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65)

대지진은 해안 일대를 덮쳤다. 연령불문이었다. 방사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최악의 저주가 사람을 가렸을리 없었다.

그런데...

일본정부까지 나섰다는 마당에 선발된 환자는 모두 관료나 정치인 풍. 어린 아이나 여자, 할머니들이 ‘전혀’ 끼어있지 않은 것이다.

“아까 그 분들 말입니다. 회의실...”

윤도가 와타루에게 물었다.

“예...”

“보고를 해야 합니까?”

“그게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이다 보니 체계라는 게...”

“보고해야 하는군요?”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진맥한 두 번째 환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던데...”

“아, 이부키 의원님 말씀이군요?”

“이부키 의원?”

“아,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만 아직 현역인 타쿠미 의원님의 형님이십니다. 현역일 때는 굉장히 유명하셨는데 대지진 때 후쿠시마 인근에 사시다가 그만...”

타쿠미...

그 의원이 맞았다. 위안부 망언을 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저 분들 모두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암 환자가 맞습니까?”

“그, 그렇습니다만.”

대답하는 와타루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기다리세요. 손 좀 씻고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와타루가 꾸벅 인사를 했다.

복도로 나와 화장실로 걸었다. 공교롭게도 화장실은 물청소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참을 돌 때 창밖이 보였다. 어린 소나무 아래 휠체어가 보였다. 10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멀리서 봐도 피부가 엉망이다.

아이를 돌보는 젊은 어머니의 손길이 애잔했다.

“왜요?”

옆에 있던 승주가 물었다.

“아니.”

대답과 함께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쏴아!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세수도 했다. 손을 닦고 나올 때였다. 입구에서 휠체어와 만났다. 그 소년이었다.

‘피부암...’

얼굴을 보고 알았다. 소년은 편평세포암으로 보였다. 기저세포보다 악성도가 높은 비멜라닌종 피부암이다.

치료 중에 잠시 햇빛을 쏘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밤잠을 잘 잘 수 없을 테니까.

“엄마.”

소년이 뭔가를 내밀었다. 작은 소나무 가지였다.

“언제 꺾었어?”

소독제를 바른 엄마가 소나무 가지를 받아들었다.

“누가 꺾어서 버렸길래 집어왔어요. 후쿠시마 히데코네 집에 있던 소나무하고 닮았어요. 그래서 물 주려고요.”

“......”

“그거 어려도 나무 맞죠?”

“그럼.”

“풀잎이 뾰족뾰족 와규 뿔 같아요.”

“정말 그렇네?”

“물주면 살 수 있을까요?”

“그럴 거야.”

“나중에는 와규보다 더 힘센 나무가 되겠죠?”

“그렇겠지.”

“물에 담아서 자기 엄마 나무 밑에 심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히데코네 집 마당에 심어주고 싶어요.”

“......”

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의 이야기에 나오는 히데코네 집은 쓰나미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얼른 가요. 지금은 나무도 햇빛 먹을 시간이에요.”

“신바...”

“엄마가 힘들면 제가 할 게요.”

“아니, 엄마는 힘 하나도 안 들어.”

“힘들어요. 엄마가 잠도 안 자고 저 돌보는 거 다 알아요.”

“신바...”

“휠체어 밀어주세요. 햇빛이 구름에 가리기 전에요.”

신비가 화장실 창으로 난 하늘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한숨을 참으며 휠체어를 밀었다. 작은 병에 꽂힌 소나무 가지를 안은 소년이 윤도와 승주를 스쳐갔다.

“뭐래?”

윤도가 승주에게 통역을 요청했다.

“그렇군.”

통역을 들은 윤도 콧날이 시큰하게 변했다.

“선생님, 준비 되셨으면 올라오시죠.”

와타루가 계단 위에서 재촉을 했다. 그 사이에 소년이 다시 들어섰다.

“김 샘, 통역 좀 부탁해.”

윤도가 소년에게 향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채윤도 한의사야. 너 소나무 좋아하니?”

윤도는 휠체어를 따라 걸었다.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하며 소년의 사연을 알았다. 소년 역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후쿠시마 출신이었다. 네 살 때 쓰나미를 만났다. 며칠간 구출되지 못하면서 방사능에 피폭 되었다. 진맥으로도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여섯 사람에 꼽히지 못했다.

왜?

“딱한 사람은 또 있어요.”

대화의 끝에 소년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30대 초반의 하루나였다. 난소암이라고 했다. 그녀 역시 시한부였다. 그 자리에서 하루나의 맥도 잡았다. 맥은 할퀴는 듯 주저앉다가 휘날렸다. 방사능 피폭의 흔적이었다. 검은 기운은 난소 부근에 가득했다. 차료혈을 눌렀다.

“아!”

하루나가 비명을 질렀다. 난소에 문제가 생기면 차료혈을 누를 때 압통을 느낀다. 반응으로 보아 말기 난소암임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사기는 난소의 중앙. 전이될 기세지만 치료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하루나의 병동에는 가난한 환자들이 많았다. 전부 방사능 후폭풍으로 질병이 생긴 사람들이었다. 그 앞의 신바 병실도 그랬다. 방사능이 축적되면서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는 아이들...

왜?

두 개의 의문이 윤도에게 달라붙었다. 소년과 여자는 왜 치료후보에 들지 못한 걸까?

“원장님...”

통역하던 승주가 눈자위를 구겼다. 그녀도 눈치를 차렸다. 일본정부의 환자선택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선생님. 여기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와타루가 병실로 들어왔다. 치모모도 옆에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윤도가 와타루를 잡아끌었다.

“......!”

윤도의 견해를 들은 와타루가 소스라쳤다. 여섯 환자의 선택기준을 물은 것이다. 윤도가 보기에 그건 합당치 않았다.

“하아.”

와타루는 한숨부터 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후쿠시마 방사능은 누출은 엄청난 비극을 몰고 왔습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여전히 진행 중이죠.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우리 정부가 시범사항으로 기획한 일입니다. 현재 많은 질환에 대해 원전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 전부를 우리 정부가 구제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 역시 신침의 실력자라고 해도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질환을 치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합당한 설명이 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국가적인 입장에서는 요인 몇 명이라도 구해야하죠.”

“중환자 우선이 아니라 연공서열에 따른다는 겁니까?”

“그 분들은 일본정부에 기여한 공이 크고 앞으로도 기여할 능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조금 전에 본 신바라는 소년과 난소암 여환자도 위중합니다. 의술은 인도주의를 중시하는데 여자와 소년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순위입니다. 일본은 아닙니까?”

“채 선생님...”

“당신이 내게 주었던 자료는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을 요구합니다.”

“진실?”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 혹은 통원치료 하는 분들... 누가 가장 위중하고 누가 가장 고통 받는 것인지.”

“그건 곤란합니다. 일단 우리 정부가 선별한 사람들부터 치료한 후에...”

“거절합니다.”

윤도가 잘라 말했다. 그 말은 와타루에게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그는 그길로 달려가 미나토를 데려왔다. 이 일의 단초가 되었던 미나토였다.

“채 선생님, 치료를 못하겠다고요?”

미나토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무슨 무례라도?”

“저는 선발된 환자들이 공평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바로 잡지 않는다면 이 치료는 부득 거절하겠습니다.”

“채 선생님.”

“저는 한의사입니다. 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환자선발기준이 완전 정치적이더군요. 공감할 수 없습니다.”

“한 번만 양보하십시오.”

“더구나 저 여섯 환자 중에는 우리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망언수준으로 떠벌리는 사람의 혈연도 있습니다. 아니 더 있을 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이 일은 한국에서 두고 두고 제 불명예가 될 것입니다.”

“......!”

미나토의 얼굴은 점점 사색으로 변했다.

“미나토 선생님은 좋은 뜻으로 저를 소개했겠지요. 하지만 아직 안정하셔야할 때니 댁으로 가셔서 가료하시기를 바랍니다.”

“채 선생님.”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저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윤도가 돌아섰다. 결심을 한 이상 주저할 것도 없었다.

처음으로 포기하는 치료.

마음이 아팠다.

환자...

그것도 불치의 판정을 받은 암환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윤도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이건 북한에서 남북밀담을 도운 경우와는 달랐다.

“채 선생님!”

병원을 나서자 뒤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원장님.”

뒤돌아본 승주가 울상을 지었다. 슈스케를 위시해 타다요시와 무라다까지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택시 앞에서 윤도가 물었다.

“안 됩니다. 이대로 가시면...”

슈스케가 윤도를 막아섰다.

“제 생각은 이미 미나토 선생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저희 불찰입니다만 한 번만 양보를 해주십시오. 이번에 선발된 환자들에게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면 다음에는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선생님을 다시 모시겠습니다.”

“저는 다음에 또 온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그런 각오가 있다면 그 차례를 바꾸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이 일은 이미 내각회의에서 인준을 받은 일이라...”

“그렇다면 내각회의가 치료를 하면 되겠군요.”

“선생님!”

슈스케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윤도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서웠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생면부지의 한의사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사실... 더구나 저 안의 환자들은 이들의 일가족도 아니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저 여섯 분은 우리 일본정부에 꼭 필요한 인물들입니다. 이번 치료만 저희 뜻에 따라주시면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환자를 한국으로 데려오라면 데려가고, 거기 병원을 지어달라고 해도 지어드리겠습니다. 인력이 필요하면 인력을...”

슈스케는 절실했다. 윤도는 그제야 알았다. 저 안에서 윤도를 기다리는 여섯 VIP 환자들. 윤도의 상상 이상으로 거물들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내각총리실의 실세라는 슈스케가 이토록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 중에는 위안부 망언과 연관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동생은 지금도 망언 진행 중이고 눈치를 보아하니 여섯 중의 누군가도 그런 전력이 있는 것 같았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식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말이죠.”

생각을 정리한 윤도가 슈스케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뭐든 준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슈스케와 눈을 맞춘 윤도가 뒷말을 이었다.

“위안부 망언을 취소하고 정식으로 사과를 해주십시오.”

“위, 위안부?”

“거기에 제가 원하는 환자 몇 명을 추가할 겁니다.”

“그건 상관없지만 위안부 사과라면 이부키, 타이세이 전 의원과 타쿠미 의원 말씀입니까?”

타쿠미. 이름 하나가 나왔다. 윤도가 진찰한 네 번째 환자였다.

“잡다한 사과는 진실성이 떨어지니 한 사람의 사과면 족합니다.”

“한 사람?”

“일본 총리 말입니다.”

국민된 도리로 딜 하나를 날렸다. 여섯 요인(要人)의 치료와 말 한 마디면 되는 사과. 윤도는 가능성이 없는 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일본 총리의 사과.

슈스케의 머리 속에서 화산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퍼엉!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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