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65)

“이거 나쁜 땅 아니에요. 원래는 특목고 지으려고 학교부지로 확보한 땅인데 지금은 특목고 분위기가 아니라서 내놓은 거거든요.”

“학교부지라고요?”

그 단어에 윤도가 반응을 했다.

“진짜 괜찮은 땅인데...”

“어딘...데요?”

“하남시요. 하남이라고 해도 강동구하고 거의 닿았어요. 중개업자 말로는 입질이 많아서 가격절충 중이라고...”

한 시간 후, 윤도는 하남시에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그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장명화의 말을 듣기 무섭게 달려온 윤도였다.

휘잉!

언덕 위의 바람은 차가웠다. 베이징에 독감이 유행이라더니 그 바람이 오는가 싶었다.

‘헤이싼시호...’

한강에 중국의 호수가 겹쳐왔다. 색깔이야 한강이 청명하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그 때문인지 부지가 마음을 끌었다.

윤도가 이 땅을 품었다. 지불한 비용은 10억이었다. 시가는 그 액수를 가볍게 뛰어넘지만 장명화가 애당초 매입한 원금이었다. 윤도가 매입의사를 밝히자 그녀는 원금만을 원했다. 양도차익은 치료비로 하자고 했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고 나왔다. 윤도를 위한 장명화의 배려. 윤도가 그 마음을 받았다.

“선생님.”

토지에 대한 정리가 끝나자 석재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 뒤로 푸른 한강이 넘실거렸다.

“말씀하세요.”

“덕분에 검사임용 될 거 같습니다.”

“석재우 씨의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이지요. 아울러 어머니도...”“여기다 한의대학을 세우고 싶으시다고요?”“아직은 꿈에 불과합니다.”

“다 좋은데 혹시 학생들이 붕어나 모래무지 같은 건 못 잡게 하세요. 저처럼 생식하다 담도암 걸리면 곤란하니까요.”

“석 검사, 무슨 걱정이야? 채 선생님이 그 학생들에게 담도암 치료 침술까지 다 알려주실 텐데.”

장명화가 끼어들었다.

“어, 진짜 그렇네요? 저는 제가 하도 놀라서...”

석재우가 뒷목을 긁었다.

“이제 곧 검사님이 되신다니 담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담 이야기요?”

“지금 우리가 대담하게 담도암을 걷어찼잖습니까?”

“......?”

“우리가 흔히 과감한 사람을 일러 대담(大膽)하다고 하고, 겁 모르는 사람을 담력(膽力)이 세다고 하잖아요? 그때 말하는 담(膽)이 바로 쓸개로 불리는 담입니다.”

“아... 들은 거 같습니다.”

윤도가 부연하자 석재우가 화답을 했다.

“용감하고 배짱 좋은 사람을 담이 크다고 하는데 실제 제갈공명의 부하로 나오는 강유 같은 사람이 그렇답니다. 그의 사후에 쓸개를 보게 되었는데 쓸개의 크기가 무려 한 말(斗)이나 되었다고 하더군요. 말 그대로 대담한 사람이죠?”

“그렇군요.”

“담, 즉 쓸개는 우리 몸에서 저울추의 역할로 균형을 잡아주지요. 검사님이 되시면 강유보다 대담한 마음으로 의로운 길을 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태어난 담이니 그럴 수 있겠죠?”

“명언이군요. 다른 건 몰라도 날마다 담을 웨이트(?) 시켜서 국대급 담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대담한 검사가 되어 사회정의를 구현해 보겠습니다.”

석재우가 웃었다. 다짐 때문인지 미소도 매우 대담해 보였다.

치명적 약물 알레르기 아나필락시스-1

치명적 약물 알레르기 아나필락시스-1

짝짝짝!

박수가 나왔다. 대통령 자문의 위촉장에 보내는 축하였다. 위촉장은 원장실에 걸었다. 한 쪽 벽에 걸린 스펙 액자들...

병원이나 한의원에서 흔히 보는 연출이다. 언뜻 보면 굉장한 것 같지만 뜯어보면 별 것도 아닌 경우도 많다. 그런 것일수록 영어 표기가 많다. 윤도가 몇 달 부원장으로 있던 반월 한의원도 그랬다. 한의학은 중국의 학회나 세미나가 많으니 거길 다녀온 증표를 주르륵 내건 것이다. 절반 가까이는 영양가 없는 ‘참가증’이었다.

윤도는 그러지 않았다. 의술은 스펙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 받아야했다. 그렇기에 자문위 위촉장도 평범하게 걸었다. 직원들은 반대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윤도에게, 대통령 자문의 위촉장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아버지 지인들과 관련된 환자들을 받았다. 모두 치매환자였다. 아버지의 부탁이기도 했고 윤도가 추진하는 신약개발과 맞물리기도 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네 명의 환자 중에 둘은 거의 제정신으로 돌아갔고 둘은 한 번 더 시침을 예약하고 보냈다. 네 명 다 현저한 차도를 보인 건 물론이었다.

“잘 되어가고 있어요?”

잠시 짬을 내어 약제실에 들렀다. 한 청년이 약제를 볶는 기계 안에 뭔가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 장치는 진경태의 작품이었다. 그가 흑마늘을 숙성 시키는 기계에 착안해 맞춤 주문한 기계였다.

“장비가 고장 났나요?”

윤도가 물었다.

“아닙니다. 몰카 좀 장치하느라고요.”

진경태가 대답했다 .

“몰카요?”

“약이 볶아지는 과정을 찍으려고요. 마침 종일이 친구가 몰카 전문가라기에...”

“......?”

“어이쿠, 우리 원장님, 몰카라니까 놀라시네. 그게 뭐 여자들 치맛속 찍는 몰카가 아니고 방범용이나 연구용 초소형 카메라랍니다. 이번에 샘플이 나왔는데 성능 실험도 할 겸 하나 달아주겠다네요.”

“안녕하세요?”

진경태의 말에 청년이 인사를 해왔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허리에 디스크가 있어서 장침을 찔러주었던 윤도였다.

“필요하시면 말씀을 하시지...”

“딱히 필요하다기 보다 볶아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면 더 좋은 성분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효과가 있으면 하나 사겠다고 했으니까 그때 원장님께 비용 청구하겠습니다.”

“치매 약제는요?”

“조금 전의 케이스를 포함해서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원장님이 SS병원과 JJ병원 등지에서 가져오는 데이터 덕분에 진도가 빠릅니다.”

“다행이네요.”

“오늘도 SS병원 가셔야하죠?”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아이고, 우리 원장님, 내가 빨리 원심분리술에 마법을 접목 시켜서 두 명으로 만들어드려야 할 텐데...”

“뭐 기왕 하는 김에 한 네 명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청년을 보조하던 종일이 끼어들었다.

“아니야. 그랬다가 네 분이 마구 처방내면 우리 녹아난다. 그냥 현실에 만족하자.”

진경태가 손을 저었다.

“아저씨.”

“예?”

“이번에 독일 가게 되면 저랑 같이 가세요. 그쪽 실험실 견학도 할 겸...”“어이쿠, 그러면 영광이죠.”

“여권 준비, 아셨죠?”

“예!”

진경태가 또렷하게 답했다.

여자 환자 몸의 침을 뽑고 마무리를 할 즈음, 인터폰이 울렸다.

“원장님, 전화예요.”

연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아, 채윤도 선생님?”

수화기 속의 낯선 목소리가 뒷말을 이어갔다.

“저 SS병원 알레르기 내과과장 변치웅입니다.”

“예... 말씀하세요.”

“오늘 저희 병원에 치매환자 협진 오시죠?”

“그렇습니다만...”

“아, 이거 저도 좀 황당한 케이스인데...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서요.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SS병원의 알레르기 내과과장.

그는 이번 협진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뭘 도와달라는 걸까?

저녁 무렵 윤도의 차가 SS병원 주차장에 멈췄다. 윤도를 마중 나온 사람은 신경정신과 레지던트였다. 과장은 퇴근한 모양이었다. 부원장 이철중과 강기문도 퇴근을 했다기에 알레르기 내과과장을 먼저 만났다.

“여깁니다.”

인턴이 병실을 열어주었다. 과장은 그 안에 있었다. 20대 중반의 남자환자 앞이었다.

“과장님, 채윤도 선생님 오셨습니다.”

인턴이 과장에게 보고를 했다.

“혹시 한의대에서도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에 대해 배우십니까?”

복도로 나온 과장이 윤도에게 물었다.

“알레르기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배우고 있습니다만...”

“방금 환자가 아낙필라시스 쇼크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

“혈압이 50mmHg에서 30mmHg까지 떨어져서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겨우 조치를 했고...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예측되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위험한 상황?’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이 환자가 공교롭게도 피부검사와 알레르기 검사 자체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오는 특이체질인데 현증은 약물 알레르기가 확실하다는 거죠. 환자의 경험과 증세에 의하면 소염진통제 알레르기 같은데 아나필락시스 쇼크 중에서도 알레르기 반응이 신경 뿐만 아니라 혈관 쪽에서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초인가요? 후두부인가요?”

“후두부입니다.”

“......!”

과장의 말에 윤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나필락시스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기전이었다. 예를 들어 신경 쪽이라면 자극에 의해 가려움이나 경련 등을 유발하지만 혈관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만약 인두 부분에 점막부종이라도 생기면 기도가 막히게 된다. 기도가 막히면 숨을 쉴 수 없다. 누구라도 결론을 유추할 수 있는 무서운 일이었다.

“점막부종이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그대로 두면 기도 폐색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전신 기능부전까지 이를 수 있지요.”

“수술은요?”

“그게... 환자가 완강히 거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부하는 이유가 있나요?”

“어차피 불치라는 거죠. 이 환자가 어릴 때부터 피부 묘기증을 달고 산 모양이더군요.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전신으로 번지는 일이 있었는데 혈액검사를 받았더니 알레르기 이상은 나오지 않았답니다. 아까 말했지만 특이체질이라서요. 그러다 보니 이따금 일어나는 두드러기 정도로 치부하며 그냥 살았는데 이번에 약물 알레르기라는 확진을 받게 되자 그 충격으로 비관에 빠진 모양입니다.”

“보호자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어머니가 계셨는데 몇 해 전에 유방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는군요.”

“......”

난감.

병원이 처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생명을 위협 받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환자는 수술 거부. 거기에 약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니 투약도 조심스러울 판이었다. 알레르기 내과 스태프 비상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윤도 이름이 나왔다. 이철중과의 협진 이후로 SS병원 닥터라면 다들 알고 있는 채윤도. 한 번 부탁을 하자는 제의였다.

“어떻습니까? 한 번 보시겠습니까?”

과장이 물었다.

“그러죠.”

윤도가 요청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병실에 들어선 윤도가 환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환자의 이름은 최윤태, 나이는 27세였다. 대꾸하지 않는 환자의 몸에는 홍반과 발진 두드러기가 요란했다. 게다가 거의 전신형...

두드러기에도 종류가 많다.

1) 콜린성 두드러기

2) 한랭 두드러기

3) 임산부 두드러기

4) 피부 묘기증

5) 맥관부종...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반가울 리 없는 질환이다. 두드러기도 피부질환이니 한방에서는 폐와 대장의 문제로 본다. 그러나 일부 증상들은 발병 후 오래지 않아 사라지기에 치료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발병 초기에 잡지 않으면 만성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심해지면 아나필락시스까지 초래할 수 있었다.

“수술 필요 없어요. 그냥 살다 죽게 냅두세요.”

환자의 반응은 자포자기 수준이었다.

“수술은 안 해요. 침만 몇 대 맞으면 되는데?”

윤도가 환자의 시선 앞에 장침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환자가 고개를 돌렸다.

<채윤도>

윤도 가운에 달린 의사신분증이 보였다.

“어, 선생님이 채윤도?”

환자가 알은 체를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위태로웠다. 인두의 점막부종이 심해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저 알아요?”

“잠깐만요.”

환자가 뒤척이자 윤도가 핸드폰을 디밀었다. 채윤도라는 검색어를 넣은 결과였다.

“진짜 채윤도네?”

환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생님이 여기 의사예요?”

청년이 물었다.

“가끔 협진을 해요. 오늘 오는 길에 최윤태 씨 얘기를 듣고 왔지요.”

“선생님 장침이 진짜 편작 화타급 명침이에요? 사실 선생님 소문 듣고 찾아가볼까 생각을 해보기는 했는데...”

“그런데 왜 안 왔나요?”

“몇 번 전화하기는 했는데 계속 통화 중이어서...”

“예약하려했군요?”

“예...”

“그 예약 여기서 접수해 드리죠.”

“......?”

“약물 알레르기... 쉬운 병은 아니지만 나을 수 있어요. 손 좀 줘볼래요?”

윤도가 청하자 청년이 손을 내주었다. 그 자리에서 진맥에 돌입했다.

‘폐, 대장, 신장...’

오장 중에서 이상 신호를 보낸 건 세 장부였다. 인후두의 점막부종도 확인되었다. 꽤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혈자리 쪽에서는 다양한 신호가 건너왔다.

‘합곡, 곡지, 족삼리, 혈해, 대추, 견우, 인영, 내정, 삼음교, 태충, 행간...’

그 중에서도 사기가 많이 깃든 혈은 인영과 곡지, 견우, 그리고 내정혈이었다.

“침 몇 방이면 되겠어요.”

진단을 내린 윤도가 말했다.

“정말요? 완전히 낫는 건가요?”

“일단 급한 불은 끄고... 완치는 탕제를 좀 먹어야 해요. 그건 내가 여기 과장님과 상의해서 조절해볼 게요.”

“그 탕제 굉장히 비싸죠?”

“돈 없으면 할부로 해드릴 게요. 천천히 갚아도 되요.”

“우와.”

환자가 반색을 했다. 조금 전까지 의료진을 배척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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