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요.”
“손님이 오셨어요.”
“아, 알겠습니다.”
윤도가 인터폰을 끄자 눈치를 차린 스떼빤과 뤄샤오이가 일어섰다.
“이거...”
가방을 챙긴 뤄샤오이가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영문과 중문, 한글로 된 청첩장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결혼장소도 바꾸었어요. 결혼식을 한국에서 올릴 예정인데 닥터 채, 꼭 와주실 거죠?”
“가야죠. 두 분의 초대라면...”
윤도의 대답은 기꺼웠다.
두 사람이 나가고 치매 환자를 받았다.
치매...
윤도의 두 번째 신약 목표였다. 그렇기에 학문적인 접근도 함께 하고 있었다. 논문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이미 광희한방대학병원과 SS병원의 협력도 약속이 되었다. 나아가 SS병원 이철중의 배려로 SS병원과 쌍벽을 이루는 JJ병원의 신경정신과 협력도 내락이 된 상태였다. 그들로서도 손해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목표.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또 하나의 목표가 생기자 일이 더 즐거워진 윤도였다.
진맥과 혈자리, 약침의 반응 과정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치료 전후의 뇌영상과 호르몬 변화도 함께 추적하기 시작했다. 윤도에게도 공부가 되니 더 좋았다.
치매 환자 시침이 끝나자 승주가 들어왔다.
“손님 오셨다면서?”
“그런데...”
“왜? 문제가 있어?”
“그게 아니라... 환자가 아니고 일본사람들이에요.”
“일본사람?”
“들여보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그냥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실은 온지 두 시간도 넘었어요. 진료가 바쁘면 퇴근 때까지라도 기다리겠다고 하는데 한국말을 잘 해요.”
“들어오게 해.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면 만나는 봐야지.”
윤도의 지시가 떨어졌다. 원장실에 들어선 사람은 30대의 남자와 여자, 와타루와 치모모였다. 둘은 알이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승주 말대로 환자가 아니라 공무원이나 기관원 각이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윤도가 물었다.
“채윤도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는 일본정부의 요청을 전하러 왔습니다.”
와타루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일본정부의 요청?’
느닷없는 말에 윤도의 시선이 솟구쳤다.
일본정부...
그 말이 윤도 귓전을 울렸다.
“일본정부가 무슨 일로?”
윤도가 눈빛을 세웠다.
“미나토 씨를 기억하시는 지요?”
미나토...
미우의 할아버지 이름이 나왔다.
“압니다만.”
“그 분의 피부암을 치료하셨죠?”
“예.”
“일본으로 돌아오신 미나토 선생께서 일본 칸치병원에서 피부암 검사를 받았습니다. 기적에 가까운 회복을 일본의료진이 확인했습니다.”
“......”
“해서 일본 보건성을 위시한 대책기구에서 긴급 회의를 연 바, 채윤도 선생님을 본국으로 모셔 항암 침술을 부탁하고자 저희를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항암 침술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럼 일단 선글라스부터 벗는 게 예의 아닐까요?”
“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선글라스를 거두었다.
“당신들은 어느 부처 소속이죠?”
“여기 저희 신분증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신분증을 꺼내놓았다.
“이거 카피를 해도 확인을 좀 해야 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장은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건 또 왜죠?”
윤도가 눈빛을 세웠다.
“왜냐하면 성급한 기사가 앞서 나가면 계획에 차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혹시 혼선이라도 생기면 환자들에게 절망이 될 수 있고...”
“환자들?”
“이야기가 좀 긴데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와타루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윤도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오늘 예약한 환자가 셋이나 남았다. 더구나 이들의 신분도 확인해야했다. 일본 정부에서 왔고,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지만 워낙 사기꾼이 많은 세상이었다. 자칫하면 이상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예약환자가 있습니다. 괜찮으면 진료시간 후에 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두 일본인은 정중한 인사를 마치고 나갔다.
‘일본 정부?’
윤도가 둘의 신분증을 바라보았다. 한문을 잘 아니 대충 읽을 수 있지만 일본어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려면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할까? 궁리 속에 떠오른 사람은 용천규였다. 미안하지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어진 환자는 지독한 좌골신경통 환자였다. 진통제를 먹어도 왼쪽 다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통증을 가진 환자. 더구나 나이도 젊었다. 오랜 날을 시달리면서 몸은 야윌 대로 야위었다. 그는 침구실 침대 위에도 간신히 누웠다. 하지만 장침 세 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윤도의 선책은 환조혈과 풍시혈이었다. 풍시혈은 아문혈처럼 주의를 요한다. 그 또한 자칫하면 연수를 찌를 수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윤도의 신침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통증이 남자 신문혈을 찔렀다. 진맥에 잡힌 이상(異狀) 혈자리의 하나였다.
“아흐!”
침을 뽑자 청년이 한숨을 토했다.
“어때요?”
“하나도... 하나도 안 아파요.”
침대에서 내려선 청년이 다리를 딛으며 대답했다.
“탕약 받아가서 잘 복용하세요. 몸이 젊으니까 탕약만 잘 맞춰 먹으면 다시 재발하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청년은 침구실이 떠나가라 인사를 하고 나갔다.
“......!”
원장실로 옮겨와 전화를 받은 윤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천규의 전화였다.
“정부부처는 부처인데 특별위원회 소속이라고요?”
“그렇네. 외교부까지 체크하면서 알아봤는데 원래는 내각총리실 소속 직원들, 지금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특별위원회 소속이더군.”
“신분은 확실하다는 말씀이군요?”
“뭐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진료를 의뢰하러 왔다고?”
“그렇다고 하는데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럼 방사능 문제일 가능성이 크겠어.”
‘방사능?’
“그들이 속한 위원회가 후쿠시마 원전피해자 관리를 맡고 있더군. 채 선생 침술과 매칭해 보니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 치료를 부탁하려는 게 아닐까싶네만...”
“얼핏 항암이라는 단어는 들었습니다만.”
“아무튼 이제 국제적 명의로 등극하셨구만.”
“별 말씀을...”
“아, 우리 지검장님이 그러시는데 언제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으시다더군.”
“아들은 어떤가요?”
“치료효과가 100%라고 하시네. 요즘 살맛난다고 칼퇴근이셔.”
“다행이군요. 신분조회 감사합니다.”
윤도가 전화를 끊었다. 두 일본인은 일단 수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녁 무렵, 윤도는 다시 와타루와 치모모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진료를 끝내고 평안한 상태였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일본인은 여전히 깍듯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건 돌려드립니다. 두 분이 일본정부에서 일하는 거 틀림이 없더군요.”
윤도가 신분증 사본을 건네주었다.
“채 선생님.”
와타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꾸벅 허리를 접더니 말문을 이었다.
“지금 우리 정부는 미나토 선생의 회복에 엄청난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의 요청을 받아주십시오.”
“이제 바쁘지 않으니 천천히 말씀해 보시지요.”
“사안은 미나토 선생과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일본은 아직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누출로 신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미나토 선생처럼 중증 암 환자도...”
“......”
“그 분들은 일본 의료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환자들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접고 목숨 다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번 쾌거로 그들에게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며칠만 시간을 내주셔서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셨으면 하는 요청을 드리러 급거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암 환자들인가요?”
“대개는 그렇습니다.”
“몇 명이나 되죠?”
“......”
윤도의 질문에 와타루가 주춤거렸다. 뭔가 사연이 있는 눈치였다.
“저는 한의사입니다. 제 진료와 치료가 필요하다면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윤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일본인은 잠시 생각 끝에 말을 이었다.
“사실 채 선생님의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을 다 부탁할 수 없기에 우리 정부에서 우선 순위를 매겨 몇 분 선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선생님의 진료허락을 전제로 합니다만.”
“그 우선 순위의 환자가 몇 사람입니까?”
“여섯 사람입니다.”
“여섯 명...”
“부탁합니다. 미나토 선생처럼 우리 정부가 꼭 살려야 할 인재들입니다.”
“부탁합니다.”
와타루에 이어 치모모도 윤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십니까?”
놀란 윤도가 둘을 말렸다.
“저희는 일본을 떠날 때부터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채 선생님을 모셔오지 못하면 한국에서 망부석이라도 되라는...”
“......”
“이렇게 부탁합니다. 치료비는 원하시는 대로 지불될 겁니다. 한 사람당 일억엔을 달라고 해도 지불하겠습니다. 그 이상이라고 해도 가능합니다.”
일억엔.
약 10억이다.
“환자도 보지 않고 치료비를 논하지는 않습니다.”
윤도가 선을 그었다. “
선생님의 고명한 의술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실례했습니다.”
“환자들 자료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여기... 개별 진단서와 치료일지, 그리고 최근 사진입니다.”
“최근 사진만 주세요.”
윤도가 정리를 했다. 와타루가 PDA를 열었다. 화면에 환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여섯 사람... 다들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황혼이었다.
사진은 참혹했다. 거의 미나토 급이었다. 행태는 다양했다. 집에 있는 사람, 병실에 있는 사람...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인 단어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풍전등화!
다들 그 목숨이 바람 앞에 등불인 것이다.
일본 방사능피폭 비밀 프로젝트-2
일본 방사능피폭 비밀 프로젝트-2
“질문 있습니다.”
사진을 본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왜 접니까?”
윤도가 돌직구를 날렸다. 한 복판이었다.
“예?”
“왜 저냐고 묻고 있습니다. 당신들 정보망이라면 미국이나 독일, 중국 쪽 의료기관의 명의 타진도 가능할 텐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세계적인 암센터와 미국 해군병원의 암전문가까지 모두 타진을 했습니다. 미국의 텍사스대학 앤더슨 암센터, 뉴욕 메모리얼 케터링 암 센터, 존스 홉킨스, 메이요 클리닉, 워싱톤 대학 메디컬센터, UCLA 메디컬센터, 듀크 대학 메디컬센터... 심지어는 중국 상해와 베이징의 최고 침술 중의들까지... 그 타진 중에는 채 선생님이 고친 미나토 선생 의뢰도 포함이었습니다.”
“다들 거절했나요?”
“저희는 최고의 조건은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병원들 모두 손 쓰기에 늦었다는 소견이었습니다.”
“......”
“채 선생님이 거절하시면 그들 여섯 분은 차례로 죽습니다. 우리 정부는 그들을 살려 방사능 폭로의 절망에 대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삼으려는 겁니다. 부디 인도적인 차원에서 수락해 주십시오.”
“내가 가도 한 사람도 못 살릴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 살아도 우리 위원회는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난감하군요. 이 정도 상태들이면 당장 날아가야 한다는 건데...”
“결정만 하시면 당장이라도 JAL기에 일등석을 마련하겠습니다.”
“주말에 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두 일본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주말 아침에 출발하죠. 치료조건 같은 건 환자들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본인들은 로봇처럼 같은 인사를 반복했다. 어찌나 심한 인사인지 윤도가 말리고서야 인사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