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265)

“더 아프고 더 가난하고 더 힘없는... 그렇게만 말했습니다. 원로님들을 위해 이틀 밤을 새우고는 겨우 죽 한 그릇을 먹고 강행군을 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총리각하께서 부른다고 해도 오지 않을 사람입니다.”

“정말... 정말 그렇단 말인가?”

되묻는 총리 표정이 비장했다. “예. 1층에서도 벌써 세 명을 고치고 있다는 보고가...”

“......!”

총리의 얼굴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를 수행하는 비서실장과 외무성 장관도 그랬다. 국가원로급 여섯 명, 아니 미나토를 합쳐 일곱을 살린 한의사. 목에 힘을 주며 귀빈대접을 요구해도 모자랄 판에 일반환자들을 위한 진료라니?

‘정녕 한국인들은...’

총리는 떨리는 전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시간.

윤도는 1층 소아병동에 있었다. 모두 초등학생 연령대의 환자들이었다. 장침이 들어가도 누구 하나 겁먹지 않았다. 신바 때문이었다.

“지구 최강의 침을 놓는 선생님이야. 내 피부암도 다 낫게 해주셨어.”

신바가 움직일 때마다 우수수 딱지와 결절 찌꺼기들이 휘날렸다. 아이들은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흉측한 몰골의 신바 암이 나았다. 자기들보다 더 심해 길어야 한두 달 살 거라던 신바였다. 아이들은 어리지만 목숨에 대한 희망은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를 살려줄 한의사님.’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을 발했다. 생명을 갈구하는 빛이었다. 소아병동의 마지막 말기암환자는 갑상선암이었다. 갑상선을 따라 인후두 전반에 전이가 되고 있었다. 고통으로 늘어졌던 아이. 윤도의 침이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몸에 생기가 돌았다. 그때 윤도 뒤에 기척이 느껴졌다.

“원장님.”

승주 목소리가 떨렸다. 일본총리였다. 그가 미나토와 슈스케, 외무장관을 위시해 수행원을 병풍처럼 거느리고 들어와 있었다.

“채윤도 선생.”

총리가 윤도를 불렀다.

“진료 중이야. 환자들에게 해로우니 용건이 있으시면 진료가 끝난 다음에 다른 곳에서 보자고 전해줘.”윤도는 돌아보지 않았다. 총리라는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윤도는 오직 장침에 집중할 뿐이었다. 아이 안에 자리한 암세포는 녹이는데 올인, 올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총리는 절제된 인사를 두고 돌아섰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멀어졌다.

“원장님, 너무 멋져요.”

보조하던 승주가 엄지를 세워보였다.

“뭐가?”

“방금 온 사람 말이에요 일본 총리대신이래요.”

“그래?”

“예? 그럼 누군지도 몰랐던 거예요?”

“그 사람이 총리인 게 중요하겠어? 이 아이들 암세포 잡는 게 중요하지.”

그 사이에도 윤도의 약침은 쉬지 않고 혈자리를 잡았다.

그 약침이 멈춘 곳은 여자병동이었다. 70대 초반의 할머니에게 위암 치료를 하던 윤도, 반가운 손님을 맞아 시침을 멈췄다. 진경태와 정나현이 날아온 것이다.

두 사람의 방일은 윤도의 지시였다. 여섯 VIP와 신바, 하루나를 위한 특별탕제를 지시했다. 암의 완치와 사후관리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밖으로 나온 복도에서 비로소 총리 얼굴을 보았다. 복도를 지키던 와타루가 총리에게 연락하자 총리가 내려온 것이다.

“우리 일본국의 총리대신 각하라오.”

미나토가 말했다. 총리 뒤로는 수많은 관료들이 엿보였다.

“채윤도 선생.”총리가 입을 열었다.

“일본국을 대표하여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예.”

“차 한 잔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치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리가 거절했다. 어쩌면 전쟁터보다 더 치열한 병원. 차 마실 시간이면 한 명을 더 치료할 수 있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총리가 다시 인사를 전해왔다. 답인사를 하고 계단으로 걸었다.

“일, 일본총리라고요?”

VIP병실 앞에서 진경태가 물었다.

“그렇다네요.”

“세상에, 일본총리...”

“뭐가 잘못됐어요?”

“그건 아니지만...”

“약은 제대로 챙겨오셨죠?”

“그럼요. 원장님 지시 받고 그 시간부터 조제한 겁니다.”

“그럼 됐어요. 환자들에게는 총리보다 탕약이 더 필요하니까.”

윤도가 VIP병실 문을 열었다.

윤도의 탕약.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본 의학계는 이 탕약의 샘플을 가져가 분석을 했다. 일본의 기술수준으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똑 같이 만든 탕약은 윤도의 탕약과 같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주요 성분비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몇 가지 비방 때문이었다. 우선 산해경의 영약이 그랬다. 탕제에 산해경 영약은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영약과 함께 시침한 혈자리의 변수가 있었다. 그 변수의 기혈조화를 맞춘 진경태였다. 그러니까 침술이 없는 단방 처방이라면 약제의 성분구성비가 달라질 일. 일본이 그걸 알 리 없었다.

두 시간 후, 한중관이 돌아왔다. 도쿄의 주일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후였다. 원래는 한국으로 돌아가 청와대에 보고를 한 후에 발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못을 박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각서를 받았다지만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도 있는 게 외교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청와대도 공감을 표시해왔다. 외교장관의 결재를 득한 한중관은 한국대사관에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일본기자들보다 외신을 더 많이 불렀다. 거기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비공식 회담의 협의사항을 공개했다.

“일본은 한일위안부협정과 별개의 문제로 총리대신이 근간 직접, 명시적이고도 진정성이 담긴 사과문을 발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한중관의 발표는 세계를 뒤집어놓았다. 특히 일본과 한국이 그랬다. 21세기가 지나가도 평행을 달릴 것만 같던 위안부 문제. 마침내 일본이 진정한 사과 쪽으로 가닥을 틀었다는 타전이었다. 그야말로 오랜 숙제가 해결된다는 암시였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이면의 디테일은 나오지 않았다. 한중관의 심정으로야 윤도의 공을 죄다 알리고 싶었지만 그건 일본정부와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한중관은 알고 있었다.

사랑과 연기는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이 건은 숨길 수 없는 일었다. 그건 윤도의 의술에서 엿보이고 있었다. 한중관이 주일대사관으로 출발할 때 윤도는 1층의 소아병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선발한 VIP들은 침묵할 수 있었다. 관계자들도 침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

윤도의 침술로 새 희망을 가질 아이들의 입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진실이 전파되는 데는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파된 진실은 한중관이 발푯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파괴력이 있을 일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때늦게 날아온 외교부 직원들이 한중관의 노고를 높이사주었다. 한중관은 한 마디로 그들의 말을 막았다.

“이 노고는 채윤도 선생의 것이야. 누구든 채 선생의 공로에 묻어갈 생각 따위는 하지말도록. 이건 외교부의 공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니까.”

“예?”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었나? 그걸 못하고 있다가 채윤도 선생이 이룬 거야. 그러니 우리 공처럼 어깨에 힘주지 말고 뒤치다꺼리나 제대로 하란 말이야!”

한중관의 촌철살인 한 마디에 외교부 직원들은 숨소리를 죽였다. 그거야 말로 팩트였다.

팩-트!

그날, 윤도는 저녁까지 시침을 했다. 1층 환자들만 무려 36명을 돌보았다. 다행히 중기 암환자들도 있었지만 생존에 치명적인 말기 암환자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차마 침을 거둘 수 없었다. 약침이 바닥나도 상관없었다. 윤도의 신침은 오직 약침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상황이 심각한 사람에게는 약침을 넣고 그렇지 않으면 양문혈과 수삼리혈, 천종혈과 전중혈을 잡았다. 거기에 오장육부의 수혈과 모혈을 더하니 환자들에게는 천군만마의 치료가 되었다.

치료를 마친 윤도가 병실을 나오자 병원장이 다가왔다.

“채 선생.”

병원장은 복도에서 윤도에게 큰 절을 올렸다. 의사로써 윤도에 대한 경의였다. 자신의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준데 대한 보은의 인사였다.

“가시죠.”

대기 중인 차의 문은 한중관이 몸소 열어주었다. 차량은 모두 세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채윤도 선생님.”

차에 오르려는 순간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도가 돌아보았다. 하늘에서 노란 비행기들이 날아왔다. 아이들이 창문에서 날려 보낸 비행기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이들이 합창을 했다. 그 중에서도 신바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신바, 또 보자. 약 잘 챙겨먹고.”

윤도가 화답했다.

“선생님!”

외침은 여자병동에서도 새어나왔다. 그녀들도 노란 손수건을 흔들어댔다. 노란손수건은 세계적으로, 다시 돌아와 달라는 염원의 상징이다. 그녀들 사이에 하루나가 엿보였다.

하루나는 두 손을 흔들며 아쉬움을 달랬다. 윤도도 그녀들을 위해 손을 들었다. 착한 하루나. 이제 그녀의 고단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그리하여 그녀의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희망이 되기를.

“채윤도 선생님!”

선생님.

선생니임.

그들의 목소리가 섞여 희망의 메아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2층은 조용했다.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벌써 자신들의 웅장한 저택으로 돌아가 호사를 누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윤도는 치료를 한 것 뿐이었다. 보답 따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아이들과 여자병동, 이 목매인 응원만으로도 가슴은 충분히 뜨거웠다.

“채 선생.”

미나토가 다가왔다.

“인도적인 의술.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미나토가 고개를 숙였다. 윤도도 맞인사로 답했다. 국보급 고미술품을 한국정부에 반환하고, 이제는 위안부 사과의 단초까지 제공한 사람. 그렇기에 좋은 것만 생각하고 싶었다.

“가지.”

한중관이 운전수에게 말했다. 차는 사뿐하게 병원 마당을 나섰다.

“선생님!”

창문을 타고 앉은 신바가 또 다른 비행기를 날렸다.

“잊지 않을 게요. 안녕히 가세요.”

신바의 종이비행기는 오래 오래 윤도 차를 따라왔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

국민훈장 무궁화장-1

“원장님!”

그로부터 이틀 후, 한 환자의 시침을 마쳤을 때 승주가 침구실로 뛰어 들어왔다. 이제 윤도의 피로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의 두 시간. 그건 인생 꿀잠이었다. 비행기가 인천에 착륙한 뒤에야 눈을 뜬 윤도였다.

일본 정부는 다음 날 10억을 보내왔다. 배달자는 와타루였다. 윤도는 군말없이 돈을 받았다. 어차피 돈은 무한으로 지를 수 있다고 했던 그들이었다. 암 환자만 열 명도 넘게 구해냈으니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쉬잇!”

윤도가 승조에게 조용하라는 사인을 냈다. 환자가 막 잠이 들려는 찰라였다.

“죄송해요. 하지만 뉴스를 보셔야 해요.”

승주는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뉴스?”

“어서요. 지금 일본총리가 위안부 사과문 발표를 한 대요.”

“......!”

윤도가 대기실로 나왔다. 진경태와 종일도 나와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환자들까지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쏠렸다. 기자가 나왔다. 일본정부청사 앞이었다.

“국민여러분 여기는 일본입니다. 지금 일본 총리의 기자회견이 열리기 직전입니다.”

기자의 멘트가 끝간 데 없이 높아졌다.

“이제 잠시 후면 일본 총리가 나와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입니다. 한국정부의 확인에 따르면 일본총리가 지금까지의 위안부 관련 발언에서 진일보한, 진정성 있는 사과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 주일대사관에서 이에 대한 협의를 마친 것으로 알려진 한중관 외교부 차관에 의하면... 아, 지금 막 일본총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긴박한 멘트 뒤로 일본총리가 보였다. 카메라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일본 총리는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경직된 인사와 함께 사과문 발표에 들어갔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총리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윤도의 한의원 대기실도 숨을 죽였다.

“···이에 본 총리는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과거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조선위안부 문제와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위안부 모두에게 머리 숙여 사죄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사죄.

명시적인 단어가 나왔다.

펑!

퍼펑!

플래시가 총리를 향해 맹렬하게 쏟아졌다. 기자들이 질문을 퍼부었지만 총리는 질문을 받지 않았다. 미친 듯이 달아오른 보도진들. 현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활화산이었다.

윤도가 가만히 웃었다. 오랜 숙원이었던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 본래 저 자리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어야했다. 그들 앞에 고개를 숙여야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였다. 마침내 총리의 공개사과를 듣게 된 것이다.

“원장님...”

사연을 아는 승주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그래? 좋은 날에...”

“키힝, 저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그게 중요해?”

“그건 아니지만...”

“승주 씨 몫도 커. 우린 그냥 평생의 자부심으로만 갖고 살자고.”“알겠어요.”

승주가 눈물을 훔쳤다. 그걸 바라보던 진경태가 따뜻하게 웃었다. 나중에 탕약을 가지고 왔기에 그도 사연을 알고 있었다.

빠라빠빠방.

방송이 끝나갈 무렵에 윤도 전화기가 울었다. TBC 방송의 성수혁 차장이었다. 그는 총리 발표문의 이면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기레기들 속에서 군계일학으로 정통 기자의 길을 걷는 그. 그가 판단할 때 일본정부가 이렇게 전격적인 사과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미나토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미나토라면 현재의 일본정권에 막후 조정자의 능력을 가진 사람. 그렇게 엮어가다가 윤도의 일본행을 알게 되었다. 그의 레이더는 정보부처 못지않게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윤도가 도착한 일본 병원, 거기에 모인 일본정부의 요인들, 나아가 한중관까지 방문한 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언제 자수하시죠?”

성수혁은 은근한 운을 떼었다.

“아직은 발침할 시간이 아닙니다.”

윤도는 침술에 빗대 불가를 선언했다.

“좋습니다. 그럼 발침하면 제가 0순위 예약입니다.”

“그건 약속하죠.”

윤도가 말했다. 그라면 1번 타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퇴근 무렵, 윤도는 손님들의 방문을 받았다. 한중관과 국정원 차장보 김광요에 청와대 비서관까지 동행이었다.

“채 선생님.”

세 사람은 반색을 하며 원장실로 들어섰다. 셋 다 윤도와는 구면이었다.

“굉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김광요가 대뜸 윤도를 포옹했다. 한중관에게서 사건 전말을 들은 눈치였다.

“대통령께서 지금 완전 고무되어 있습니다. 당장 달려오고 싶어 하셨지만 외국 국빈이 내방 중이라서...”

비서관도 고무되기는 다르지 않았다.

“일본총리 기자회견은 보셨죠?”

한중관이 물었다.

“예.”

“나는 아주 쓰러질 뻔 했습니다. 사죄라는 말이 나올 때는 심장이 다 떨리더라니까요.”

“차관님이야 그럴만 하지요. 제가 얼떨결에 저지른 일이라 많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혈혈단신으로 일본정부 관계자들과 담판을 한 거와 다름이 없으니...”

“이런 담판이라면 언제든지 저질러 주십시오. 책임지고 뒤처리 하겠습니다.”

한중관의 목소리에는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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