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거기서 천슈에센의 절제가 무너졌다. 아이의 손가락이 아니라 눈 때문이었다. 살짝 혼탁해보이던 아이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첸슈에센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떼었다. 아이 손을 잡았다. 진맥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아아...’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진맥이 변했다. 그 자신이 수 개월 동안 체크하던 자폐아의 진맥이 아니었다. 그건 정상아들의 진맥에 속했다.
“채 선생.”
천슈에센이 벼락처럼 윤도를 돌아보았다.
“대신 진맥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추가해야 할 혈자리가 있습니까?”
윤도가 물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천슈에센의 행동은 커다란 결례였다. 남의 진료에 끼어든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윤도의 침술을 보고 싶어 날아온 사람.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믿기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결례를...”
“괜찮습니다. 다만 진맥을 하셨으면 소견을 말씀해 주시죠.”
“소견...”
“한 군데 아쉬운 곳이 있을 텐데요.”
“......?”
“아닙니까?”
윤도의 시선이 첸슈에센을 겨누었다. 순간 첸슈에센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첫 진맥에서 언급없이 지나간 일. 침은 잘 놓지만 나이가 어려 놓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게...”
“제가 해결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주시면...”
대답하는 첸슈에센의 시선이 보호자에게 건너갔다. 보호자의 눈빛은 더 묵직해져 있었다.
개의치 않고 침을 뽑았다. 이번에는 호침이었다. 침은 아이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갔다. 그 반대의 왼쪽은 극천혈 자리였다. 침을 꽂은 윤도가 아이의 왼쪽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왼쪽 겨드랑이의 극천혈에서 절침된 바늘이 밀려나온 것이다. 윤도가 사용한 것과 같은 호침 조각이었다.
절침제거법.
거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윤도가 쓴 건 반대편 혈자리 공략이었다. 이 편을 자극하면 저 편의 절침이 밀려나온다. 물론 절정의 침술을 가진 한의사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 이 사람...’
첸슈에센의 등에 식은땀이 맺혀왔다. 이 절침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윤도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진맥 하나로.
더 놀라운 건 단박에 침을 제거했다는 것. 어떤 면에서 보나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침(神鍼)이다.’
첸슈에센이 전율하자 보호자가 절침 조각을 받아들었다. 그는 반대편으로 들어간 윤도의 호침을 확인했다. 자침의 깊이는 딱 절침된 침 크기 만큼이었다. 귀신이 따로 없었다.
“채 선생.”
그제야 보호자의 입이 열렸다. 천둥처럼 묵직함이 실린 소리였다.
“.....?”
“침술이 대단하시군요.”
“예...?”
윤도가 대답하자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 HIV라고 아시오?”
HIV라면 에이즈...
느닷없는 질문에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보호자와 정통으로 눈이 맞았다.
“치료할 수 있겠소?”
보호자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가물거렸다. 그제야 알았다. 보호자는 그냥 노인이 아니었다. 눈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범은 범을 알아보는 것. 그의 눈에는 깊고 깊은 침술의 내공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첸슈에센에게 신경 쓰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눈...
그렇다면, 이 노인은 누구?
최고의 갑부, 최악의 HIV-2
최고의 갑부, 최악의 HIV-2
노인의 이름은 마롱이었다. 그는 20세기 말, 중국의 3대 침술가의 한 사람. 그러나 밀레니엄 시대가 되면서 명성의 막이 내렸다. 불행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사고로 팔목이 차 틈에 끼면서 통째로 으스러지고 말았다. 그의 목숨 같던 손이었다.
최고의 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이전 기능은 찾지 못했다. 침을 놓던 손을 잃은 것이다. 그렇다고 중의 면허까지 접은 건 아니었다. 처절한 노력으로 왼손으로 침술을 이었다. 오른손만은 못하지만 요긴한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경륜과 함께 쌓인 탕제비방이라는 비기가 있었다.
첸슈에센.
그는 마롱의 유일한 제자였다. 첸슈에센이 한국의 침술가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에 명의가 있습니다.
제가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툭!
그 말을 듣는 순간 절침이 나왔다. 진료대 위에 누운 자폐아였다. 치료가 더뎌 마롱에게 시침을 부탁하던 날이었다. 절침은 그리 위험한 부위가 아니었다. 침이 위험하지 않으면 빼지 않는 경우도 있기에 그대로 데려왔다. 자폐와 더불어 윤도를 시험할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윤도의 침을 주목한 사람은 첸슈에센보다도 마롱 쪽이었다.
“마롱 선생님?”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중국의 명의를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롱은, 적어도 장지커 급은 되어보였다.
“내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소.”
마롱의 시선은 여전히 윤도에게 꽂혀 있었다.
“죄송하지만 어르신이?”
HIV 발병자입니까?
윤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오. 환자는 따로 있소.”
“중국입니까?”
“약속을 해주시면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날아오실 것이오.”
“당장?”
“그렇지 않나?”
마롱이 첸슈에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첸슈에센이 자수를 해왔다.
“속여서 미안합니다. 채 선생...”
“첸 선생님...”
“아이는 제가 치료 중인 환자입니다. 여기 마롱 선생님의 도움까지 받았지만 치료의 맥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워낙 때늦게 치료를 시작한 경우라서... 그래서 채 선생의 침술 확인 차 데려온 겁니다.”
“외삼촌.”
관망하던 뤄샤오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부득이한 사연이 있어서 미리 말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너는 그만 돌아가 보거라. 이건 의술에 얽힌 일이니...”
“알겠어요.”
첸슈에센이 요청을 받은 뤄샤오이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어떻소? 이 늙은이가 보기에 채 선생의 침이라면...”
“부탁합니다.”
마롱의 말에 첸슈에센의 요청까지 추가되었다.
“황당하군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오는 길에 선생이 일본 방사능 피폭 암환자들을 치료했다는 소리를 들었소. 내, 사고 후로 전 같지 않은 침술이지만 보는 눈은 오히려 깊어졌다오. 채 선생의 침술이라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소이다.”“침술이라면 중국에도 명의가 많지 않나요?”
“많지요. 하지만 중국은 넓어 대륙을 다 뒤질 여유까지는 없다오.”
“......”
“게다가 이 양반이 중국에서 워낙 유명한 사업가라 중국보다는 중국 외의 치료가...”
HIV...
이해는 되었다. 중국 역시 개방의 역사가 짧은 나라. 그 나라라고 HIV에 대해 우호적일 리는 없었다.
“이렇게 청하시니 한 번 보기는 하겠습니다.”
“고맙소.”
윤도의 대답에 마롱 이마의 주름이 활짝 펴졌다.
“입장은 그렇다고 치고, 상태는 어떻습니까? 두 분도 유명하신 분 같은데 다른 한의사를 찾는 걸 보면 중증일 거 같군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임상자료 같은 건 가지고 오셨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한참 때 웬만한 암은 다 고쳐본 사람이오. 여기 첸슈에센도 그렇고...”
“......”
“하지만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도 큰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소. 설명이 되겠소?”
“합병증이 발현한 겁니까?”
“그렇소.”
“......!”
마롱의 대답에 윤도의 호흡이 멈췄다.
HIV.
Human Immunodeficiency Virus의 머리글자를 딴 명칭으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라고 불린다. 바이러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염되며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오면 면역세포를 파괴시키는 바이러스다.
감염은 주로 동성애. 마약주사기 공용, 모태감염, 수혈, 섹스 등에 의한다. 기타 일상생활에서는 감염되지 않는다. 더러는 에이즈 발병자를 문 모기가 사람을 물면 감염되냐는 의문도 있지만 걱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HIV는 감염과 환자의 차이가 있다. 감염은 HIV가 몸 안에 있지만 일정한 면역수치(CD4 200cell/㎣ 이상)를 유지하면서 몸에 뚜렷한 증상이 없는 상태이고, 환자는 HIV에 감염된 후 면역체계가 파괴되어 면역세포수가 200cell/㎣이하이거나 에이즈라고 진단할 수 있는 특정한 질병, 또는 증상이 나타난 경우를 말한다.
과거에는 에이즈가 발병되면 닥치고 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HIV 바이러스를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는 치료제가 개발되어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당뇨나 고혈압처럼 약으로 관리되는 만성질환이 된 셈이다.
치료는 주로 칵테일요법에 의하며 약제는 뉴클레오사이드 역전사효소 억제제, 비뉴클레오사이드 역전사효소 억제제, 단백분해효소 억제제, 통합효소억제제 등등의 30여 가지의 치료제가 처방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도, 몸 안의 바이러스(HIV)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약은 없다. 그렇기에 일단 감염되면 발병요인을 막아야한다. 발병을 촉진시키는 대표적 질병으로 결핵, 헤르페스감염증 등이 꼽히고 있었다.
“결핵 쪽입니까? 아니면 구강캔디다?”
윤도가 물었다. HIV 발병자들에게 대표적으로 일어나는 합병증이었다.
“폐암입니다.”
마롱이 또렷이 대답했다.
쉣!
폐암이라면 거의 최악이었다.
“폐암 자체만 보면 말기까지는 아니지만 오장육부의 기가 쇠해 면역기능이 바닥입니다. 일반적인 경우의 폐암과 다른 게 그 때문이지요. 부랴부랴 채 선생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위독합니다.>
거의 그 말이었다.
“그 밖에 옵션이 또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걸 받으시는 순간 치료에 임한다는 계약이 성립될 뿐입니다.”
마롱이 봉투를 내밀었다. 백지수표였다.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 금액청구란은 하얗게 비어있었다.
“회장님 말이 무엇을 적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돈이든 물건이든... 중국의 빌딩이든...”
“......”
“부탁합니다.”
“부탁합니다.”
마롱과 첸슈에센이 입을 모았다. 일본인과는 다른 대륙인들의 방식. 그러나 간절하기는 둘 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콜입니다. 대신 이건 치료가 끝난 다음에 받도록 하죠.”
윤도가 백지수표를 밀어냈다. 계약의 성립이었다.
‘HIV...’
그날 저녁, 윤도는 약제실에 남았다. 진경태와 종일은 퇴근한 후였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오미자와 황기의 향이 좋았다. 그 옆에는 새 약재들이 즐비했다. 진경태가 캐온 약재였다.
잎새버섯을 집어들고 향을 음미했다. 풋맛에 따라오는 균사체의 향이 좋았다. 윤도의 생체분석으로도 中上을 기록하는 최상급이었다. 운지버섯과 영지버섯, 동충하초도 그랬다.
약초는 신비롭다.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약도 되고 풀도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무들도 그렇다. 채이고 패이고, 찍혀도 굳세게 상처를 이겨낸다.
약침...
에이즈 발병자 치료는 처음이었다. 아직 임상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괜한 두려움으로 알았던 에이즈...
에이즈 걸린 여자랑 자면 골로 간다.
걸리면 고추가 썩고 살에 곰팡이가 피면서 죽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구들과 떠들어대던 모습이 스쳐갔다.
<면역>
에이즈하면 면역이다. 약재들을 만지며 면역 관련 혈자리를 복기해보았다.
‘폐수혈, 중완혈, 신수혈, 족삼리혈, 관월혈, 신궐혈, 합곡혈, 곡지혈, 영향혈, 비익혈...’
혈자리는 많았다. 하지만 앵무새처럼 읊조려서는 소용이 없다. 어느 병에 어느 혈자리가 좋다는 것만으로는 좋은 한의사가 될 수 없다. 좋은 한의사는 환자의 상태에서 답을 찾아야하는 것이다.
“원장님.”
혼자 골똘할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진경태였다.
“어,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원장님 이럴 줄 알았지? 저녁은 먹었습니까?”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요?”
진경태가 포장을 내려놓았다. 참치초밥이었다.
“이야. 제 겁니까?”
“아니면요?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해야죠. 원장님이 건강해야 환자들도 살릴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세계가 독감으로 콜록대는 거 모르는 거 아니죠?”
“또 뉴스 나왔어요?”
“저녁 뉴스 들으니 베이징에 이어 홍콩과 미국, 영국에서도 난리라고 하네요. 베이징과 영국에서는 1주일 새 100여 명이 사망한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뭐 저승사자 환자라도 온 겁니까? 굉장히 긴장하고 계시네?”
“그게 다 보여요?”
윤도가 초밥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제가 관상 9단인 거 잊었습니까?”
“하핫, 그렇군요. 실은 HIV 환자 시침을 부탁 받았어요.”
“HIV라고요?”
윤도 말을 들은 진경태가 벼락처럼 반응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HIV 처음 들어요.”
“그런 환자에게 침을 놓는다고요?”
“네?”
“맙소사, 그건 안 됩니다.”
진경태가 손을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