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265)

장침, 韓日 역사를 관통하다-2

“이봐요, 채 선생님.”

이제는 미나토까지 나섰다. 그 역시 일본정부 막후의 인물로 소문난 사람. 어쩌면 이 여섯 환자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제가 결정할 일도 아니고 정부와 정부간의 교섭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일입니다.”

슈스케가 난색을 표했다. “그렇다면 제 대답은 변하지 않습니다.”

“채 선생님.”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여섯 환자들 중에 맨 앞에 앉은 환자. 췌장암은 맞지만 정신병이나 치매는 아닙니다. 그런 쪽으로 치료에 들어가면 수삼일 내로 죽을 겁니다.”

“......”

순간, 응급실 쪽에 소란이 일었다. 윤도는 응급실을 한 번 돌아본 후에 작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윤도가 돌아서자 슈스케의 미간이 멋대로 일그러졌다. 타다요시와 무라다도 그랬다. 그때 응급실에서 닥터 하나가 뛰어나왔다.

“원장님, 켄토 씨께서 위독하십니다.”

“뭐라?”

닥터의 한 마디에 일동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치매 발작이 심해서 투약을 했더니...”

“아니, 그건 아까 저기 채 선생이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정신병 쪽으로 치료하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와타루가 끼어들었다.

“그건 그 사람의 견해지 정신과전문의들의 진단은 정신질환과 치매가 겹친 게 맞습니다. 신경정신과장님이 확인하고 투약한 거고요.”

닥터가 대답했다.

“이런, 이런...”

미나토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에도 윤도는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슈스케.”

미나토가 슈스케를 바라보았다.

“예.”

“채윤도를 그냥 보낼 셈인가?”

“......”

“와타루가 하는 말 못 들었나? 그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한의사야. 내가 증거가 아닌가?”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VIP 병실의 다케시... 그는 총리의 정치적 스승이자 은인이 아닌가?”

“하지만 위안부는 역시...”“그들 중에는 우리 관동구락부의 3대 회장님도 계시네.”

“......”

“나아가 슈스케 자네의 장인이자 자네에게 오늘을 있게 해준 세이쥬로님도.”

“......”

“그동안 저 여섯을 살리기 위해 미국으로 중국으로 백방 애를 썼다는 자네 말은 다 허언이었나?”

“대인.”

“말 한 마디로 여섯을 살릴 수 있다면... 아니, 두엇까지 안 된다고 해도 서넛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

“결정하시게. 지상에 하나 밖에 없는 신의(神醫)일세. 나는 그의 침을 아네. 다른 대안은 없네.”

“......”

슈스케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또 다른 택시가 윤도 앞으로 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와타루!”

거기서 슈스케의 입이 열렸다.

“예!”

“채 선생을 모셔오시게. 원하는 걸 들어준다고 하고.”

“일단 응급처치부터 하고 봅시다.”

윤도가 걸었다. 응급실 안이었다. 침대에서는 켄토가 거품을 뿜고 있었다.

“일단 투약부터 중지해 주십시오.”

윤도가 닥터에게 요청을 했다. 닥터는 망설였다. 그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그런 진단을 한국에서 온 한의사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르시게.”

원장이 상황정리를 했다. 투약 응급조치는 그렇게 멈췄다.

윤도가 진맥에 들어갔다. 환자 주변은 수많은 눈들로 와글거렸다. 보호자를 비롯해 미나토와 슈스케... 그리고 관계자들이었다.

‘젠장!’

윤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상황은 아까보다 나빴다. 투약 때문이었다. 켄토의 중병은 비장과 그에서 비롯된 담음이 원인. 그런데 정신과 약이 들어갔으니 불협화음은 뻔한 일이었다.

담음.

담음은 인체의 수액대사 중에 생기는 질병의 원인이다. 열 가지 병 중에 아홉 가지는 담음이 원인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질환을 야기한다. 담음과 연관되는 장부로는 비장, 폐장, 신장, 삼초 등을 들 수 있다. 원인도 다양해 심하면 반신불수까지 될 수 있다.

켄토의 경우는 담음증의 하나인 담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한 유사사수였다. 그렇잖아도 췌장암에 걸린 환자, 담괴가 겹치자 최악의 결과로 치달은 것이다.

일단 사관부터 열었다.

다음으로 비수혈과 장문혈, 폐수혈과 중부혈에 장침을 넣었다. 오장의 기를 올려 투약의 부조화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었다.

담음의 필수혈인 풍륭혈과 중완혈을 잡았다. 다음 침은 오장직자침이었다. 담괴가 생긴 머리와 가슴 부위의 혈관이 목표였다.

“그...”

신경정신과장이 말리려했지만 윤도는 개의치 않았다. 윤도를 제지하려던 그 손은 다시 거두어졌다. 장침이 들어가기 무섭게 켄토 입에서 나오던 거품 같은 침이 멈춘 것이다. 동시에 켄토의 혈색이 자리를 찾았다.

“일단 응급조치는 했습니다.”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미나토와 슈스케 일행은 숨도 쉬지 못했다.

“......!”

회의실로 옮겨온 후에 슈스케가 얼어붙었다. 안에 모인 건 윤도와 슈스케, 미나토와 타다요시, 그리고 통역으로 배석한 와타루였다.

“문서로 약속을 확인해달라고?”

슈스케가 와타루에게 되물었다. 와타루는 그저 고개만 끄덕할 뿐이었다.

“그건 곤란해.”

슈스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가겠다고 합니다.”

“내가 책임지고 추진하겠다고 전하게.”

“그 책임을 문서로 달라고 하십니다.”

“......”

“그것도 아니면 지금 당장 한국 외무부의 당국자와 통화로 확인해달라고 합니다.”

“한국 외무부?”

“채 선생 지인 중에 한국 외교부 2차관이 있다고...”

“2차관이면 한중관?”

슈스케가 한 번 더 뒤집혔다.

한중관.

그는 대일 강경파에 속했다. 내각총리실도 주목하는 관료였다. 그렇기에 일본 정부에서도 그와의 협상 테이블은 가급적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한중관이라니...

윤도는 딜을 던져놓고 이들의 반응을 주목했다. 한중관은 갈매도 여객선 심장마비 사고 때 알게 된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딸의 목숨을 구해준 인사 차 갈매도에 왔었다. 사석에서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국가적인 사안의 딜. 더구나 외교부 고위공직자이니 마다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물론 대안도 있었다. 복지부의 노차관이었다. 그라면 반드시 도움을 줄 사람이었다.

“끄응!”

슈스케가 이마를 짚었다. 급한 불을 끄자는 생각에 수락한 총리의 위안부 사과. 대안을 생각할 시간을 벌고자 던진 떡밥이었다. 하지만 윤도는 돌직구 승부로 나오고 있었다. 무조건 한가운데였다.

쾅!

칠 테면 쳐봐.

윤도는 그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수상 각하와 통화를 해보겠소.”

슈스케가 자리를 털고 나갔다.

“미나토 선생님.”

남은 자들의 침묵을 윤도가 먼저 깨버렸다.

“말씀하세요.”

“제 생각인데...”

“......”

“제게 추천한 여섯 분 말입니다. 알고 보니 그리 중요한 분들이 아닌 모양이군요.”

“무슨 말씀이신지...”“제가 진단하기에는 시분초가 급한 분들입니다. 게다가 한둘도 아니고 여섯이지요. 그런데 입으로 하는 사과 한 마디에서 막히고 있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견제구였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끄응.”

미나토도 신음만 토해냈다. 그런 면에서는 슈스케와 다르지 않았다. 사실, 윤도도 조금은 망설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제의를 할 생각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왕에 던진 딜이었다. 의술에 조건을 걸 생각은 없지만 그냥 두면 차례차례 목숨을 마감할 환자들. 이 딜은 아주 허황된 게 아니었다.

슈스케는 오래 걸렸다.

10분 경과.

20분 경과.

30분 경과...

그 사이에 윤도도 놀지만은 않았다. 승주에게 VIP 병실 환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을 지시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이미 두 명의 이름은 밝혀진 것. 승주는 눈치 빠르게 그 일을 수행했다.

슈스케는 한 시간도 더 지나서야 돌아왔다.

“채 선생.”

“결과가 나왔습니까?”

“우리 수상께서 대안을 내주셨소.”

“대안이라고요?”

“수상께서 친히 오셔서 당신에게 유감의 뜻을 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직접.”

직접.

슈스케는 그 말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약속과 다릅니다.”

“하지만 채 선생은 사인으로서 본 치료에 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더 적합하고 모양이 날 수도 있지요.”

“만약 일본 총리께서 그 말을 한다면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들입니다. 정 그렇다면 그 분들 앞에서 하실 수 있겠습니까?”

“......?”

윤도의 역제의에 슈스케가 휘청거렸다. 대안은 물을 건너가고 있었다.

“모든 게 어렵다면 저는 그냥 가겠습니다.”

윤도가 일어섰다. 그 손을 슈스케가 잡았다.

“채 선생.”

“......”

“좋소.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소.”

“말씀하시죠.”

“애당초 여섯 환자들 중에서 다섯 이상... 특히 내가 지정하는 셋은 무조건 살리는 조건이오.”

“그 여섯에 둘을 보너스로 보태드리죠.”

“둘?”

“난소암의 젊은 여성과 피부암의 소년. 물론 그 외에도 내가 판단한 사람에게 침술을 써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해드리죠. 그럼 언론에 발표할 때도 모양이 갖춰지지 않겠습니까?”

“......!”

“다만 저도 전화 한 통 해도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윤도가 핸드폰을 꺼냈다. 수신자는 외교부 2차관 한중관이었다.

“여보세요?”그가 전화를 받았다. 윤도는 창가로 걸어가 통화를 했다. 슈스케처럼 숨어서 통화할 이유도 없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대략 설명을 들은 한중관이 소스라쳤다.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도쿄에 있습니다.”

“잠깐만요.”

거기서 슈스케의 직통전화가 울렸다. 통화를 멈춘 윤도가 슈스케를 돌아보았다.

“그래... 그렇게 되었네. 그래...”

슈스케는 굳은 표정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 통화는 한중관 때문이었다. 느닷없는 윤도의 말을 확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니까 일본 내각총리실에 전화를 걸어 슈스케의 소재를 확인한 것이다.

“맙소사, 정말이군요. 이거 뭐라고 말해야할지...”

다시 한중관과의 통화가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단 치료를 하십시오. 제가 지금 당장 날아가겠습니다.”

“차관님.”

“일본 관료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안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장치를 해두지 않으면 분명 말을 바꿀 겁니다. 아니면 늘 그랬듯이 ‘유감’정도로 그칠 거고요.”

“그럼...”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위안부 문제와 피해 당사자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 이 말이 명시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

“그 다음 문제는 제가 가서 정리를 하겠습니다. 지금 도쿄의 칸치병원이라고 하셨죠?”

“예.”“곧 갑니다. 도쿄에서 뵙겠습니다.”

한중관의 전화가 끊겼다.

“한중관 차관님과 통화가 끝났습니다.”

윤도가 자리로 돌아오며 뒷말을 이었다.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오!”

미나토와 타다요시 등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나왔다. 하지만 그 숨결은 길지 못했다. 바로 이어진 윤도의 말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한중관 차관님이 오실 겁니다. 기술적인 건 그 분과 상의하시면 될 테지만 제가 원하는 건 명시적인 한 마디입니다. 위안부 문제와 피해 당사자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

슈스케의 시선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타다요시와 무라다도 그랬다. 그 눈빛들의 지향은 윤도였지만 윤도의 시선은 강철과도 같았다.

자박자박!

윤도가 문을 향해 걸었다. 와타루가 그 뒤를 따랐다.

탁!

문이 닫혔다. 그러자 무라다가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 이...”

무라다의 어깨가 부러질 듯 떨렸다. 슈스케의 어깨도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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