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여자친구를 살릴 수 있는 건 나야.>
윤도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결했다. 머리 좋은 스떼빤은 알았다. 뤄샤오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 한의사 곁에 있어야한다는 걸. 그러자면 한국의 TS에 있는 게 최상이었다.
스떼빤의 자발적인 결정. 치료비 몇 푼 지원하며 마음을 사려던 김 전무와 차원이 다른 공략이었다.
거궐혈...
그걸 찌른 것이다. 스떼빤이 아니라 그 심장에 연결된 또 하나의 거궐혈, 뤄샤오이. 그 명혈이 가져온 쾌거였다.
‘과연...’
김 전무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스떼빤은 그 박수가 자신을 위한 것으로 알았다. 그렇기에 손을 내밀어 김 전무와 악수를 했다. 하지만 김 전무의 박수는 윤도를 위한 것이었다. 스떼빤의 어깨 뒤 저만치에 윤도가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채윤도...
밤을 건너온 그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새로 시력을 찾은 눈이라 더 눈부시기만 했다.
통 큰 보너스.
통 큰 보너스.
그날 오후, 스떼빤은 TS전자에 입사 서명을 했다. 그의 입사에는 부사장과 김 전무가 자리를 함께 했다. 국내외 언론들도 취재에 열을 올렸다.
<향후 10년을 보장 받다.>
<글로벌인재들 TS 유턴 가속화될 듯.>
>인재 블랙홀 중국의 독주를 막다.>
언론의 몇 가지 타이틀에서 보이듯 스떼빤의 입사는 글로벌 인재 유입 도미노를 낳았다. 많은 인재들이 그의 뒤를 따른 것이다. 그가 TS에 입사한 한, 향후의 AI와 IT 시장 역시 TS가 주도하리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인재가 국가를 먹여 살린다.>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채 실장.”
그날 저녁 윤도는 이 회장의 환대를 받았다. 중역회의실이었다. 부사장 둘과 김 전무에 더해 상무이사 셋까지 배석한 자리였다. 이진웅의 요청으로 응하게 된 강연에 앞선 미팅이었다.
“고맙네.”
이 회장이 윤도 손을 잡았다.
“회사에 기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윤도가 웃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채 실장은 잘 모를 걸세. 스떼빤이 중국의 경쟁사로 갔더라면 향후 20년 계획을 다시 짜야할 판이었네.”
이 회장은 굉장히 고무되어 있었다.
“회장님의 인복입니다.”
“아닐세. 채 실장의 출중한 의술이 없었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스떼빤의 마음을 잡았겠는가? 그가 우리 TS로 마음을 돌린 건 오로지 채 실장 덕분이었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김 전무, 마무리를 하시게.”
‘마무리?’
윤도가 김 전무를 돌아보았다. 김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회장님 이하 존경하는 중역 여러분.”
김 전무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이번 스떼빤 건의 과실은 저도 슬쩍 따먹은 셈임을 고백하고자합니다.”
“과실을 김 전무가 따먹어?”
부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스떼빤의 스카웃이 비단 제 소관이라서가 아닙니다. 실은 채 실장, 스떼빤에게만 의술을 보여준 게 아니었습니다.”
“김 전무?”
“이거... 제 진단서입니다.”
김 전무가 진단서 사본을 돌렸다. 한 쪽 눈의 실명 가까운 판정 진단서였다.
“......?”
이 회장부터 소스라쳤다.
실명(失明).
그러나 그 어느 중역도 몰랐던 일...
“제 실명은 선은 넘은 상태였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누구도 몰랐을 겁니다. 정기 신검 때마다 지인 의사의 병원을 찾아가 비밀로 해달라고 청탁을 했으니까요.”
“김 전무...”
이 회장의 시선이 복잡하게 변했다. 자신의 최측근이자 TS의 심장으로 상징되는 김 전무였다. 그런데도 감쪽 같이 몰랐던 이 회장. 무심함에 대한 미안함이 겹치며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물론 제 불찰입니다. 진짜 프로라면 몸을 잘 관리해야했거늘 이런 저런 이유로 소홀하다가 된서리를 맞은 거니까요. 해서 실은 낙향해 텃밭이나 가꿀까하고 퇴사 시기를 엿보고 있던 차였는데 이번에 채 실장 덕분에 짤릴 신세를 면했습니다.”
“못난 사람, 고칠 생각을 안 하고 회사 떠날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죄송하지만 눈이라는 게 한 번 어두워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허어.”
“해서 이 자리를 빌어 커밍아웃을 하고, 제 눈에 시력을 되찾아준 채 실장에게 감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김 전무의 시선이 윤도를 향했다. 윤도는 끄덕 정중한 고갯짓으로 칭찬을 받았다.
“어떻습니까? 회장님. 저 이제 안 짤려도 되는 거죠?”
“예끼, 이 사람. 괘씸해서라도 짤라야겠네. 그 주머니에 사표 들었걸랑 당장 제출하시게.”
이 회장이 김 전무의 조크에 장단을 맞추자 일동이 함께 웃었다.
“그럼 사표는 면한 것으로 하고 계속 하겠습니다. 스떼빤 스카우트는 주지하다시피 우리 TS 사운이 걸린 일의 하나였습니다. 여기 송 이사가 전면에 나서 총력전을 펼쳤지만 실패 직전이었습니다. 중국의 배팅이 너무 큰 까닭에 우리에게 절대 불리했으니까요. 그 극적 반전을 이루어낸 게 여기 채 실장이죠.”
김 전무의 손이 윤도를 가리켰다.
짝짝!
가벼운 박수가 나왔다.
“지난번 중국의 허가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저는 채 실장에게 한 수를 배웠습니다. 정도 말입니다. 오직 정도로써 승부수를 띄우는 채 실장의 모습은 제 안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
“처음에는 다소 서운했지만 우리 TS의 경영이념과 딱 맞은 신념이라는 생각이 들자 전율이 오더군요. 희망은 그때부터 싹이 텄습니다.”
“......”
윤도는 계속 경청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번 스떼빤 스카웃 프로젝트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지사의 보고를 보자니 중국 쪽은 패닉에 빠졌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던 모양인 눈치였습니다. 해서 마무리를 짓자면 이 프로젝트의 예산이 40억원이었는데 몇 억을 제외하고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본시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으나 정작 그 목적을 이루게 한 사람에게는 예산을 배정하지 못했지요. 해서 남은 예산은 채 실장에게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회장님의 재가를 바랍니다.”
“......!”
듣고 있던 윤도가 벼락처럼 고개를 들었다. 듣자니 40여억 원에 가까운 돈을 윤도에게 주자는 거였다.
“전무님.”
윤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연하자면 세계적인 인재 스카웃 에이전시가 있는데 그들의 성공보수 요구액은 500만불이었네. 채 선생에게 40억을 주어도 우린 약 11억 이익이지.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해주었으면 하는데 미안하지만 여기는 한의원이 아니라 경영의사를 결정하는 자리라네.”
김 전무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의원에서 윤도가 한 행동을 상기 시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갑이야.>
김 전무의 애정 어린 반격이었다.
“그건 썩 내키지 않는군.”
집중하던 이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
재가를 확신하던 김 전무의 미간이 구겨졌다.
“채 실장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돈에 꽂힌 의사가 아니거든. 그러니 현금으로 주면 받을 리가 없어요. 또 기부를 할지 모르니 주식으로 대체하는 게 어떨까?”
“회장님!”
“뭐 안 받는다고 하면 아예 동전으로 바꿔놓았다가 강연 끝나고 나오시면 차에다 실어드리시게나.”
이 회장이 쐐기를 박았다. 미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무님, 이건...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미팅이 끝나자 윤도가 볼멘소리를 냈다. 이 회장과 부사장단이 먼저 나간 후였다.
“그럼 나는 동전으로 40억을 바꿔서 한의원 진료실에 부어놓을 걸세.”
“전무님.”
“아무 소리 말고 받으시게. 채 실장은 우리 TS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애국한 거야. 이건 솔직히 정부 지원까지도 받고 있던 일이라네.”
“예?”
“그만큼 국가적인 대사였다는 것이네. 스떼빤 한 사람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고용효과를 낼 수 있으니까.”
“......”
“그러니 회장님 뜻에 따라주시게. 솔직히 회사도 낯짝이 있지. 채 실장이 이뤄놓은 과실을 달랑 따먹기만 할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인데... 주식 팔아서 기부하지는 마시기 마라네. 기부는 아름답지만 좀 더 높은 꿈을 이룬 후에 해도 늦지 않아. 참고로 빌 게이츠도 채 실장 나이에는 기부광이 아니었다네.”
“......”
“가세. 강연시간이네. 아, 그리고 강연 후에 회장님이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시는군. 나도 모처럼 두 눈 뜨고 만찬 한 번 즐기게 되었네. 그동안 젓가락질 초점이 잘 안 맞아서 먹는 게 먹는 게 아니었거든.”
김 전무가 윤도 등을 밀었다.
“채 실장님.”
복도로 나오니 이진웅이 인사를 해왔다. 강연은 그가 주관하는 까닭이었다.
짝짝짝!
강당에 들어서자 TS의 임직원들이 기립박수를 쳐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웬만한 강사가 와도 참석하지 않던 이 회장까지 참석한 것이다. 그렇기에 부사장단과 임원들도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 TS는 세계 기업사에 남을만한 역사를 썼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스떼빤이라는 세계 최고의 인재를 품에 안은 겁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이진웅이 입구를 가리켰다. 거기 스떼빤이 등장하고 있었다. 스떼빤은 강단으로 올라와 윤도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존경하는 임직원 여러분, 세계 최고의 기업 TS에서 일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결정의 발단은 닥터 채윤도였습니다. 그의 강연이라기에 기꺼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와아아!”
스떼빤의 인사가 끝나자 임직원들이 일대 환호를 했다.
“채윤도입니다.”
이제 윤도가 마이크를 잡았다. 실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숙하게 변했다. 윤도가 가만히 강당을 바라보았다.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강연장은 대만원이었다. 많은 좌석으로 모자라 통로 쪽의 복도에도 직원들이 빼곡히 서있었다. 이진웅의 말로는 창사 이래 최고의 호응이라고 했다.
강연...
그것도 세계적 기업인 TS의 두뇌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
예전이라면 그 중압감만으로도 주저앉았을 일이었다. 그렇기에 살짝 부담도 되었던 윤도였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막상 자리에 서니 담담했다.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제가 한의사가 된 것은...”
마침내 윤도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꾸미지 않았다. 처음, 한의대생으로 실습을 나가 버벅거리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임직원들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차츰 중증 질환과 암치료 등으로 깊어가자 실내는 열기로 가득 차 버렸다.
<여객선 침몰의 심장마비 사건.>
<광희한방대학병원에서의 암 치료 도전기.>
<무대뽀 진격으로 이루어낸 신약개발과 바이마크사 계약건.>
<국민영웅 손석구의 실명된 두 눈 치료.>
<나아가 스떼빤의 여자친구 폐암치료.>
윤도는 쉬지 않고 달렸다. 하나의 보탬과 과장도 없었다. 시침을 하는 동안 무수히 좌절하고 갈등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개선해 나간 침술비기, 매 순간마다 환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환의일체(患醫一體)를 이루려고 한 일침즉쾌의 신념을 가득 펼쳐보였다.
하나의 장침으로 안 되면 두 개.
두 개가 아니면 세 개.
장침만으로 안 되면 망침.
망침으로도 안 되면 약침.
불굴의 과정이 소탈하게 전개되었다.
짝짝짝!
강연이 끝나자 강연장은 박수의 바다를 이루었다. 이번 시작은 직원들이었다. 특히 젊은 직원들이었다. 그들의 박수가 뜨거워지고서야 이 회장이 일어났다. 그 역시 기립박수였다.
사실 이 회장은 내내 박수를 참고 있었다. 먼저 박수를 치면 직원들의 반응을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강연은 임직원을 위한 것. 그렇기에 이 회장은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았다.
“회장님.”
벅찬 가슴의 김 전무가 이 회장을 바라보았다.
끄덕!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감의 표시였다.
세계 최고의 두뇌 스떼빤.
오늘 이 회장이 만난 세계 최고는 스떼빤만이 아니었다.
이미 의술의 일가를 이룬 윤도.
그럼에도 쉬임없이 진격하는 채윤도. 이 박수는 그 진취성에 보내는 응원이었다.
일본 방사능피폭 비밀 프로젝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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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윤도는 뤄샤오이를 진료했다. 그녀의 폐는 이제 평온해지고 있었다. 함께 온 스떼빤이 소식 하나를 전해왔다.
“뤄샤오이도 TS에서 함께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닥터 채가 일해도 좋다는 오케이 사인을 내리는 날부터요.”
“흐음, 그럼 발령을 제가 결정하는 겁니까?”
윤도가 웃었다.
“김 전무님도 허락을 하시더군요. 앞으로 전자결재는 닥터 채에게 연결해두어야겠습니다.”
“그럼 일이 효율적이지 않을 텐데요? 저는 아날로그형이라 침 놓는데 바빠서 전자결재 잘 안 하거든요.”
“뭐 그렇다면 제가 결재판을 들고 오도록 하죠.”
스떼빤도 웃었다. 그는 이제 누구보다 윤도에게 호의적이었다.
“닥터 채.”
듣고 있던 뤄샤오이도 대화에 끼었다.
“말씀하세요.”
“중국의 저희 외삼촌... 닥터 채를 보고 싶어죽겠대요. 제가 보낸 진료자료를 보고 뻑 갔다네요. 신비한 한국의 침술을 배우고 싶다고...”
“아직은 그럴만한 그릇이 못 된다고 전해주세요.”
“아니에요. 제 MRI하고 영상자료도 다 보내드렸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닥터 채 옆에서 떨어질 생각말라고 하더라고요. 제 목숨을 좌지우지할 사람은 염라대왕이 아니라 닥터 채라고...”
“아무튼 잘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 외삼촌 초대는요? 이거 농담이 아니거든요.”
“뭐 같은 한의사로서 교류를 하는 건 찬성합니다. 보여드릴 건 없지만 언제든 모셔오세요.”
“와우, 고맙습니다. 닥터 채.”
“원장님!”
대화하는 사이에 승주의 인터폰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