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265)

“아무튼 고맙습니다. 차관님이 바로 응답하지 않았다면 저도 어떻게 되었을지...”

“그래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채 선생님이 저를 두 번이나 살렸다고...”

“별 말씀을...”

“우리가 지금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이분들, 자기들 앞에서 한 말이 아니라 조금 아쉽지만 가슴팍의 응어리가 쑥 내려갔다고 하더군요.”

“다행이네요.”

“할머니들에게는 채 선생님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유명한 한의사 선생님이 막후에서 분위기 조성을 하는 바람에 낭보를 건지게 되었다고요.”“제가 뭐 한 게 있다고...”“아닙니다. 이건 정말이지 역사에 남을 외교입니다. 그동안 미인계니 황금계니 이간계니 하는 전략을 많이 써왔지만 의술계는 처음입니다. 아니, 장침계인가요? 이걸 계기로 우리 외교 정책에도 다양한 방안을 접목해 볼 생각입니다.”

“예...”

“그리고... 아, 그건 정 비서관께서 직접 말씀하시죠.”

한중관이 비서관에게 공을 넘겼다.

“뭐 그냥 하시던 분이 하시지... 저더러 갑자기 끼라니 두 분이 공들인 상에 숟가락 끼워놓는 기분입니다.”

“그래도 모양새가 그게 아니지요.”

“그렇다면...”

비서관은 목청을 가다듬고서야 뒷말을 이었다.

“채 선생.”

“예.”

“사실 이 일은 지난번부터 거론이 되던 일입니다만 이번 일을 기회로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대통령께서 채 선생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로 하셨습니다.”

“예?”

“훈격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입니다.”

비서관이 재차 강조를 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무려 1등급 국민훈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학술분야 등에서 국민의 복지와 국가발전에 탁월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보통 대형병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하는 의사들 중에 동백장이나 모란장을 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에 비하면 파격 그 자체였다.

“제게 훈장을요?”

놀란 윤도가 되물었다.

“당연하죠. 남북 물밑 접촉을 도왔고 북한병사를 살리는 일에도 기여, 나아가 수십 억의 신약개발 계약금을 쾌척하더니 마침내는 위안부 사과의 막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훈장 하나로는 모자라는 일이지만 상훈법이 그렇다보니...”

“말씀하신 일들은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예?”

“신약개발의 공은 강외제약 대표님과 저희 한약사님도 그늘에서 고생하셨고 북한병사 건은 중증외상 전문의 손석구 선생님이 애를 쓴 일입니다. 나아가 이번 위안부 사과의 기반이 되었던 일본 VIP들 진료에는 우리 김승주 간호사도 몸을 돌보지 않고 간호를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저 혼자 세운 공처럼 훈장을...”

“어이쿠, 우리가 그걸 생각지 못했군요.”

“......”

“당장 청와대로 돌아가서 의견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께서 고무되어 계시니 반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상을 준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야죠.”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야지요. 국민영웅 채윤도 선생의 의견 아닙니까? 그것조차 못한다면 제가 청와대 사표내겠습니다.”

비서관은 유의미한 성과를 약속해 주었다.

“그건 그렇고 차관님.”윤도의 시선이 한중관에게 건너갔다.

“네.”

“기자들이 접근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건 정부문서처럼 보관기간 같은 게 없나요?”

“위안부 사과문 발표의 일화 말씀이군요?”

“예...”

“그렇잖아도 대통령께서 거기 관련된 의견을 주셨는데...”

‘대통령 의견?’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대통령께서는 채 선생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 거동이 가능한 위안부 할머니들을 초대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정부가 나서서 성취한 공이 아니고 채 선생의 공 아닙니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실 이야기를 하실 모양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이룬 공인척 하면 그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

“그렇게 되면 어차피 알려질 일입니다. 게다가 저희 부처 분석인데 일본정부에 이렇게 발표를 앞당긴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라면?”

“도쿄에서 채 선생님이 치료한 암환자가 무려 수십 명에 달합니다. 일본에는 눈이 없고 SNS가 없겠습니까? 여기 김광요 차장보의 말에 의하면 도쿄를 중심으로 채 선생님 소문이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명침명의가 일본으로 건너와 방사능에 신음하던 암환자 수십 명을 살리고 돌아갔다고.”

“......!”

“그러니 뭐든 선생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거기에 대한 옵션 같은 건 애당초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저들처럼 팩트를 부정하거나 가공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중관의 답변은 사이다처럼 시원했다. 일본 당국이 왜 이 사람을 껄끄러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졸라대는 바람에...”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의견 반영해서 조만간 청와대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인사는 청와대 비서관이 대신했다.

“원장님.”

방문객들이 돌아가자 승주가 빼꼼 고개를 디밀었다.

“아직 퇴근 안 했어?”

“조금 늦으면 어때요. 그런데... 뭐래요? 원장님 잘못되는 거 아니죠?”

“내가? 왜?”

“정부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뭐 하나 믿을만한 구석이 있어야지...”

“김 샘 표창 챙겨주러왔다는 데도?”

“예? 저요?”

“한 번 기대해봐. 우리 둘 다 주는 거 아니면 안 받는다고 했으니까. 일본 라멘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한 그릇 못 사주고 왔잖아.”

“원장님...”

승주는 또 한 번 눈물 글썽 모드로 들어갔다.

원장실로 돌아온 윤도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누른 번호는 성수혁 기자였다. 어차피 약속한 일이니 0순위 예약을 받을 생각이었다.

“나이쓰!”

한달음에 달려온 성수혁이 쾌재를 불렀다.

“잠깐만요, 저 전화 좀 걸 게요.”

그는 바로 편집국장 전화번호를 눌렀다.

“국장님 저 성 차창입니다.”

성수혁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건 그가 특종을 잡았다는 반증이었다. 성수혁은 기사 마감시간부터 늦춰달라고 했다. 아울러 방송 첫머리와 신문 1면 자리를 비워달라는 요청도 했다.

“시작하시죠.”

통화를 끝낸 성수혁은 핸드폰의 녹음앱을 눌렀다. 그의 수첩과 필기구도 바쁘게 움직였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다음 날, 칸치병원에서 이룬 도쿄대첩의 역사가 만천하에 알려졌다. 일본정부의 민낯은 그렇게 드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문제삼을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방송에도 제보가 들어가 뉴스가 된 것이다. 뉴스의 주인공은 신바였다. 신바는 피부암 때와 침술 시술 후의 사진을 올렸다. 신바와 그 어머니의 합작이었다. 방송에 제보된 영상에는 신바와 함께 찍은 윤도 얼굴이 또렸 했다.

신바 어머니의 의도는 하나였다. 채윤도에게 보답하고, 방사능으로 인한 암으로 죽어가는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신바의 제보에 열광했다. 해맑은 소년의 치료 전과 후 사진 비교가 제대로 먹혔다. 게다가 어린 신바에게는 정치색이 없었다.

덕분에 일본정부는 TBC의 ‘비하인드 스토리’ 보도에 대해 일언반구의 반론도 낼 수 없었다. 그들의 공식논평은 이렇게 나왔다.

<일본정부의 위안부 사과는 인도적인 차원이었지 한국정부와 뒷거래를 한 것은 절대 아니다. 항간에 나도는 칸치병원의 VIP환자는 와전된 것이다.>

이날 오후, 윤도네 한의원에는 일본인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일본어를 아는 승주가 또 한 번 진땀을 뺐다. 그 전화 사이에 청와대 비서관의 전화도 끼어왔다.

“채 선생, 어제 주신 의견이 모두 반영되었습니다. 손석구 교수에게는 국민훈장 동백장, 채 선생과 함께 국익과 복지에 기여한 류수완 대표, 진경태 한약사, 김승주 간호사에게는 대통령 표창이 결정되었습니다.”

진경태와 김승주에게 대통령 표창 결정.

일침 한의원의 경사였다.

“와아아!”

한의원이 뒤집어졌다. 당장 류수완 대표가 달려와 저녁을 거하게 쏘았다.

“원장님을 위하여!”

건배 제창은 승주가 맡았다. 다른 때와 달리 하늘을 찌를 듯한 목소리였다. 밤도 윤도네 분위기를 따라 씩씩하게 깊어갔다.

국민훈장 무궁화장-2

국민훈장 무궁화장-2

짝짝짝!

윤도가 들어서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청와대였다. 윤도 옆에는 진경태와 승주가 있었다. 대통령이 다가와 윤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외교부장관과 한중관 차관도 도착해 있었다.

“채윤도 선생.”

“......”

“진심으로 고맙소. 진심으로 수고했소.”

“감사합니다.”

“들어가시죠. 안에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몸소 안내를 자청했다.

영빈관으로 들어서자 위안부 할머니들이 보였다. 눈으로 세어보니 14명이었다. 다들 오고 싶어했지만 올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나날이 고단한 시간을 보낸 할머니들. 이제 세월의 무게마저 지탱하기 어려운 나이가 된 것이다. 참석자들도 그나마 휠체어가 대부분이었다.

짝짝!

그 분들도 박수를 쳤다. 느린 박수지만 그 어느 박수보다 뜨거운 박수였다.

“일본정부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한 채윤도 한의사입니다.”

비서관이 윤도를 소개했다.

짝짝짝!

박수 숫자가 늘었다. 그래도 박수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청와대 직원들이 할머니들 박수보다 크게 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 배려만큼은 윤도를 심쿵하게 만들었다.

윤도가 대통령과 함께 인사를 시작했다.

“고마워.”

첫 번째 할머니가 윤도 손을 잡았다.

“아닙니다. 건강하셔야죠.”

“니가 진짜 대한민국의 아들이어.”

할머니는 윤도 손을 놓지 않았다. 오열이 깊은 바람에 오 분도 넘게 서있었다.

“점례야, 내도 그 손 한 번 잡자.”

옆 할머니 목소리가 나오고서야 첫 할머니가 손을 놓았다.

“아이고, 내 새끼... 니가 내 새끼다.”

두 번째 할머니는 포옹이었다. 주름 깊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윤도 볼에 닿았다. 할머니들은 누구 하나 건성으로 윤도를 맞이하지 않았다.

“채 선생.”

인사가 끝나자 대통령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예.”

“격식을 갖춰서 드려야겠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훈장을 주고 싶습니다. 어르신들이 보는 앞에서...”

“저는 상관없습니다.”

“오 비서관, 들었지? 진행하고 식사하러 가자고.”

대통령이 소리쳤다.

“채윤도.”

비서관으로부터 윤도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귀하는 탁월한 의술을 통하여 국가의 발전과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다음 훈장을 수여합니다.”

대통령 앞의 윤도가 단정하게 시선을 들었다. 대통령은 웃고 있었다. 그 어떤 훈장수여보다 흐뭇한 대통령이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비서관의 말과 함께 윤도가 앞으로 나섰다. 보조직원이 훈장을 들어보였다. 훈장을 집은 대통령이 윤도에게 훈장을 달아주었다.

짝짝!

할머니들의 느린 박수는 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피곤한 기색 따위는 없었다.

“다음 진경태.”

호명에 따라 진경태가 나왔다.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뒤를 이어 승주에게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승주는 벌어진 입을 다무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어르신들. 많이들 드십시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대통령이 식사를 권했다. 식사는 한방죽이 준비되었다. 할머니들을 위한 배렸다.

“원장님...”

죽그릇을 앞에 둔 승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죽에 알레르기 있어?”

“아뇨. 너무 감격해서요.”

“흐음, 그럼 물부터 마셔. 체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겠어요. 저 숨도 잘 못 쉬겠거든요.”

“이렇게 해봐.”

윤도가 승주의 혈자리 하나를 눌러주었다. 그제야 호흡이 펴지는 승주였다.

“많이 먹어요.”

앞 자리의 한중관이 윤도를 챙겼다. 윤도는 꾸벅 인사로 답했다.

“우리 채윤도 한의사가 국가의 보배입니다. 어르신들을 위해서도 큰일을 했지만 저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윤도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침도 잘 놔?”

할머니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요? 저도 지난번에 맞아봤는데 요즘 말로 직빵이더군요.”

“그럼 나도 한 대 놔줘. 가슴팍이 답답해.”

할머니가 울상을 지었다.

“나는 허리 한 번 펴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나는 똥이 창사구에서 말라 붙어가지고 안 나와.”

창사구는 창자의 사투리다.

“그것이... 머리칼도 나게 할 수 있나?”

한 할머니는 머리를 들이댔다. 원형탈모가 일어난 할머니였다.

“이 할망구야, 머리카락은 나서 뭐하게?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게?”

할머니들의 하소연은 길게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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