샤워장의 습기와 더불어 미끈거리는 그녀의 볼륨들. 윤도의 화산은 결국 한 번 더 폭발하고 말았다.

촤아아!

잠기지 않은 물줄기가 두 사람의 거친 호흡소리를 감춰주었다.

다음 날, 부용이 데려온 멤버는 어렵지 않게 고쳤다. 그녀의 눈 깜빡임은 중증이었다. 하지만 오장육부에서는 원인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눈꺼풀을 관장하는 비장의 기를 강화하자 깜빡임이 멈췄다. 함께 온 부용에게는 생일선물을 안겨주었다. 지각 선물이지만 그녀가 좋아했다.

부릉!

그녀를 보내고 스포츠카에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는 진경태를 태웠다. 약제실에만 있으니 바람을 쏘여줄 생각이었다. 가면서 이런 저런 약재 이야기도 할 게 많았다. 물론 미우의 할아버지를 위한 영약 약침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도는 이 치료가 길어질 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원장님이 구해오는 약재 말입니다.”

진경태가 먼저 화두를 열었다. 이따금 가져온는 영약들. 그는 여전히 그 출처가 궁금했다. 어느 산인지 알려만 주면 쉬는 날 달려가고 싶은 진경태였다.

“제공자가 워낙 세세한 거 말하길 싫어해서 말이죠...”

윤도가 둘러댔다. 진경태는 더 캐묻지 않았다. 사실 그의 스승 격인 고봉달도 그런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뜻밖에도 기인이 많았다.

차가 절에 도착했다. 서울 경계에 닿은 경기도 땅이었다.

“선생님!”

미우는 절 입구에 나와 있었다.

“와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미우는 여전히 일본인 특유의 예절로 윤도를 맞았다.

“할아버지는요?”

“법당 뒤의 방이에요. 제가 먼저 가서 선생님 오셨다고 말씀드릴 게요.”

미우가 법당 뒤로 뛰었다.

“아저씨는 차에 좀 계세요.”

진경태에게 말하고 법당을 향해 걸었다. 그때 중년의 스님 한 사람이 길을 막았다.

“미나토를 찾아온 사람이오?”

‘미나토?’

일본 이름이다. 미우의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 같아 그렇다고 답했다.

“당신도 고미술품 파시려고?”

“고미술품요? 저는 그 분 몸이 안 좋다기에 치료를 하러 온 한의사입니다만.”

“한의사?”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한의사라... 하긴 저런 인간일수록 이승의 미련도 많겠지.”

스님이 냉소를 뿜으려 돌아섰다. 이상한 예감이 든 윤도가 스님을 잡았다.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미나토를 치료하러 왔다면서요?”

“그럼 안 되는 겁니까?”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저 인간은 우리나라 문화재급 고미술품을 전문적으로 빼가는 인간입니다. 우리 주지 스님과의 인연으로 이 절을 보수할 때 공사비를 대주었다기에 나서지 못하지만 대접할 인간이 아니라오.”

스님은 핏대를 감추며 멀어졌다.

‘문화재급 고미술품을 빼가?’

황당한 사이에 미우가 다가왔다.

“준비 되었습니다. 선생님.”

“아, 예...”

“어쩌면 놀라실 지도 몰라서요. 할아버지... 피부가 굉장히 안 좋으시거든요.”

“한의사 하다보면 더 심한 상처도 많이 봅니다.”

“알았어요. 그럼...”

덜컥!

미우가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벽에 기댄 채 윤도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윤도의 피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

<어쩌면 놀라실 지도 몰라요.>

미우의 말... 그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노인은...

노인은...

빅 딜-2

빅 딜-2

“내 꼴이 징그럽거든 그냥 가시오.”

주저하는 사이에 미나토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삐쩍 골은 얼굴이지만 카랑한 목소리. 한국말 또한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카랑하기만 하지 푸석하다. 코에도 생기가 말랐다. 폐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의사 채윤도입니다.”

인사를 한 윤도가 안으로 들어섰다.

미나토...

그의 피부암은 최악이었다. 손발을 타고 올라온 종기와 염증, 피부괴사가 목까지 번지고 있었다. 얼굴 한편과 이마에도 흉측하게 똬리를 틀었다. 예전 갈매도에서 보았던 부용의 피부병에 비해도 몇 배는 더 심각해 보였다.

“한국의 명침이시라고?”

미나토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네, 한국 최고의 한의사세요.”

미우가 윤도를 대신해 대답했다.

“이창수를 아시오?”

미나토의 눈빛은 우묵하기만 했다.

“동래의 이창수 선생 말씀입니까?”

“그럼 지용균은?”

“칠곡의 명침으로 알고 있습니다.”

“옳거니, 그럼 태극침술도 아시겠군?”

“제 수준이 궁금하다면 침을 먼저 맞는 게 옳다고 봅니다. 침이란 입으로 놓는 게 아니니까요.”

윤도가 미나토의 폭주를 막아 세웠다. 미나토는 침술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의 테스트를 입으로 따라가자면 한이 없을 일이었다.

“침으로 내 피부암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오?”

미나토가 팔뚝을 걷었다. 상의도 끌어올렸다. 기저세포암과 흑색종 등이 빼곡하게 드러났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바로 오바이트를 할 정도였다.

“그 역시 침을 꽂아봐야 압니다.”

윤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말은 옳으나 침은 잘못 들어가면 회복할 길이 없지. 더구나 이렇게 중한 질병이라면...”

“자신이 없다면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진맥부터 좀 할까요?”

“고마운 말이지만 할 수 없을 거요.”

미나토가 팔뚝을 내밀었다.

“......!”

그걸 본 윤도의 눈에 쓰나미가 밀려왔다. 진맥을 잡는 부위에 피어오른 기저세포암 때문이었다. 상처가 커서 맥을 잡을 수 없었다.

시선이 목으로 옮겨갔다. 인영맥 부근에도 결절 흑색종이 집을 지었다. 거북껍질처럼 단단한 암 덩어리였으니 맥을 잡기는 어려웠다.

다른 곳도 그랬다. 맥을 잡을 수 있는 부위마다 피부암이 맺혀 있었다.

“내, 일 때문에 종종 한국에 와서 명침 한의사들을 찾았지만 동래의 이창수도 칠곡의 지용균도 이 피부암 에는 시침조차 못했다오. 진맥이 이러니 혈자리 또한 다를 바가 있겠소?”

“진맥은 다른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어떻게 말이오?”

“그대로 계십시오.”

미나토의 손을 소반 위에 올려둔 채 침통을 꺼냈다. 윤도 손에 잡힌 건 변함없는 장침이었다.

“......?”

미나토의 눈이 출렁 흔들렸다. 그 장침이 손목의 진맥 부위로 들어갔다. 기저세포암 아래였다. 하나는 관맥을 관통하기 전에 멈췄고, 또 하나는 촌맥, 마지막 하나는 척맥 위에 멈췄다.

“그럼 진맥하겠습니다.”

장침이다.

장침을 매개로 맥을 읽는 윤도였다. 안 되는 돌아가는 윤도의 신기. 미우는 벌써 넋을 잃고 숨을 죽였다.

오른손 다음에는 왼손이었다. 오른손목에서 폐와 대장의 맥을 읽었다. 관맥에서 비장과 위장, 척맥에서는 신장... 오른손목의 진맥 정보를 차분히 리딩하고 왼손으로 갔다. 거기 꽂힌 장침이 전하는 정보를 받았다. 왼손 손목의 촌맥에는 심장과 소장의 상태가 나타나게 되어있다. 관맥에는 간장과 담, 척맥에서는 명문과 삼초의 기능이 실려 왔다.

일차 진맥을 끝내고 각 장침을 지긋이 눌러보았다. 맥이 어느 부위에서 강한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부맥이 나왔다. 보기에도 좋지 않지만 몸 안의 맥은 더 약했다. 조금 더 자극을 했다. 맥의 뿌리가 거의 없었다. 맥의 근본은 신장. 신장의 기가 바닥을 드러냈다는 증거였다. 간혹 삽맥도 보였다. 이 맥이 보이면 정기가 없다는 의미였다.

‘후우!’

혼자 날숨을 쉬었다. 바닥을 드러낸 건 한둘이 아니었다.

고개를 드는 윤도의 눈에 고미술품이 들어왔다. 낡은 질그릇들과 청자풍의 물병들이었다. 벽에 기대 세워둔 족자와 두루마리도 보였다. 그 아래로는 감정서 봉투가 보였다. 스님이 한 말이 스쳐갔다.

‘당신도 고미술품 파시려고?’

고미술품...

그렇다면 저 고미술품들은 미나토가 사들인 거란 말인가?

“선생!”

골똘하는 사이에 미나토가 입을 열었다.

“예.”

“진맥을 본 거요?”

“예.”

“침을 통한 진맥이 가능하단 말이오?”

미나토의 눈에 각이 서있다.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과거 조선시대의 명의들은 환자의 팔에 실을 묶어서도 보았습니다. 피부 표면에 결절이 있어 손가락으로는 안 되겠지만 침을 꽂고 그 침에 전해오는 진맥은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인간이 살아있는 한, 맥은 뛰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소?”

“......”

“겉 멋만 드신 젊은 한의사로군.”

윤도가 주저하자 미나토의 의심이 작렬했다.

“한 달입니다. 어르신에게 남은 목숨.”

“......?”

미나토의 눈에 경악이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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