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요?”
“그리고...”
윤도가 남직원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이내 멍 때리는 표정이 되었다.
“남편이 해주셔야 효과가 100%입니다.”
윤도는 남편 등을 밀고 진료실로 향했다.
쪽!
발소리를 따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쪽!
이 소리는 유축기 기구 소리가 아니었다.
쪽!
남편의 입술 유축기 돌아가는 소리다.
침이 끝난 후에 할 일은 따뜻한 타올로 유방을 마사지하고 젖을 빠는 일이었다. 유축기로 해도 가능하지만 ‘남편표 입술 유축기’가 최고다. 아기의 젖에 아버지의 부성까지 더해지는 까닭이었다.
장침으로 해결된 유옹과 유두의 구멍. 거기에 남편의 마음이 더해지면 다시는 막히지 않는다. 젖도 술술 나온다. 그건 장침으로도 넘볼 수 없는 일이었다.
쪽쪽!
“나와?”
“아니.”
“잘 좀 해봐.”
쪽쪽!
소리는 점점 더 아름다운 연주로 변해갔다.
**
짝짝짝!
같은 시간, 발표장에는 박수소리가 넘쳤다. TS전자의 핵심 기술진들은 젊은 신성 스떼빤의 이론발표에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차세대의 알고리즘과 코딩으로 대표되는 그의 견해는 세계 최고라는 TS 기술진들에게도 경이로운 아이디어에 속했다.
“수고했습니다.”
이사 둘을 대동한 김 전무가 스떼빤을 치하했다.
“아닙니다. 이런 기회를 주어 영광입니다.”
스떼빤이 대답했다. 두 시간 이상의 마라톤 강연을 하고도 지친 기색이 없는 스떼빤. 그는 거의 에너지 덩어리처럼 보였다.
‘어떻게든지...’
김 전무의 전의도 불덩이로 타 올랐다. 스카우트하기만 하면 미래시장의 선도도 큰 문제가 없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기회였다.
“가시죠. 회장님께 인사도 하시고 우리 TS의 의무실에 또 굉장한 닥터가 있거든요.”
“닥터라고요?”
“오리엔탈 닥터인데 스떼빤처럼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습니다. 어디 불편한 데가 있으면 침 한 방으로 해결해 줍니다. 회장님의 선물로 알아주십시요.”
“하핫, 그렇다면 정말 마법이군요. 침술 마법사는 중국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중국이라고요?”
“제 여친인 뤄샤오이가 그랬거든요. 중국에 가면 중국 침술의 신기를 보여주겠다고.”
“단언컨대 침술이라면 이 사람이 지구 최강입니다.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의니까요.”
“신의라...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스떼빤이 웃었다. 천재적인 머리만큼이나 자유분방한 목소리였다.
천재 공학자 스떼빤.
그가 윤도 앞에 앉았다. 의무실이었다. 이제는 그녀의 여자 친구도 동행이었다. 아까 본 그 여자였다.
“쿨럭!”
여자가 기침을 했다. 가까이서 보는 여자, 확실히 건강상의 문제가 있어보였다.
“김 전무님이 하도 자랑을 하시길래 궁금해서 왔습니다. 제가 호기심 덩어리거든요.”
스떼빤이 웃었다. 윤도가 그 진맥을 잡았다. 항문질환은 맞았다. 손목에도 수근관증후군이 있었다. 보통 말하는 손목터널증후군이었다. 꽤 심한 편이었다.
손목에는 팔과 손을 연결하는 힘줄이 지나간다. 손가락의 감각을 관장하는 신경도 지나간다. 이들이 지나는 길은 인대로 둘러싸여있다. 이때 과도한 손의 사용으로 손목 근육이 뭉치거나 인대가 두꺼워지면 신경이 눌리면서 저린 증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되면 손이 아파 잠을 못 자는 경우도 있고 통증이 팔꿈치나 어깨로 올라가기도 한다. 양방에서는 부신피질호르몬제나 스테로이드 주사 치료법이 쓰인다.
세계적인 공학자 신분에 고질이 된 건 손목에 대한 혹사 때문이었다. 며칠 푹 쉬면 나을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서 통증이 고착되어 버린 것. 그 건 스떼빤의 설명으로 알게 되었다.
“가끔 우리 뤄샤오이가 침을 놔주기도 했습니다. 저 친구도 침을 좀 다룰 줄 알 거든요.”
스떼빤이 뤄샤오이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저 간단한 침술 몇 가지를 알 뿐이에요. 진짜 침술가는 중국에 있는 우리 외삼촌이시죠.”
뤄샤오이가 영어로 입장을 밝혔다. 그녀의 외삼촌이 중의라는 얘기였다.
“아무튼 마법을 부탁합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있다 보니 똥꼬의 불쾌감도 성가시고 손가락과 손목 역시 몹시 성거시거든요.”
스떼빤이 침대에 누웠다.
“채 실장.”
장침을 준비하는 사이에 김 전무가 다가왔다.
“회장님은 채 실장에게 맡기라지만 나는 말해야겠네.”
“무슨...?”
“사실 스떼빤의 스카웃에 책정된 예산이 무려 30억이라네. 예비비로 10억이 따로 준비되어있고.”
‘합이 40억?’
“연봉이나 계약금이 아니라 스카웃팀의 예산이네. 연봉은 백지수표로 준비해 놓았지. 종신계약도 가능하고.”
“전무님...”
“채 실장이 돈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예산규모만 봐도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걸세. 그러니...”
“최선을 다해보죠. 그러니 신경 그만 쓰십시오. 겨우 뚫어놓은 시신경 막히겠습니다.”
윤도가 웃었다.
“채 실장만 믿네.”
김 전무는 당부를 남기고서야 자리를 비켜주었다.
스떼빤에게 다가선 윤도가 장침을 꺼내들었다. 스떼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침이 컸다. 그걸 본 뤄샤오이가 웃었다. 그녀에게는 낯익은 침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윤도의 장침 때문이었다. 첫 시침은 치질을 위한 명혈 시침이었다. 침은 공최혈을 뚫었다. 사실 공최혈은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서양 사람이다.
지난번 독일인 레오폴트 때도 그랬지만 서양인의 혈자리에는 인체비례 가감 측정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윤도의 침은 소리도 없이 들어가 있었다. 한 혈자리의 기준을 세우면 인종도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머지 두 방은 장강혈과 양관혈을 찔렀다. 부은 것을 내리는 특효혈이었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르고 수근관증후군을 잡으러 갔다. 손목을 위한 시침이었다. 근육과 인대는 간이 주관한다. 그렇기에 간경의 혈자리를 다스렸다. 통증이 가장 심한 건 합곡혈 쪽이었다. 난시를 위해 자침한 장침을 그대로 두고 후계혈 쪽에서 다른 침을 넣었다. 소부와 노궁을 거쳐 합곡에 닿는 일침사혈이었다.
윤도의 침은 마치 피아노를 두드리는 손처럼 부드럽고 날렵했다. 그건, 외삼촌 중의를 둔 뤄샤오이도 처음 보는 침술이었다.
“침을 뽑겠습니다.”
타이머가 울리자 발침을 했다.
“그것 좀 보여주시죠.”
스떼빤이 말했다. 윤도가 침을 건네주자 그의 입이 한 번 더 벌어졌다. 침에는 피 한 방울 맺혀있지 않았다.
“와우!”
스떼빤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아픈 데는 어떻습니까?”
김 전무가 다가와 물었다. 스떼빤은 그제야 손목을 움직여보았다.
“와우우!”
감탄이 커졌다. 이번에는 엉덩이를 만져보았다. 그의 입에서 또 한 번 감탄이 나왔다.
“원더플, 이거 진짜 매직이군요. 지금 제가 뭐에 홀린 거 아니죠?”
스떼빤이 김 전무를 바라보았다.
“스떼빤이 공학의 마법사라면 여기 닥터 채는 침술의 마법사입니다. 그러나, 잠깐의 환상이나 눈속임이 아닌 의학이죠.”
“이거 정말...”
스떼빤은 연실 사방을 살폈다. 사물이 겹쳐보이던 현상이 사라진 것이다.
“고맙습니다. 닥터, 진짜 고맙습니다.”
인사말도 더 없이 컸다.
“그런데...”
스떼빤 김 전무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이거 제 스카우트와 연결되는 건 아니겠죠?”
“스떼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미 중국 쪽으로 마음을 굳힌 터라...”
“아직 사인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스떼빤이 우리의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손목과 똥꼬를 고쳐준 건 고맙습니다. 만약 제 목숨을 구했다면 저도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스떼빤이 일어섰다. 그가 뤄샤오이의 어깨를 잡고 나가려는 순간, 윤도의 목소리가 단정하게 작렬했다.
“스떼빤.”
“......?”
스떼빤이 돌아보았다.
“방금 당신 목숨을 구해줬더라면 TS와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만약 당신 여자친구라면 어떻습니까?”
“내 여자친구?”
“죄송하지만 두 분, 결혼하실 건가요?”
“그래요. 두 달 후로 날짜를 잡았습니다만...”
“그렇다면 다시 묻죠. 당신 여자친구의 목숨을 구해주면 TS와 파트너 계약을 할 수 있습니까?”
되묻는 윤도의 목소리에는 빈틈이 없었다.
목숨.
스떼빤도 아니고 그의 여자친구 뤄샤오이. 그러나 진맥 한 번 안 해본 윤도. 그럼에도 윤도의 화살은 거침없이 시위를 떠나 있었다.
글로벌 인재의 거궐혈에 장침을 꽂아라-2
글로벌 인재의 거궐혈에 장침을 꽂아라-2
“닥터!”
스떼빤의 시선이 윤도를 겨누었다. 호감일색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각이 제대로 선 눈빛이었다.
“당신의 그 말은 내 여자친구에게 심각한 질병이 있다는 겁니까?”
스떼빤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뭐든 뚫어버릴 기세였다.
“그렇습니다.”
윤도는 주저없이 답을 내놓았다.
“이봐요, 닥터!"
이번에는 뤄샤오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로서도 황당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닥터, 내 질병을 고쳐준 건 고맙지만 방금 한 말은 도를 넘었습니다.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물론이죠.”
윤도는 스떼빤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스떼빤과 윤도의 시선 충돌. 실내 공기는 숨 막힐 지경이었다. 곤란한 건 김 전무였다. 폭주하는 윤도. 방향이 살짝 비껴갔다. 그러나 허튼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마디 언질도 없었다. 김 전무는 마른 침을 넘겼다. 그것 외에는 달리 취할 액션이 없었다.
“자, 그럼 말을 해보시죠.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건지?”
“폐입니다.”
“폐라면 Lung?”
“예!
“푸하하핫!”
윤도 말을 들은 스떼빤이 웃어제꼈다.
“Make a mountain out of a molehill.”
스떼빤이 힘주어 말했다. 영어로 말하는 ‘침소봉대’였다.
“우리 뤄샤오이가 기침 하는 걸 보고 오버하는 모양인데 뤄샤오이는 지금 감기에 걸려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뭐...”
“지푸라기는 당신이 잡아야합니다. 내 말을 무시하면 당신 여자친구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천국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요.”
“뭐라고?”
스떼빤이 핏대를 올렸다. 두 사람이 격앙되자 김 전무가 나서 막아섰다.
“진정하세요, 스떼빤. 우리 닥터 채는 허튼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근하게 이야기를 듣는 게...”
“그만 두세요. 이게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할 말입니까? TS에 실망했습니다.”
스떼빤이 김 전무에게 항의를 퍼부었다.
“결혼을 앞두었으니 드리는 말입니다. 당신 여자친구는 지금 폐의 진기가 다했습니다.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결혼식 올리기 전에 죽어요.”
윤도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폐의 진기가 다해?”
“손을 주시죠. 진맥을 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윤도가 뤄샤오이를 바라보았다.
“됐어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진료 받지 않아요.”뤄샤오이가 단칼에 잘랐다.
“받아야합니다. 당신의 왼뺨이 형편 없잖아요. 오른뺨이 그렇다면 간이 나쁜 신호지만 왼뺨은 폐에 속합니다. 폐가 나쁘다는 신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왔습니다. 당신의 말라버린 뺨이 말을 하고 있어요. 거기다 건조의 극에 달한 털, 입술에 번지는 염증, 아마 손발톱도 건조하기 그지없을 겁니다. 그 모든 게 폐의 진기가 바닥이라는 반증이니 내 말이 미덥지 않으면 중국의 당신 외삼촌에게 전화해 보십시오. 가급적이면 화상전화를 권합니다.”
“이봐요.”
“당신은 감기가 아닙니다. 감기는 그냥 우연히 겹친 병입니다. 그러니...”
“......”
“스떼빤, 아까 한 말은 그냥 해본 말입니다. 당신이 TS와 파트너가 되든 말든 그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나한테 진료를 안 받아도 상관없으니까 확인만 해보란 말입니다. 아마 소변 보는 데도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목소리도 원래는 이렇지 갈라지지 않았겠죠? 내 말이 틀렸습니까?”
윤도의 주장이 스떼빤을 향했다. 스떼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때도 감기 직후였다. 감기 때문인 줄만 알았다.
“뤄샤오이.”
스떼빤이 여자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지못해 전화기를 꺼냈다. 중국에 국제전화를 걸었다. 중의가 전화를 받았다. 화상을 통해 뤄샤오이를 본 그가 진단을 내놓았다.
“요즘 피곤하다더니 그래서 그런 거야. 폐의 진기가 끊어지다니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
중국말을 알아들은 윤도의 뇌리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윤도가 통화하고 싶었지만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이제 가도 됩니까?”
스떼빤이 윤도를 노려보았다. 경멸이 가득 찬 눈빛이었다.
“스떼빤.”
김 전무가 그를 달래고 나섰다.
“오늘 초청은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모양이 좋지 않군요. 다만 제 똥꼬와 손을 고쳐주었으니 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스떼빤이 김 전무를 돌려세웠다. 김 전무는 더 이상 대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