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65)

치매는 참 곤란한 녀석이다. 예방책이라는 게 있지만 알고 보면 무용지물이기에 더욱 그렇다.

<머리를 안 쓰면 치매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까 치매 걸릴 확률을 낮추려면 두뇌를 써야한다.

그런데...

<머리를 너무 써도 치매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이 말을 들으면 한숨이 나온다. 어쩌라는 건가? 결론은 하나다. 인간의 몸은 기혈의 조화다. 그 조화와 평형이 깨지면 반드시 질병이 따라온다. 결론은 적당히...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알맞게....

군대로 치면 중간만 가라였다.

시침을 마친 윤도는 치료과정을 메모했다. 혈자리의 반응특성을 문자로 정리하는 것이다. 허준의 흉내를 내는 건 아니었다. 좋은 치료사례는 침술에 처음 입문하는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치매 치료약의 포인트를 찾는 데도 데이터가 되었다.

메모를 마치고 돌아설 때였다. 정신이 맑아진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의사 양반, 군대 갔다 왔어?”

“......”

잠시 대답을 못했다. 군대를 갔지만 할머니가 아는 ‘군대’는 아니었다.

“예...”

대답이 나왔다.

“군대에서는 너무 튀면 밟힌다지? 적당히가 좋은데... 우리 손주 녀석도 중간만 가야할 텐데 말이야...”

할머니의 끝말이 윤도 마음을 찔러왔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윤도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윤도는 한동안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중간만 가라.

군대가 아니라 일상의 건강관리에 필요한 진리였다. 음주도, 음식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간이 좋다.

침을 통해 이심전심이 된 걸까? 치매 할머니 치료를 통해 한 수 배우는 윤도였다.

다음 환자는 중국동포였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도 중국동포 환자들이 종종 눈에 보였다. 세계가 중국과 호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이미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윤도에게도 상상불허의 사건이 닥쳐왔다. 그 또한 중국발(中國發)이었다.

최고의 갑부, 최악의 HIV-1

최고의 갑부, 최악의 HIV-1

한 주 동안 윤도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예약은 아무리 가리고 가려도 딱한 사람들 때문에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소개로 오는 사람은 자꾸 늘었다. 가장 큰 애로는 탕제였다. 규격화된 약재의 약성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하지만 약성의 정기(精氣)가 우수한 심심산골이나 섬의 약재는 공급에 한도가 있었다.

그나마 진경태의 활약 덕분으로 버텼다. 약초꾼 생활을 하면서 쌓아둔 인맥을 백 분 활용한 그였다. 게다가 그는, 주말이면 매번 산으로 떠났다. 새벽 같이 떠났다가 해가 지면 산에서 내려왔다. 윤도를 위한 산행이었다. 새로 온 종일을 위한 교육이기도 했다.

산 사나이 진경태.

길몽을 꾸었다는 주말에 대물들을 구해왔다. 면역력 성분이 탁월한 상황버섯, 운지버섯, 잎새버섯 등을 득템한 것이다. 윤도가 장침을 위해 태어났다면 그는 약초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 분명했다.

그렇게 확보된 약재의 성분은 기가 막혔지만 그 또한 그냥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약재마다 외부공인기관에 샘플을 보내 안정성 검사를 받았다. 약제실에도 장비가 있지만 그건 국가공인이 아니었다. 시간과 돈의 낭비가 아닐 수 없지만 인체를 위한 약이니 만전을 기했다.

화요일, 수요일 양일은 더욱 법석이 일었다. 미우와 미나토 때문이었다. 둘이 작당을 하고 방사능 피폭 환자 여섯을 데려온 것이다.

그 주최는 미나토였다. 미나토는 윤도에게 두 개의 빚을 지고 있었다. 자신의 피부암이 그랬고 지인 정치가들의 회복이 그랬다. 그랬기에 미나토, 이번에는 사심 없는 ‘기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피폭 환자 다섯을 찾아냈다. 모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왕복 항공 및 체류비 전액 미나토의 부담.

그 조건을 걸고 윤도에게 치료를 부탁해 왔다. 미우의 지원사격도 있었다.

“데리고 오세요.”

윤도가 제의를 받았다. 앰뷸런스는 광희한방대학병원의 지원을 받았다. 윤도가 잠깐 빌릴 수 없냐고 묻자 부원장이 기꺼이 내준 것이다. 비용은 무료였고 혹시 모를 이동 중의 응급조치를 위해 안미란까지 파견해주었다.

여섯 환자를 이틀로 나눠 치료했다. 다섯이 여섯이 된 건 윤도 때문이었다. 한의원으로 진료타진을 해온 일본인 중에서 한 명을 추가했던 것.

여기서 해프닝 하나가 일어났다. 몰카 사건이었다. 사건의 주인공은 40대의 일본여성이었다. 그녀만은 굳이 작은 손가방을 지니고 있기를 원했다. 별 것 아니기에 윤도가 허락했다. 그 안에 몰카가 있었다. 굉장히 정밀한 몰카였다.

출처는 일본의학계였다. 여성이 윤도에게 치료 받으러 가는 걸 알게 된 일본의학계가 검은 손을 뻗친 것이다.

“심부름 하나만 해주면...”

그들이 여성 환자에게 천만엔의 딜을 제의했다. 가방을 가져가 치료장면을 찍으면 되는 거였다. 그걸 분석해 윤도의 침을 연구하려는 생각이었다. 치료과정을 통해 무슨 약을 쓰는지 알아내려는 ‘수작’이었다.

치졸한 마수는 종일의 눈썰미 덕분에 발각이 되었다. 진경태를 대신해 약침액을 가져왔다가 여성의 가방을 본 것이다. 그 왼편에 뚫린 콩알만한 구멍을 본 것이다.

‘몰카?’

누구도 생각지 못했지만 종일은 알았다. 몰카(?) 전문가인 친구를 둔 덕분이었다. 불손한 경우, 몰카를 그렇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몰카가 나오자 여성은 무릎부터 꿇었다. 그녀는 대성통곡이었다. 아는 사람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온 몰카 가방. 그것 때문에 자신의 병을 치료하지 못할 위기에 몰린 까닭이었다.

“경찰에 넘기시죠.”

진경태가 격노했지만 윤도는 치료를 마저 해주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일은 여성의 의도가 아니었다. 나쁜 건 일본의학계의 저급한 일부 인사들. 옳지 못한 방법을 환자에게 시켰다. 절망에 지친 환자에게 시킬 짓이 아니었다.

“그대로 가져다주세요. 아까 잠시 잠들었었죠? 나중에 뭐라고 하면 깜박 잠이 들어서 중간과정을 잘 모르겠다고 하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암이 완치된 여성은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해왔다.

몰카.

물론 그냥 보낸 건 아니었다. 탕약을 끓이듯 종일이 가공을 했다. 전문가인 종일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쯤 몰카 보낸 친구들 헤벌레 나사가 풀리고 있겠는데요?”

금요일 아침, 모닝 커피를 마시던 진경태가 말했다.

“얼마나 센 걸로 보냈어?”

윤도가 종일을 바라보았다.

“친구 놈 말로는 제일 쎈 걸로 심었다고 하던데요?”

“종일아, 말로 해서 되냐? 원장님께 샘플을 보여드려야지.”

“에? 그래도 되요?”

“아니면? 원장님은 남자 아니냐?”

“그랬다가 저 짤리면...”

“어허, 우리 원장님, 그렇게 쫌팽이 아니에요.”

“알았어요. 그럼 친구 놈한테 전화해 볼게요.”

“뭐 하려고요?”

지켜보던 윤도가 물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본 친구들이 뭘 보게 될 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진경태가 수상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아아”

“아아, 아아아, 아아!”

잠시 후, 약제실에 야릇한 신음이 울려퍼졌다. 종일이 돌리는 동영상 때문이었다. 화면에는 일본 AV가 돌고 있었다. 수위가 가장 높은 하드코어 계열이었다.

“아아아아!”

화면 속에서 AV 배우의 신음이 높아졌다. 남자배우의 피스톤 운동은 점점 더 빨라졌다. 남자배우는 하나 둘도 아니었다. 그들이 말하는 특집 대방출 화면이었다.

“이걸로 보냈대요.”

설명하는 종일의 볼이 붉어졌다.

“아, 진짜... 끄세요. 약에 부정 타겠습니다.”

윤도가 손을 저었다.

“하핫, 그럴 줄 알고 발기부전 약재료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그거라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진경태가 웃었다.

그 시간의 일본 도쿄.

진경태의 추측대로 의사 하나가 몰카를 넘겨받았다. 그는 그걸 가지고 병원의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거기 아홉 명의 거물 의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섯은 남자고 셋은 여자였다. 윤도의 방사능 피폭자 치료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음모를 기획한 일본의학계의 대표들이었다.

“틀어봐.”

70대 후반의 원로가 묵직하게 운을 떼었다. 몰카의 파일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았다. 윤도의 일침한의원이 나온 것이다. 심부름을 맡은 여성은 제법 눈치가 있었다. 가방도 진료실 전체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했다.

이윽고 윤도가 약침을 집어들었다. 의사들의 호흡이 멈췄다. 완전한 집중이었다.

그런데...

장침 다음에 돌연 화면이 바뀌었다.

“......!”

여의사들이 먼저 얼굴을 가렸다. 장침 뒤에 느닷없이 페니스가 튀어나온 것이다. 장침이 들어갈 혈자리에는 여자의 그것이 보였다. 기가 막히게 클로즈업된 여자의 그것. 거기 다가오는 남자의 페니스. 하지만 페니스는 발칙하게도 자신의 혈자리를 찾아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아래의 엉뚱한 구멍으로 골인한 것이다.

헛발질.

빗나간 음모를 꾸민 일본의사들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동영상이었다.

한일합방하듯 의술도 도적질하려고?

쉽지 않다.

그냥 원래 잘 하는 거나 하라고.

당신들 세계적인 AV 강국이잖아?

아아아.

아아아.

여배우의 신음은 자꾸만 높아졌다.

헛발질.

명백했다.

아홉 의사들은 할 말을 잃은 채 큼큼 헛기침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 시간 윤도는 색다른 방문객을 맞았다. 결혼을 앞둔 스떼빤의 여자 뤄샤오이였다. 그 차에서 어린이 하나와 두 명의 남자가 내렸다.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말씀드린 저희 외삼촌 첸슈에센이세요.”

뤄샤오이가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

***

첸슈에센.

그는 항주에서 유명한 한방종합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전공은 침구. 항주로부터 아래 쪽 남부지역에서 명의급으로 날리는 사람이었다.

동행한 아이는 환자였다. 이 전화는 화요일에 뤄샤오이로부터 받았다. 치료가 잘 되지 않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와도 좋겠냐는 말이었다. 전격적인 제의여지만 윤도가 수락했다. 보호자로 동행한 사람은 70줄의 노인이었다. 굳은 표정과 함께 아이 어깨를 짚은 팔의 각도가 어색해 보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50을 살짝 넘은 첸슈에센은 겸손했다. 윤도가 어림에도 깍듯함을 잊지 않았다. 윤도는 일단 한의원 안내부터 했다. 종합병원에 비하면 아담하니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와아!”

약제실에서 첸슈에센의 첫 감탄이 나왔다.

“이야!”

나노 침에서 두 번째 감탄이 나왔다.

첸슈에센과 윤도는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게 몸에 들어갑니까?”

첸슈에센은 나노 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가느란 실처럼 보이는 나노 침.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침에 대한 관심은 첸슈에센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보호자인 노인의 눈도 반짝거렸다. 첸슈에센보다 더 깊었다.

“이 아이가 환자입니까?”

윤도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자폐로군요?”

윤도가 물었다. 자폐아들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이였다.

“치료가 가능할까요?”

“진맥을 해봐야겠죠.”

“아, 예...”

첸슈에센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외삼촌이 선생님 침술 보고 싶어서 어제 밤을 설쳤다네요.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숨까지 넘어갈 태세예요.”

뤄샤오이가 웃었다.

“그럼 치료부터 해야겠군요. 한국까지 와서 숨 넘어가시면 곤란하니...”

윤도가 손톱을 물어뜯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이 진맥 좀 보려고. 잠깐이면 돼.”아이에게도 중국어로 말했다. 아이는 잠깐 동안 동작을 않더니 책상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보호자가 와서 머리를 잡아주었다.

자폐...

이 또한 쉬운 병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윤도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질환도 아니었다. 아이의 뇌 환경은 좋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시간이 오래 되었다. 덕분에 뇌 발달이 평균보다 미달이었다. 혈자리 반응은 세 군데로 집약되었다.

‘심수혈, 전중혈, 백회혈...’

“당장은 과잉자극에 대한 제어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치료가 필요합니다.”

“과잉자극 제어가 되겠습니까?”

첸슈에센이 격하게 반응했다.

“예.”

“확실합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여러 날 시침한 환자인데 도무지 차도가 없어서...”

“저는 심수와 전중, 그리고 백회혈자리를 잡을 겁니다.”

궁금한 첸슈에센을 위해 정답부터 공개했다.

“저도 몇 번 시도한 혈자리인데.. 약침을 쓰실 겁니까?”

“그냥 장침이면 됩니다.”

“허어.”

첸슈에센이 혼자 고개를 저었다.

“시침 준비 좀 부탁해.”

윤도의 지시가 승주에게 떨어졌다.

꿀꺽!

첸슈에센의 목으로 연실 마른 침이 넘어갔다. 뤄샤오이도 그랬다. 아이와 보호자는 달랐다. 아이는 그렇다고 쳐도 보호자는 좀 뜻밖이었다. 척 보기에는 할아버지 나이. 그렇다면 살짝 긴장할만도 한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깊은 눈만 우묵하게 움직일 뿐...

스슥!

침이 혈자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첸슈에센이 보기에는 그저 손을 몇 번 움직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침에는 소산화법과 득기가 실렸다. 어느새 삽제의 과정을 아홉 번이나 반복하면서 침을 넣은 것이다. 침은 아이의 혈자리에 우뚝 자리를 잡았다. 그 자신도 시침해본 자리이기에 잘 알고 있는 첸슈에센이었다.

‘과연...’

첸슈에센은 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카 뤄샤오이의 경우로 확인한 신침이었다. 그 마법의 효력이 궁금한 첸슈에센이었다.

꿀꺽!

그가 마른 침을 넘길 때 아이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물어뜯으려는 걸까? 그렇다면 윤도의 침은 불발탄?

손은 얼굴로 올라갔다. 첸슈에센은 숨을 멈췄다. 아이의 손이 입에 닿았다. 하지만, 물어뜯지 않았다. 그 손으로 입술을 문지른 아이, 다시 눈 쪽으로 움직이더니 눈을 비비고는 얌전히 내려놓았다.

“......!”

첸슈에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윤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이머를 맞추었다. 세팅된 시간은 25분이었다. 그때 아이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천정이었다. 천정에는 어린 환자들을 위한 벽지가 붙어있었다. 어린이 대통령으로 불리는 뽀로로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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