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65)

오른쪽 폐에 대한 조치도 같았다. 작은 암 덩어리부터 해치운 윤도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간 덩어리에서 막혔다. 침이 들어가지 않고 휘어버린 것. 다행히 침끝은 돌았다. 살살 암 덩어리를 어르다 한순간에 핵을 뚫어버렸다. 나머지는 거칠 것이 없었다. 마지막 혈괴도 약침 앞에 녹기 시작했다. 덩어리가 큰 혈괴라 시간은 좀 걸렸다. 하지만 침을 감아 속도를 더하자 융해 속도가 빨라졌다.

“닥터.”

윤도가 복도로 나오자 스떼빤이 달려왔다.

“시침이 끝났습니다.”

“뤄샤오이는 괜찮은 겁니까?”

“궁금하면 봐도 됩니다.”

윤도가 문을 가리켰다. 스떼빤이 문을 살짝 열었다.

“......!”

그의 눈은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뤄샤오이의 가슴팍에 꽂힌 침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하나의 은빛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약침을 넣었습니다. 뤄샤오이의 암세포를 녹이는 중입니다.”

“뤄샤오이...”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마취침을 찔러 주었으니 한잠 푹 자고 일어날 겁니다.”

윤도는 진료실로 돌아와 손을 씻었다. 수건은 김 전무가 건네주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달려온 그였다.

“잘 되고 있나?”

김 전무가 물었다.

“첫 시침은 끝났습니다. 첫 치료가 전체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니 두고 보면 알겠지요.”“치료비 말일세. 그건 회사에서 부담하겠네.”

“왜죠?”

윤도가 물었다. 조금 전과 달리 반듯하게 세워진 시선이었다.

“꼭 스카우트해야 하는 두뇌일세. 호감을 사기 위해서라도...”

“전무님.”

“응?”

“제가 녹내장 치료를 잘못한 모양이군요?”

“무슨 말인가? 눈은 잘 보이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긴 제 한의원인데 한의사도 아닌 전무님이 진료비를 거론하시니 회사로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

윤도의 말에 김 전무의 피가 굳어버렸다. 그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제 잘 보이십니까?”

“채 실장...”

“저는 지금 의술을 펼치고 있지 스카우트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다만 우리나라에 필요한 두뇌라니 중국에 뺏기지 않도록 협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의술로써입니다.”

“......”

“그럼...”

윤도가 돌아섰다. 휘청 흔들린 김 전무가 뒷골을 짚었다. 차차세대를 기약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두뇌. 그 현안을 앞두고 마음이 급했다. 그렇기에 돌직구를 얻어맞고야 정신줄이 서는 김 전무였다.

‘채 실장... 역시 한 분야의 대가는 다르군. 또 한 수 배웠어.’

벽에 기대선 김 전무 입에서 한숨이 밀려나왔다.

“아저씨...”

약제실로 온 윤도가 진경태를 불렀다. 뤄샤오이에게 필요한 탕약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윤도가 다시 침구실의 뤄샤오이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침을 만져보았다. 혈괴와 암 덩어리들의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천천히 침을 뽑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침을 잡았을 때였다. 돌연 눈을 뜬 뤄샤오이가 울컥 경련을 했다.

“우에어!”

뤄샤오이가 뭔가를 토해냈다.

“우에에!”

이번에는 더 큰 몸부림이 뒤따랐다.

“우엑, 우억!”

그녀의 입이 열릴 때마다 핏물이 넘어왔다. 혈괴가 녹아난 핏덩이들이었다.

“닥터, 무슨 일입니까? 문제 없는 겁니까?”

문 밖에서 스떼빤의 소리가 들려왔다.

“치료 중입니다. 문제 없습니다.”

윤도는 차분했다.

“우어억!”

그 순간에도 뤄샤오이의 입과 코에서는 녹아난 혈괴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하아...”

뤄샤오이가 늘어졌을 때 핏덩이는 침대와 상체를 붉게 적신 후였다. 승주가 달려들어 핏덩이를 수습하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뤄샤오이의 몸까지 피로 물들고 말았다.

“견딜만한가요?”

윤도가 뤄샤오이를 바라보며 진맥을 했다. 폐에 그득하던 무거움은 가벼워져 있었다.

“기운은 하나도 없는데 몸은 가벼워요.”

“폐 안의 암 덩어리를 녹여내서 그렇습니다. 침을 몇 개 더 넣겠습니다. 찌꺼기가 남았네요.”

“네... 하아, 하아...”

그녀가 쉰 소리를 밀어냈다.

윤도의 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삼리와 천종혈, 전중혈을 잡았다. 종기에 대한 마무리 제압이었다. 합곡과 삼음교도 빼놓지 않았다. 몸에 남은 잉여물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혈자리의 침은 여전히 두 개 한 쌍이었다. 부혈을 누르고 진혈을 잡는 것이다.

“어떠세요?”

발침을 하며 뤄샤오이에게 물었다.

“이제는 머리도 가벼워요.”

“한 잠 더 자세요. 잠이 깨면 최종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윤도는 침으로 그녀의 숙면을 도왔다.

“......!”

원장실에서 눈을 붙이던 윤도가 잠에서 깨었다. 노랫소래 때문이었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지만 노래가 분명했다. 복도로 나오자 승주가 보였다.

“아직 안 들어갔어?”

윤도가 물었다. 집에 가서 쉬었다가 오라고 지시했던 윤도. 하지만 승주는 윤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간만에 나이트 한 번 하는 것도 새로운 데요?”승주가 웃었다.

“노랫소리는 어디서?”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승주가 침구실을 가리켰다. 뤄샤오이가 누워있는 그 침구실이었다.

“뤄샤오이?”

“그 남자 분이 곁에서 노래를 틀고 있어요. 환자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

정나현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윤도가 문을 살짝 열었다. 정말 그랬다. 스떼빤, 뤄샤오이 옆에 붙어 앉아 머릿결을 고르며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아주 낮음 볼륨에 아주 감미로운 음악이었다.

“닥터?”

윤도를 본 스떼빤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음악을 들려주었나요?”

“미안합니다. 뤄샤오이가 좋아하는 노래라서 힘이 될까하고...”“피곤할 텐데...”

“괜찮습니다. 뤄샤오이가 완치될 수 있다면 몇 날 며칠을 못 자더라도... 실은 프로그램 개발하다 보면 며칠씩 못 자는 건 별 것도 아니거든요.”

“뤄샤오이를 정말 좋아하는군요?”

“내 가능성을 끄집어내준 여자죠. 저는 이 생에서는 이 여자만 좋아할 겁니다.”

“가능성?”

“고백하자면 사실 저는 거의 쓰레기 인간이었거든요. 뤄샤오이를 만나기 전에는...”

스떼빤이 웃었다. 웃는 얼굴 뒤로 티슈와 물수건이 보였다. 모두 핏물과 땀이 묻었다. 스떼빤... 밤 새워 뤄샤오이의 얼굴을 닦아준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혈괴를 토한 핏물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능력자라면 꼭 완치 시켜야겠네요.”

“부탁합니다.”

“그럼 무엇을 하셔야할 지도 아시겠죠?”

“네, 나가 있겠습니다.”

음악이 끝나자 스떼빤은 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윤도가 다시 진맥을 잡았다. 맥은 한결 더 나아졌다. 하지만 폐포의 사기가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잔재가 더 있었어.’

진맥을 통해 흔적을 찾아냈다. 그렇게 치밀했지만 다 녹지 않은 혈괴들이 있었다. 큰 혈괴 뒤에 있었던 작은 놈들이다. 차분하게 장침을 넣었다. 왼쪽 폐에 네 개, 오른쪽에 두 개였다.

박멸.

윤도의 의도는 하나였다.

톡, 토독.

그녀에게 들어간 침을 전부 뽑았다. 그녀는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심한 토악질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목으로 넘어온 약간의 핏물이 전부였다. 다시 진맥을 하니 이제는 사기가 보이지 않았다. 뤄샤오이의 폐암에 대한 배수진 공략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잠깐!”

핏물을 닦으려는 승주를 윤도가 말렸다.

“그냥 두고 남자 분 들어오라고 해줘.”

“네.”

눈치를 차린 승주가 복도로 나갔다. 윤도도 자리를 비켰다.

“뤄샤오이...”

스떼빤이 다가앉아 입가에 흐른 핏물을 닦기 시작했다. 스떼빤에게 기회를 준 윤도였다.

“스떼빤...”

“안 죽고 살아줘서 고마워.”

“나도 노래 고마웠어.”

“노래 들었어?”

“응... 아련하게... 그 노래 스떼빤이 틀었지?”

“응.”

“자기가 선견지명이네.”

“뭐가?”

“TS 강연간다기에 내가 반대했었잖아? 그런데 여기 안 왔으면 저 한의사 선생님 못 만났을 거 아냐.”

“그렇네.”

“역시 자기를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니까.”

“나도.”

딸깍!

두 사람이 손을 잡을 때 윤도가 들어왔다.

“닥터 채.”

스떼빤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뤄샤오이의 상태를 묻는 거라면 아주 좋습니다. 한 달 후에 침을 한 번 더 맞고 탕약으로 폐와 신장을 보하면 잘 될 걸로 봅니다.”

“치료비는 얼마를 내야합니까?”

“정 실장님.”

윤도가 출근한 정나현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진료비 정산표를 건네주었다. 받아든 스떼빤의 표정이 굳었다. 진료비 청구가 너무나 평범했던 것이다.

“닥터 채.”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치료비가 너무 적습니다. 이건...”

“한국의 의료법에 의한 계산입니다만.”

“그보다 혹시... 닥터 채도 TS전자의 사람이라서?”

“무슨 뜻이죠?”

“TS는 저를 스카우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죠. 그러니 이 일로 호감을 사서 제 마음을 돌리려는 거라면...”

“그건 몹시 기분 나쁜 말씀이군요.”

윤도 목소리에 날이 섰다. 날선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뭘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내가 구한 건 뤄샤오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

“TS가 원하는 게 뤄샤오이입니까? 그건 아닌 것으로 압니다만.”

“......”

“게다가 스카우트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아픈 사람을 치료할 뿐입니다. 그러니 괜한 억측은 접으시고 잘 들어주십시오. 당신의 여자 뤄샤오이... 앞으로 적어도 1년 간은 저에게 사후관리를 받으셔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발의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

“한 달에 한 번씩 들리십시오. 혹시라도 남은 암세포가 있으면 침으로 녹이고 탕제의 처방을 몸 상태에 맞도록 바꿔 가야합니다.”

“......”

“질문 있습니까?”

윤도가 스떼빤과 뤄샤오이를 바라보았다. 윤도의 눈빛은 다정함이 사라진 의사의 사무적인 눈의 전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스떼빤은 아차 싶었다.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렸다는 것. 그제서야 깨달았다. 뤄샤오이의 치료는 끝이 아니었다. 그들 말로 하자면 ‘사후관리’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칼자루는 윤도 손에 있었다.

“탕약이 나왔을 테니 받아서 가시기 바랍니다. 며칠 동안은 절대 안정하시고 언제라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 전화 하시고요.”

윤도가 돌아섰다.

“뤄샤오이.”

스떼빤이 뤄샤오이를 바라보았다.

“스떼빤...”

“이건 내 생각인데...”

“내 생각도 그래.”

“무슨 생각인 줄 알아?”

“TS전자...”

“고마워. 잠깐만 기다려줘.”

뤄샤오이의 손을 잡은 스떼빤이 복도로 나왔다. 그는 뒷마당의 김 전무를 향해 걸었다.

“스떼빤.”

이 회장과 통화를 하던 김 전무가 돌아보았다.

“나를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했었죠?”

“그야 당연하지요.”

“아직도 유효합니까?”

“물론입니다.”

대답하는 김 전무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험으로 보아 이건 좋은 일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스떼빤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흘러들었다.

“TS가 제시한 스카우트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채 실장...’

김 전무의 뇌리에 윤도 얼굴과 목소리가 벼락처럼 스쳐갔다.

<우리나라에 필요한 두뇌라니 중국에 뺏기지 않도록 협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의술로써입니다.>

의술...

그 승부수가 먹혔다. 머리 좋은 스떼빤에게 의술 프라이드로 승부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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