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265)

“왜요?”

“감염우려가 있잖아요? 주사도 아니고 침이라면 피에 접촉할 수 있어요.”

“옛날 허준 선생에 피하면 조족지혈이에요. 그 분은 그 당시로는 HIV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염력이 강한 폐결핵이나 콜레라, 돌림병 같은 진료도 서슴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HIV는...”

“그만 하시고 약재나 추천해 보세요. 뭐가 좋을까요?”

윤도는 마지막 남은 초밥을 입에 밀어넣었다. 진경태의 말은 아예 개의치도 않는 눈치였다.

“젠장, 역시 원장님이군요. 여기서 예약 환자만 봐도 팔자를 고치고도 남을 분이 씨도 안 먹히니...”

“오미자하고 황기가 좋던데요? 아예 기본으로 시작해볼까요?”

“기본 약재 재료 있는 거 불러드려요?”

“네.”

윤도가 관심을 기우렸다. 머리도 식힐 겸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곽향, 자소엽, 백지, 대복피, 백복령, 후박, 백출, 반하...”

“곽향정기산이군요?”

윤도가 왈딱 반응했다.

“그건 너무 약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묘수네요. 음양의 기본을 잡아주는 곽향정기산...”

곽향정기산...

한방에서 초기감기에 많이 쓰인다. 무너진 음양의 균형을 잡아준다. 만병은 음양의 불균형으로부터 초래되는 것. 그 재료들 옆에는 차가와 영지, 운지, 상황버섯 등이 보였다.

음양의 기본약재와 최상급 면역역재.

극과 극이다.

“......!”

윤도의 눈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사승정쇠(邪勝正衰)와 정승사퇴(正勝邪退).

윤도의 기억이 내경(內經)으로 달려가 명제 하나를 건져냈다. <사기가 성하면 실하고 정기가 허해진다.>

실(實)은 사기(邪氣)의 넘침이고, 허(虛)는 정기의 모자람이다. 실은 사기가 들어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정기와 한판 격돌을 벌이면서 몸의 변화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허는 오장육부이 기능이 약해져 정기가 사기에 대항하지 못하는 상태,

사기와 정기의 격돌 과정에서 사기가 극히 강하면 정기가 쇠퇴하여 질병이 악화되거나 사망에 이르게 된다. 사승정쇠의 과정이다.

SARS나 HIV도 이 과정에서 설명이 된다. 둘 다 외부 감염의 형태로 인체에 들어와 정기를 손상 시켜 사승정쇠의 전형을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정기가 바닥나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기가 회복되어 사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질병이 호전되거나 완쾌로 향한다. 인체의 장부, 경락 등 병리적 손상이 회복되고 정, 기, 혈의 소모도 회복되어 음양이 새로운 평형을 찾게 되니 바로 정승사퇴를 가리킨다.

정승사퇴가 되려면 기본이 튼튼해야 한다. 기본이 갖춰지면 최상급 면역이 필요하다. 그 극과 극이 윤도 눈앞에 있었다.

“아저씨. 미안하지만 곽향정기산하고 사물탕 준비 좀 부탁해요. 둘 다 이 처방대로 좀 넉넉하게요. 한두 가지 화제가 더 있는데 그건 곧 말해드릴 게요.”

넉넉하게.

그걸 강조한 윤도의 손이 미친 듯 약재 이름과 구성비를 휘갈겨댔다.

“그리고 저 상급 버섯들 있잖아요? 이 화제대로 약침진액 좀 만들어주세요.”

지시를 내린 윤도가 원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신비경을 꺼냈다. 남은 화제의 하나를 준비하려는 것이다.

“타시죠.”

토요일 오전의 제주공항, 첸슈에센이 권한 건 헬기였다.

헬기...

놀란 윤도가 헬기를 바라보았다. 로고로 봐서는 어느 회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거침없이 헬기를 띄우는 사람. 과연 보통은 아닐 것 같았다.

‘그 사람들 엉뚱한 생각은 없겠죠?’

탕약과 약침액을 건네던 진경태가 한 말이었다. 그런 걱정은 없었다. 첸슈에센은 뤄샤오이의 외삼촌이다. 뤄샤오이의 결혼 예정자는 TS전자에서 백지수표를 받은 스떼빤. 그만하면 지구 최강의 신용등급이었다.

투타타!

헬기는 중문을 향해 날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내 푸른 잔디 위에 내려앉았다. 유럽풍의 정원에 자가용 헬기가 딸린, 기가 막히는 별장이었다. 그 잔디 끝에 남녀 커플이 서있었다. 남자는 50쯤이고 여자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흰 셔츠를 날리는 모습은 영화 속의 연인을 연상케 하고도 남았다. 두 사람은 이미지까지 닮아있었다.

“채 선생을 모시고 왔습니다.”

마롱이 남자에게 윤도를 소개했다.

“우리 말을 할 줄 압니다.”

소개말 한 마디가 덧붙었다.

“반갑습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얼굴은 깨끗했다.

“들어가세요.”

안으로의 안내는 여자가 맡았다. 전면유리를 단 별장 입구에서 윤도가 돌아보았다. 중국인들, 제주도 투자가 엄청나다더니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현 위치를 검색하고 진경태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의 당부대로 비상연락망을 건네는 것이다.

별장의 입지는 압도적이었다. 시원한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옆에 걸그적거리는 건물도 없다. 수영장은 기본이지만 그 기본이 두 개였다. 수영장 뒤로는 미니 골프장도 딸렸다. 어쩌면 저 아래 정박된 럭셔리한 요트도 이 별장 소유일지 몰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일대를 전부 사들인 거였다. 혹 누군가 건물을 지어 별장의 풍광을 가릴지도 모를 가능성까지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환자는 상상불허의 재력가였다.

상상불허!

불가능을 박살내다-1

불가능을 박살내다-1

차를 마셨다.

그때까지 환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롱과 첸슈에센이 말을 하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목구비는 그리 좋지 않았다. 단언컨대 미남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이런 갑부가 조각 몸매에 아이돌 마스크까지 가진다면...

“진료 시작할까요?”

윤도가 운을 떼고 나왔다. 별장의 으리번쩍한 실내장식에 감탄할 시간도 없었다.

“이쪽으로...”

여자가 다른 문 앞에서 말했다.

별장 안에는 진료실이 딸려 있었다. 딱히 병원처럼 지은 건 아니지만 간단한 처치는 가능한 공간이었다. 환자가 침대에 올라갔다. 여자가 부축을 했다. 환자가 눕자 여자는 손을 잡아주고 나갔다.

윤도가 진맥을 잡았다.

“......”

윤도 눈이 잠시 출렁거렸다. 환자는 손과 얼굴이 따로 놀았다. 아주 달랐다.

‘안면피부이식?’

머리 속에 번개 하나가 불벼락을 치며 스쳐갔다. 내색하지는 않았다.

진맥은 길게 볼 것도 없었다.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정기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사승정쇠의 전형이었다. 기경팔맥이 죄다 쇠퇴한 것이다. 그렇기에 맥은 거칠면서 부실했다. 그마나 다행인 건 폐암의 병소가 오장직자침을 넣기 나쁘지 않다는 것 뿐이었다.

“어떻습니까?”

마롱이 물었다.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윤도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준비한 한약을 꺼내 주방으로 갔다. 가정부에게 데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다시 돌아온 윤도, 환자의 사관혈에 장침을 찔렀다.

HIV.

원래는 의료용 장갑을 껴야한다. 혹시라도 혈액이 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러는 침에 손가락을 찔릴 수도 있다. 윤도는 그러지 않았다. HIV는 SARS와 다르다. SARS는 조심해도 옮을 수 있지만 HIV는 혈액만 주의하면 되었고, 윤도에게 그 정도 주의력은 있었다.

사관혈을 열어놓고 탕약을 먹게 했다.

“푹 쉬고 계십시오.”

당부를 남기고 별장을 나왔다. 윤도는 작은 바위 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채 선생...”

다가온 사람은 첸슈에센이었다.

“같이 하시죠?‘윤도가 릴을 감으며 말했다.

“낚시 좋아하시나요?”

“그건 아니지만 환자가 제주도에 있다길래 준비해 왔습니다.”

“탕약 말입니다.”

“그게 궁금해서 오셨군요?”

“제가 회장님께서 궁금해하셔서...”

회장.

환자를 알 수 있는 단어 하나가 나왔다. 이 정도 재력에 친목회 회장일 리는 없었다.

“그거 아시겠지만 베이스는 곽향정기산입니다.”

“뭐라고요?”

첸슈에센이 촉각을 세우며 되물었다.

“곽-향-정-기-산.”

윤도가 또박또박 강조를 했다.

“선생님!”

첸슈에센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무슨 특별한 비방이라도 나왔을 줄 알았던 첸슈에센. 그런데 하잘 것 없는 기본 처방이라니...

“원방에서 약간 손을 본 처방입니다. 4시간 후에 한 번 더 먹이라고 가정부에게 부탁했으니 그때까지 낚시나 하려고요.”

“채 선생...”

“엇, 벌써 물었는데요?”

윤도가 낚시를 감았다. 작은 복어가 딸려올라왔다.

“환자도 그렇지만 마 선생님께서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이 물고기 아시죠?”

“복어...”

“맞습니다. 작아도 복어죠. 이 녀석 안에는 치명적인 독이 있지요. 그러니 작다고 깔보면 큰 일납니다.”

“......”

“마 선생님께 가져다주세요. 아마 궁금증이 풀릴 지도...”

윤도가 새끼 복어를 내밀었다. 대화의 뜻을 아는 건지 복어는 작은 입을 꿈뻑거리고 있었다.

“......”

복어를 받아든 마롱의 눈빛이 출렁 흔들렸다.

“이걸 답으로 내놓았다고?”

“예.”

“다른 말은?”

“작다고 깔보면 큰 일난다고...”

“작다고 깔보면 큰 일 난다?”

“......”

“복어와 곽향정기산...”

“제 생각에는 기본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기본 중의 기본이야. 하지만 뭔가 다른 게 있기는 하다네.”

마롱이 한약봉지를 가리켰다. 윤도가 가져온 것이었다. 환자가 먹고 남은 몇 방울을 찍어 맛을 본 마롱이었다. 중국의 모든 탕제를 마스터했다고도 할 수 있는 마롱. 곽향정기산 안에 든 화제는 이미 파악을 했다. 성분과 약의 정이가 기가 막힌 약재였다. 하지만 단 두 가지, 알 수 없는 성분이 있었다.

“한국 산삼 쪽일까요?”

“아니, 그렇게 깊지는 않아. 그냥 순해. 동시에 신묘하기도 하고...”

“역시 비방 쪽이군요.”

“비방이라고 해도 중심 주제는 곽향정기산이라네.”마롱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될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효과가 있을까요?”

“둘 중 하나겠어.”

“둘 중 하나라면?”

“대박 아니면 쪽박.”

“......?”

“그 중 하나일 거야. 완치 아니면 시간 끌다가 역부족 선언.”

“......”

“이건 가서 놓아주시게. 기다려보는 수 밖에 없겠어.”

마롱이 복어를 내밀었다.

윤도는 약속한 시간에 돌아왔다. 손을 소독하고는 바로 환자 앞에 앉았다. 하지만 다시 기본 탕제를 먹일 뿐이었다. 약을 먹이고는 숙소로 정해준 방에서 잠을 청했다. 어찌나 곤하게 자는지 그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거실 소파의 두 중의 미간이 슬슬 구겨져갔다.

한국 최고의 침술명의.

그의 행적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소문으로만는 부족해 현장 검증까지 마쳤다. 뤄샤오이가 그랬고 자폐아 치료에 발침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중의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일어나즈아!”

윤도는 세팅된 시간에야 잠이 깨었다. 핸드폰 화면을 눌러 알람을 껐다. 밖을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딸린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손소독도 했다. 그러나 윤도가 한 일은 여전히 곽향정기산과 기혈을 올리는 혈자리에 침을 넣은 것 뿐이었다. 다음 차례에도 그랬다.

“......”

지켜보는 마롱은 똥줄이 타들어갔다. 분명 침술의 성취가 높은 윤도. 그렇기에 감놔라 배놔라 참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탕제가 바뀌었다. 이제는 곽향정기산이 아니라 비방 사물탕이었다. 사물탕의 목적은 혈액을 보하는 것.

“......!”

윤도 몰래 약을 체크한 마롱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또한 특별히 다를 것 없는 사물탕이었다. 다른 건 여전히 두 가지. 순하고 신묘한 뒷맛만이 다를 뿐이었다.

‘대체...’

두 가지 맛의 한약재를 떠올려보지만 생각이 닿지 않았다. 마롱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일어나즈아!”

다시 알람이 울었다. 이제는 새벽이었다. 기지개를 켠 윤도, 환자의 방으로 가서 진맥부터 잡았다. 어제보다 좋았다. 사기가 압도적이던 상태에서 사기와 정기가 균형점에 가까운 상태로 변하고 있었다.

‘빙고.’

아직 정기부족이지만 이 정도라면 시작할만 했다.

약침을 꺼내놓았다. 딱 두 가지였다. 폐암을 잡기 위한 것과 윤도표 면역증강제...

바스락.

기척과 함께 두 중의가 다가왔다.

“시침하겠습니다.”

혈자리를 잡은 윤도가 환자의 옷을 벗겼다. 얼굴과 달리 군데군데에서 흉측한 붉은 반점군이 나왔다. 붉은 반점은 에이즈 감염자의 일부에서 보인다. 하지만 진행으로 보아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쇄골 사이도 유난히 좁았다. 이 또한 많은 암환자에게서 보이는 특징의 하나였다.

‘후우.’

숨을 고르고 나노 침을 뽑았다. 첫 침부터 오장직자침이었다. 장침이 그대로 폐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으헉!’

지켜보던 마롱이 휘청 흔들렸다. 그는 눈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신묘함이 아니라 무대뽀 난폭함으로 보였다. 그가 아는 자침 원칙은 하나였다. 오직 기혈에 닿고 근육마디에 닿지 않는 것. 그렇기에 오장이 가까운 혈자리에서는 깊이 넣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더구나 폐였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영락없는 기흉이다. 기흉이 생기면 호흡곤란으로 바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폐부로 길고 긴 나노 침이, 망설임도 없이 들어갔다. 벼락처럼 환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환자는 평온하다. 기침도 없고 거품도 뿜지 않는다. 심지어는 호흡도 괜찮았다.

“회장님.”

마롱이 환자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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