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265)

‘네.’

윤도의 눈이 대답했다.

안미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침을 넣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

그 말이 맞았다. 뜬 구름 잡는 강의가 아니라 생생한 실전 한 편. 안미란은 약간 서툴지만 소산화법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같은 시침이지만 안미란은, 등골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해내고 말았다. 치열한 집중력으로 막막하던 선을 넘은 것이다.

“와아!”

복도로 나온 안미란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별 거 아니죠?”

윤도가 물었다.

“별 거 아니긴요?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겁 먹지 말고 자꾸 써먹으세요. 이제 감 잡았으니까 열 번만 하면 익숙하게 놓을 수 있을 겁니다.”

“아우, 아예 선생님 한의원에서 배우면 좋겠는데... 저 인턴 끝나면 선생님 밑으로 가면 안 돼요?”

“당분간 자주 올 거니까 나중에 타박이나 마세요. 귀찮은 일 맡겼다고.”

“쳇, 저 쫌팽이 아니에요. 닥치고 도울 테니까 일 년 내내라도 오세요.”

안미란은 기꺼웠다.

그녀를 위해 야간 시침에 동행을 해주었다. 윤도의 든든함을 안고 안미란이 도전에 나섰다. 두 번째 환자에서는 떨었지만 세 번째 환자에게는 떨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오늘 밤, 잊지 못할 거 같아요. 제가 소산화침을 놓게 되다니...”

“앞으로는 양자법도 영수보사법도, 용호교전법도 문제 없을 겁니다.”

“정말요?”

“그럼요. 안 선생님 침술재주 보통 아니거든요.”

“고맙습니다. 제가 목숨 걸고 도울 테니 이번 논문은 꼭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에 발표하세요.”

안미란이 주먹을 쥐어보였다.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

그 단어에 윤도가 웃었다. 다른 분야는 모르지만 임상의학저널에서는 넘버원이다. 사이언스나 네이처, 셀보다도 권위를 자랑한다. 꿈 같은 단어를 뇌이며 병원을 떠났다. 어두워진 시간만큼 치매 논문의 자료가 쌓여갔다.

차곡차곡!

담도암과 붕어회-1

담도암과 붕어회-1

치매.

인간을 슬프게 만드는 질병 중의 하나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어온다.

슥슥삭삭.

날마다 기억을 지워댄다.

치매 영약은 산해경에 명시적으로 나온다. 평균수명이 짧았을 먼 과거에도 치매는 기승을 부렸던 걸까? 원산지는 북산경의 용후산이다. 결결수라는 물줄기가 이 산에서 시작되어 황하로 간다. 이 물 속에 사람 목소리 닮은 소리를 내는 물고기가 있다. 이것을 약으로 삼으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윤도는 물론, 이 물고기를 확보했다. 진경태로 하여금 집중 분석하게 시켰다. 다는 아니지만 일부 성분을 얻었다. 윤도의 치매 약침의 베이스 중의 하나로 삼은 것도 이 성분이었다.

단백질의 뒤엉킴으로 오는 알츠하이머성.

뇌의 작은 혈관이 막혀서 야기되는 혈관성.

전자의 신약은 윤도가 나길 길을 알고 있었다. 원래 뇌세포는 한 번 뿐인 삶을 산다. 재생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윤도의 신약 원리는 재활에 속했다. 재생과 재활은 다르다. 재생은 새로운 세포가 살아나는 것을 뜻하지만 재활은 기능이 떨어진 뇌세포를 자극해 정상 수준으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뒤엉킴으로 기능을 못하는 뇌세포를 펼쳐 기능을 찾게 하는 게 그와 다르지 않았다.

“청와대요?”

비가 오는 날, 원장실을 나설 때 진경태가 물었다.

“예.”

“섭섭하지 않습니까?”

“아뇨.”

진경태의 질문에 윤도가 고개를 저었다. 진경태의 의미는 대통령 주치의였다. 부용의 의견을 듣고 고사한 주치의. 대통령은 그 뜻을 받아들여 자문의로 위촉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결과와 위촉장을 주기 위해 윤도를 호출한 것이다.

“역시 원장님은 레벨이 달라요. 저번에 호통치던 김남수 씨 같으면 열 일 제치고 타이틀 잡으려고 혈안이었을 텐데...”

“그분도 훌륭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강원도에서 여기까지 후학을 체크하러 오셨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군요.”

“이거 약침 수정표인데 성분조절 좀 해주세요.”

윤도가 치매 신약에 대한 자료를 내밀었다.

“병원들 자료로군요?”

“예, 광희한방대학병원하고 SS 병원의 자료에서 뽑은 거예요.”

“알겠습니다. 염려마시고 잘 다녀오시기나 하세요.”

진경태가 웃었다.

“원장님.”

진경태 뒤에 있던 정나현이 다가섰다.

“예약환자 진료라면 남은 거 알고 있습니다.”

“바쁘실 거 같아서 연기하려고 했는데 이 분이 워낙 먼데서 오는 데다 하도 간절한 분이라서...”

“얼마나 멀어요?”

“밀양...”

“멀긴 하네요. 도착하시면 문자 넣어두세요. 청와대에 물었더니 간단히 위촉장 받고 차 한 잔 마시는 자리라니 2시간 정도면 될 거 같네요.”

“알겠습니다.”

정나현이 나와 입구 문을 열어주었다.

부릉!

시동을 걸고 도로에 올라섰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오늘 자리에는 손석구도 참석한다는 전갈이 왔다. 그도 자문의 위촉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주치의 거절은 잘한 일 같았다. 소위 노가다라는 ‘중증외상’ 환자치료에 한평생을 바쳐온 손석구. 그런 사람 앞에서 윤도가 주치의로 위촉이 되면 그의 상실감은 어떨까? 어차피 윤도에게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타이틀. 그렇기에 한결 마음이 가벼운 윤도였다.

“채 선생님.”

청와대에 도착하자 손석구가 윤도를 맞았다. 그는 다른 의사와 함께였다. 그가 윤도를 의사에게 소개해주었다. 피부과 자문의를 맡은 사람이었다.

“도쿄대첩을 듣고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피부과 자문의는 SR병원 부원장이었다.

“별 말씀을...”

“아닙니다. 미나토라는 일본인의 피부암을 고치고 문화재를 반환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는 천 년 묶은 산삼이라도 썼나 생각했는데 이번 도쿄에서의 방사능 피폭자들 치료를 보고 반성을 했습니다. 한방이 눈부시게 발전을 했군요.”

“그렇죠. 이제 한방이 우리 양방 위로 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채 선생님께 두 눈을 빚지고 있으니까요.”

손석구도 칭찬 릴레이에 끼어들었다.

“선생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긴요?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자리에 왔는데요? 선생님이 두 눈에 빛을 주고 나아가 추천까지 했다면서요?”

“그거야...”

“여기 정헌승 부원장님은 제 의대 선배십니다. 3년 선배인데 그때 갈굼 좀 당했죠. 그러니 혹시라도 피부과 협진하자고 하면 거절하십시오. 저한테 싹싹 빌고 오면 해준시다고 하고...”

“아이고, 손 선생, 해부실에서 일어난 일을 아직도 우려먹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제대로 굴릴 걸 그랬구만.”

웃는 사이에 비서관이 나왔다.

“세 분, 들어오시죠. 대통령님이 나오십니다.”

“가시죠.”

손석구가 앞장을 섰다. 윤도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짝짝짝!

박수와 함께 대통령이 입장했다. 비서실장과 비서관 둘이 대통령을 수행했다. 접대실에 초대된 의사의 숫자는 모두 여섯이었다. 한의사는 윤도가 유일했다.

“이렇게 다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제가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 같은 기분입니다.”

대통령이 덕담을 시작했다.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 있을 겁니다. 채윤도 선생, 일어나 인사를 하시죠.”대통령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윤도가 일어나 좌중을 향해 인사를 했다.

“한의학을 하는 채윤도입니다. 쟁쟁한 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짝짝!

윤도가 인사하기 무섭게 손석구가 박수를 쳤다. 다른 의사들도 동참을 했다.

“아시다시피 채 선생이 이번에 도쿄대첩으로 불리는 엄청난 외교적 성과의 발단을 맡아주었습니다. 외신도 주목하는 바 방사능 피폭으로 야기된 암 환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예가 드문 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서 저도 이미 채 선생에게 소소한 건강관리를 받아 그 침술능력을 알기에 우리 전통의술인 한의학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천명할 겸 대통령 자문의로 위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함께 의견을 나누며 부족한 이 사람의 국정수행을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통령이 다가와 윤도의 어깨를 짚었다.

짝짝!

다시 박수가 실내를 울렸다.

차가 나오고 잠시 담소가 오가게 되었다. 주치의와 자문의들의 관심은 온통 장침에 꽂혀 있었다.

“어떤 원칙으로 암치료를 실시했습니까?”

“약침의 성분을 좀 알 수 있습니까?”

“침을 넣어 암세포를 직접 공략하는 게 가능합니까? 내시경이나 수술로봇을 넣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한 마디 한 마디가 보태지더니 결국 뜨거운 질문까지 나오고 말았다.

“그렇다면 부작용은 어떻습니까? 기혈이나 혈자리라는 게 결국 한의사의 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텐데 고난도 침술을 펼친다는 건 부작용에 대한 위험성 또한 함께 높아진다는 뜻 아닌가요?”

“......”

질문 뒤에 침묵이 이어졌다. 의사들은 모두 윤도를 주목하고 있었다.

“제 침에 대한 부작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도가 잘라 말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말입니까?”

“그전에 묻겠습니다. 혹시 수학은 과학과 통하는 지요?”

“그야 당연한 말을...”

“그럼 인도의 천재수학자 라마누잔을 아시는지요?”

“들어는 보았소만.”

“누군가 수학의 길을 물으니 그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나마기리 여신이 복잡한 수학 공식과 정리가 적힌 두루마리를 눈앞에 보여준다. 그 말에 빗대 편작과 화타가 침술의 길과 혈자리를 보여준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허어.”

윤도의 답에 질문을 던진 자문의가 탄식을 토했다.

“명언이군요.”

손석구는 윤도를 지지하고 나섰다.

“과학의 짝으로 불리는 수학자 역시 영감은 신에게서 받는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채 선생이라고 신에게 영감을 받지 못한다는 법이 없지요.”

“......”

“저도 중증외상환자들 치료를 맡고 있지만 솔직히 환자의 목숨을 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로 채윤도 선생의 쾌거를 흐릴 자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손 선생, 내 채윤도 선생을 폄훼하자는 게 아니라 믿기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라오. 전기자극도 없이 달랑 침으로 암 치료라니.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어느 한의사나 보편적으로 가능하다면 암 환자와 난치병 환자치료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일입니다.”

“실은...”

듣고 있던 윤도가 운을 떼고 나왔다.

“그래서 향후 고도의 침술능력을 갖추는 특별한 한의사 양성 대학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

윤도의 한 마디에 자문의들의 입이 벌어졌다. 정작 그 말을 한 윤도는 소탈하게 웃을 뿐이다. 어쩌면 조크로 들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도는 계산된 발언이었다.

공표!

그건 인간에게 책임감을 갖게 만든다.

나 올해 금연이야.

나 올해 살 10kg 뺄 거야.

선언하는 순간 책임감이 따른다. 실없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실천해야 한다. 지금 윤도 앞에 앉은 사람들은 대한민국 현대의학을 대표하는 거물들. 거기에 대통령과 비서관들까지 있는 자리. 그렇기에 윤도의 책임감도 그만큼 강력하게 요구되는 발언이었다.

주치의와 자문의들 침묵했다. 발언을 한 사람은 딱 하나였다.

“채 선생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도 손석구였다.

“하핫, 역시 채 선생이 화제로군요. 앞으로 이런 자리 자주 마련해야겠습니다.”

대통령이 마무리를 했다. 윤도는 따로 자문의 위촉장을 받고 경내를 나왔다.

“채 선생.”

손석구가 따라나올 때 펑 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이었다. 성수혁 차장도 보였다. 마침 윤도 핸드폰이 울렸다. 정나현이었다.

“아, 정 실장님.”

윤도가 전화를 받았다.

“원장님, 통화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어요?”

“다른 게 아니고... 밀양에서 예약환자가 왔는데... 119 구급차를 타고 왔어요.”“밀양에서 119를요?”

“그게 아니고 오는 길에 보호자에게 문제가 생겨 도중에...”

“환자가 아니고 보호자라고요?”

“이 분이 생활침을 놓는데요, 오는 길에 배가 아파서 자기 상복부에 자침을 했는데 그게 절침이 되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네요. 일단 병원에 가서 X-ray라도 찍어보라고 해도 막무가내세요. 원장님 같은 신침 침술이면 절침된 침조각도 꺼낼 수 있을 거라고...”

“......!”

“급한 모양인데 가보세요.”

옆에 있던 손석구가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차라도 한 잔 같이 마실까했는데 아쉽군요.”

“그럼 같이 가시죠. 저희 한의원에 좋은 차가 있습니다.”

“그럴까요? 채 선생님 한의원 구경도 할 겸.”

손석구가 동의를 했다. 거기에 한 명이 추가로 붙었다.

“저도 끼워주시죠.”

성시혁 기자였다.

바릉.

윤도의 차가 출발을 했다. 선두는 성시혁의 취재차량이 맡았다. 그가 윤도를 위해 경광등을 켜고 진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 뒤로 두 대의 차량이 따르고 있었다. 손석구와 성시혁 차장의 자가용이었다.

절침...

윤도는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녀도 구식 침을 쓰는 게 틀림없었다. 최근의 한의원에서 쓰는 침들은 부러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절침된 침을 빼는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외과적 수술을 단행해야 한다. 부위가 복부라니 위험할 수도 있었다.

“원장님.”

한의원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승주가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