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65)

“예?”

목소리가 나왔다. 또렷했다. 그 마음을 읽은 윤도가 넌지시 주의를 주었다.

“치료 중입니다.”

“......”

찔끔한 마롱이 뒤로 물러섰다.

“자침 손상을 걱정하신다면 신경 끄셔도 됩니다. 미리 말씀드려야하는데 설명을 생략한 건 두 분의 의술이 높아 평소에 환자분과 교감이 되었다고 판단한 까닭입니다. 나아가 폐암 치료에 있어 흔히 쓰는 합곡과 태충의 사관혈, 중부, 척택, 태연, 폐수, 중완을 쓰지 않은 건 이 오장직자침이 그들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환부의 직접 공략으로 애써 다진 정기의 소진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고요.”

‘오장직자침?’

중의들이 한 번 더 뒤집어졌다. 침법 자체는 생소한 게 아니었다. 인체의 어느 부위든 직접 침을 놓아 병세를 잡을 수 있다면 최상의 침술이 될 수 있었다. 혈자리의 원리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장은 침이 들어가면 손상된다. 게다가 치명적이다. 그렇기에 혈자리를 이용해 간접 치료를 도모하는 침술. 그런데 오장직자라니?

하지만...

이의조차도 제기할 수 없었다. 지금 그 오장직자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희고 긴 나노 침이 다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은가?

윤도는 그들의 경악 위에 차곡차곡 나노 침을 더해주었다. 환자의 폐에 똬리를 튼 12개의 암 덩어리들. 거기에 빠짐없이 나노 침을 꽂은 것이다.

침끝을 돌려 암세포의 반응점을 찾았다. 사기가 미친 듯이 몰려들어 침끝을 물었다. 한 무리도 아니었다. 암세포의 사기와 HIV의 연합이었다. 겨우 숨통이 붙어있던 진기들이 수세에 몰렸다. 절대 열세지만 진기는 결코 투항하지 않는다. 목숨이 다해야만 비로소 물러서는 진기. 그게 생명의 신비였다.

사기와 진기가 충돌하자 필연 침끝이 물렸다. 눌러도 들어가지 않고 빼도 빠지지 않는다. 거기서 윤도 침에 화기가 들어갔다. 몰려든 사기를 끝장내는 화침이었다.

화아악!

화침의 위세가 신성(神聖)의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꾸에엡!

암세포와 HIV 연합군이 몸서리를 치며 녹아나기 시작했다.

40.

41.

42.

화침은 42.5℃까지 올라갔다. 그제야 허덕이던 진기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화침을 등에 업고 반격을 시작했다.

화아악!

화아악!

진기가 화침과 합하자 동심원은 더 세고 더 멀리 퍼져나갔다.

나노 침은 마지막 암 덩어리를 찌르고 조금 쉬었다. 그때까지도 두 중의의 시선은 나노 침의 손잡이에 있었다. 나노 침 끝이 차마 달빛처럼 신성해 보였다.

두 시간 경과.

윤도가 나노 침을 갈았다. 그리고 또 두 시간을 흘려보냈다.

“선생님.”

창가에서 지켜보던 첸슈에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말하시게.”

“아무래도...”

“......”

“치료가 되는 거 아닐까요?”

첸슈에센의 눈은 여전히 윤도의 손 끝에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오장직자침. 무수하게 폐에 꽂혔음에도 환자에게는 통증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곧 세포 한 알 한 알을 피해 오직 암세포만을 찔렀다는 얘기였다. 인체의 기관과 조직의 좌표를 입력 받은 AI 수술로봇이라고 해도 불가능할 일. 그 신의 영역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HIV가 아니고 폐암 시침일세.”

마롱은 판단을 유보했다. 폐암은 HIV의 산물이었다. 그러니 HIV를 해결하지 못하면 애쓴 치료가 무의미할 일이었다.

폐암 치료는 정오가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환자에게 죽과 함께 사물탕을 먹였다. 윤도도 대충 끼니를 때웠다.

잠시의 휴식 끝에 다시 치료에 임했다. 이제 HIV와 한판 승부를 벌여야했다. 윤도는 회심의 승부수가 될 약침액을 집어들었다. 윤도표 면역증강제였다.

HIV.

두근.

단어를 생각하자 심장이 반응을 했다.

‘너도 설레냐? 나도 설렌다.’

윤도가 웃었다. 처음 겪어보는 HIV 발병자. 두려움에 앞서 전의가 불타 올랐다. 이미 다양한 불치, 난치의 병을 겪어본 윤도였던 것이다.

사승정쇠(邪勝正衰)에서 정승사퇴(正勝邪退)로.

미리 세운 지상 명제를 향해 윤도가 출격했다.

이번에는 나노 침이 아니라 장침이었다. 윤도의 수족 같은 그 장침.

불가능을 박살내다-2

불가능을 박살내다-2

침...

사실 침술에는 고려해야할 사항이 많았다. 노법, 도기법, 도침제삽법, 소산화법, 양자법 등을 차치하고라도 5역에 5금, 5탈, 5과 등등등... 지금 이 순간, 합병증까지 도진 말기 HIV 환자를 기준으로 한다면 침을 놓을 수 있는 혈자리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깊게 자침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마롱과 첸슈에센이 경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명의로 꼽히는 그들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침법. 그러나 환자에게는 도무지 부작용이 없는 침술... 노쇄한 마롱의 눈이 밤을 지새우고도 초롱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제 또 어떤 침법이 나올 것인가? 저 젊은 한국 한의사는 어떤 혈자리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그들의 의문은 점차 호기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정승사퇴.

충분하지 않지만 기반은 조성되었다. 이제는 터무니 없지 않았다. 각 오장육부의 끄트머리에 몰렸던 정기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불씨를 틔웠으니 이제는 화력을 퍼부을 시간이었다.

기경팔맥...

윤도가 혈자리를 바라보았다. 면역의 판을 바꾸어야했다. 곳곳에 물든 사기를 밀어내고 상큼한 면역 정기로 인체를 환기시켜야했다. 그러자면 파워가 필요했다. 그 파워의 첫째는 열이었다. 그건 히포크라테스도 한 말이었다.

<열을 만들 힘을 주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여기서의 열은 곧 정기가 되었다.

윤도의 첫 선택은 천지인의 백회, 용천, 선기혈이었다. 선기혈은 몸 안의 북두칠성으로 전신의 병을 두루 치료한다. 이를 백회, 용천과 묶으면 천지인의 조화를 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자침의 출발은 장침이 아니라 호침이었다.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호침.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한 의도가 있었다.

‘양자법(揚刺法)...’

침을 본 마롱의 안면이 파르르 떨었다. 네 개의 호침이 다이아몬드의 사각을 이룬 것이다. 그 정 가운데로 들어간 게 약침이었다. 이는 몸에 퍼진 사기가 넓을 때 대처하는 시침법이었다. 침은 모두 약침이었다. 윤도표 면역증강제. 성분은 퀄리티 높은 항암버섯 진액에 HIV 면역증강제를 배합한 칵테일이었다. 물론 산해경의 영약도 일부 첨가를 했다.

그러나.

당장 격렬한 효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노린 혈자리는 사신총혈이었다. 한열허실을 막론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명혈. 그 또한 양자법으로 시침되었다. 한 마디로 촘촘한 그물이었다. HIV가 피라미라면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포석이었다.

‘오케이.’

포석을 마친 윤도가 다시 장침을 잡았다. 지금까지는 준비운동의 재확인, 이제 본대가 출격할 시간이었다.

면역증강 약침이 오수혈로 들어갔다. 기의 생장은 경락의 시작과 끝에서 이루어진다. 각 경락의 모혈만 잡아도 수십 혈자리가 될 판. 윤도는 전신 경락의 사기를 완전하게 세척할 생각이었다. 전신의 경락을 열어 새 기로 경락을 돌게 하는 것. HIV 치료의 관건이었다.

중부혈과 장문혈, 경문혈, 석문혈에 더해 독맥과 임맥의 모혈을 잡았다. 모두 면역증강 약침이 들어갔다. 전체 조율의 사령탑은 인당으로 삼았다. 인당은 림프에 관여한다. 림프는 면역에 관여한다. 여기서 면역체계를 청소해서 HIV를 박멸할 작정이었다.

‘열...’

‘면역증강...’

윤도가 머리에 두 단어를 그렸다.

‘스타트!’

윤도의 손끝이 돌기 시작했다. 침을 감는 것이다. 손목을 타고 온 신성 파워는 윤도의 비원을 고스란히 침 끝에 퍼부었다. 윤도는 그 끝을 감아 각 모혈과 치료혈에 꽂힌 약침들을 자극했다.

처음은 실패.

‘오케이.’

실망하지 않았다.

재시도.

두 번째도 실패.

‘흐음...’

재시도.

다섯 번, 여섯 번을 해도 전체 경락은 열리지 않았다. 몇 경락이 반응하면 몇 개가 침묵하고, 그것들을 체크하면 다른 것들이 침묵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실패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냈다. 키는 백회와 선기혈이었다. 곰곰이 보니 선기혈의 반응이 가장 약했다. 백회, 용천혈과 함께 천지인(天地人)을 이루는 혈자리. 백회는 환자가 남자라 양의 기가 더 필요했고, 선기혈은 인의 역할이다 보니 더 많은 기혈이 필요해 전체 경락의 반응 시동에 실패하는 것 같았다.

삼향자침.

두 개의 침을 선기혈자리에 더 넣었다. 천지인에 맞춘 포석이었다.

일곱 번째.

선기혈 안에 들었다고 회자되는 북두칠성. 마침내 그 안에 불이 들어왔다. 마침내 각 경락의 시작과 끝에 오롯한 정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후웅!

신성한 빛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진홍을 머금은 푸른 정기는 물결처럼 경락을 물들여나갔다.

‘아아...’

윤도는 그 빛에 홀려 넋을 놓았다. 윤도만 볼 수 있는 열... 인간의 정기... 새로 피어난 정기가 찌들고 오염된 HIV의 사기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

주목하던 첸슈에센이 마롱을 건드렸다. 의서를 보던 마롱이 고개를 들었다.

“......”

마롱은 들고 있던 의서를 떨구고 말았다.

‘이거...’

머리 속이 금세 아뜩해져 버렸다.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두 바퀴...

세 바퀴...

윤도는 새로운 면역 정기가 환자의 몸을 휘도는 걸 보았다. 첫 바퀴에서 남은 오염 찌꺼기는 두 번째에 쓸려나갔다. 그때까지 남은 건 세 번째에 밀렸다. 시들고 상한 풀잎처럼 악취를 풍기던 환자의 경락에 새 빛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없이 숭고한 빛이었다. 생명의 신비, 새롭게 감도는 면역의 빛은 마치 새벽 하늘의 북두칠성처럼 고고하면서도 단아해 보였다.

경락의 빛은 이내 오장육부로 스며들었다. 오장육부 안에서 새 빛을 피우고 근육과 피부로 퍼졌다. 환자의 피부에 있던 반점들은 마르고 말라 딱지로 떨어졌다.

“......!”

말은 하지 않았다. 윤도도 그랬고 옆으로 다가온 두 중의도 그랬다. 언어대신 나온 건 은은한 미소였다. 첫 미소는 환자의 입이었다. 육신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다. 그걸 본 마롱이 웃었다. 첸슈에센도 웃었다.

윤도는...

웃음인 듯 아닌 듯 기묘한 경계에 있었다. 미소에 담긴 경건함 때문이었다.

HIV.

경락을 장악한 사기를 밀어내고 새 면역의 정기로 갈아치운 윤도. 그것은 차마 또 하나의 창조였다. 그렇기에 선 채로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또 하나의 쾌거를 올린 것이다.

“좀 쉬어야겠습니다. 환자는 안정하게 그냥 두세요.”

윤도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침에다 열정을 다 쏟은 까닭에 지치고 또 지친 목소리였다.

방으로 돌아와 깜빡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그 꿈에 중국의 명의들을 만났다. 유부, 화완, 편작에 창공이었다. 잠시 환대하던 그들의 모습이 마물로 바뀌었다. 마물들이 장침을 꺼내들었다. 윤도 몸에 오장직자침을 놓았다. 살리는 침이 아니라 엉망으로 찔러대는 침이었다. 윤도는 오장육부가 터지고 말았다.

“살려주세요.”

버둥거리다 잠에서 깨었다.

“채 선생님.”

첸슈에센이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꿈이었네.’

안도의 숨을 쉬며 윤도가 일어섰다.

“무슨 일이죠?”

문을 열고 물었다.

“이거...”

첸슈에센이 뭔가를 내밀었다. HIV 퀵 테스트 키트였다.

“......!”

그걸 본 윤도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가운을 집어 들고 뛰었다. 환자가 일어나 있었다. 마롱도 그 앞에 있었다. 분위기는 다시 초상집이었다.

“언제 한 겁니까?”

윤도가 첸슈에센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다시 HIV 키트를 확인시키는 첸슈에센. 거기 보이는 줄은 명백히 두 줄이었다. 두 줄.. 그렇다면 양성이었다. HIV 감염자라는 뜻이었다.

“또 있죠?”

“여기...”

윤도가 묻자 첸슈에센이 새로운 키트를 내주었다. 윤도가 환자의 손끝을 천자해 미량의 혈액을 뽑았다. 혈액은 키트의 동그란 구멍에 떨구어졌다. 그 위로 반응 시약 4방울이 떨어졌다. 시침할 때보다 더 떨렸다.

20분.

키트의 반응시간이었다. 안에 숨은 건 세 줄의 레드 라인. 앞 쪽의 두 개 줄은 HIV의 타입을 보는 줄. 어느 줄이 나오든 HIV감염이다. 맨 뒤의 한 줄은 대조용 줄이었다. 그러니까 맨 뒤의 한 줄만 나오면 정상이오, 첸슈에센이 가져온 것처럼 두 줄이면 치료실패였다.

5분...

곧 바로 첫줄에 레드 라인이 나왔다. 20분을 기다릴 것도 없이 양성판정이었다.

“......!”

1cm도 되지 않는 붉은 줄 하나가 윤도를 무너뜨렸다. 사력을 다한 치료였다. 성공한 것으로 확신한 치료였다. 그런데...

‘안 되는 걸까? HIV는...’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허무하군요. 우리도 성공한 줄 알았는데...”

마롱이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환자의 질문에도 맥이 없었다.

“......”

“내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탕약이 너무 약했던 것 아니오? 곽향정기산과 사물탕으로는... 물론 다른 비방을 넣은 것도 같소만...”

다른 비방...

마롱의 분석은 정확했다. 곽향정기산은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기본 탕제. 애당초 기본으로 출발한 치료계획이지만 비장의 첨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비방은 제대로 먹혔다. 그렇기에 음양의 균형이 맞으면서 전신경락을 조절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두 개의 비방은 진기와 영약이었다.

진기는 흔한 것에서 얻은 보물이었으니 죽물의 진액이었다. 죽물은 죽이나 밥을 지을 때 마지막에 생기는 끈적한 물을 뜻한다. 보기에는 우습지만 음식으로 보충할 수 있는 정(精)의 결정체였다. 환자가 성에 문란했다는 말에서 착안을 했다. 정은 정수(精髓), 정기(精氣), 정액(淨液)에 고루 쓰이는 보물이다. 정(精)이 우뚝하면 기(氣)가 강해지고, 기가 강해지면 신(神)이 왕성하고, 신(神)이 왕성하면 몸이 건강해져 병들지 않는 것이다.

영약은 산해경 서산경의 화목에서 얻었다. 먹으면 힘이 세어지니 그 또한 정기의 바탕이 될 약재였다.

“탕제의 바탕은 기본이었지만 그 기본 안에는 사승정쇠(邪勝正衰)를 정승사퇴(正勝邪退)로 바꿔줄 비방이 들어 있었습니다. 겉만 화려한 약재들보다 내실 있는 것이었으니 탕제를 탓할 게 못 됩니다.”

윤도가 잘라말했다.

마롱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의 진행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없는 대답이었다. 단지 뒤집힌 기대감에 대한 마롱의 미련이었을 뿐.

‘후우!’

윤도 입에서 한숨이 밀려나왔다. 깊은 공을 들인 쾌거가 키트 두 개에서 날아가 버렸다. 경락의 신비까지 무력화 시키는 키트의 결과...

그런데...

‘응?’

두 키트르 보던 윤도가 시선을 멈췄다. 키트가 조금 달라보였다. 결과로 나온 붉은 라인이 그랬다. 첸슈에센이 가져온 반응의 레드라인이 훨씬 더 강했다. 그에 비하면 윤도가 한 테스트 쪽은 상당히 약해 보였다.

‘혹시?’

윤도의 시선이 환자에게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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