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기분 어떠십니까?”
“예?”
“몸 상태 말입니다. 아까하고 비해서요.”
“별 차이는 없습니다.”
“피곤하세요?”
“아뇨. 몸 상태는 더 좋은 거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이 검사 한 번만 더 해봐도 될까요?”
윤도가 키트를 들어보였다.
“채 선생.”
마룽이 고개를 저었다. 두 번이나 확인한 결과. 더 미련을 갖는다는 건 환자에 대한 확인사살에 불과했다.
“딱 한 번만요.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걸리다뇨?”
“이 키트 말입니다. 라인의 색깔 선명도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 키트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뭔가 변수가 있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변수?”
“한 번입니다. 장침 한 대 더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회장님.”
마롱이 환자의 허락을 구했다. 환자는 한숨을 쉬더니 마지못해 손을 내주었다.
그런데...
“아야!”
천자를 하는 사이에 환자가 손을 뿌리쳤다. 천자도구는 란셋이었다. 장침이 아니다보니 아프지 않게 찌를 재주가 없었다. 거기에 기대감이 사라진 환자의 심리도 한 몫을 했다. 그게 사고로 이어졌다. 환자 손이 빠지면서 란셋이 윤도 왼손 엄지손가락을 스치고 말았다. 이미 환자의 손가락을 찌르고 나온 란셋이었다.
“......!”
한순간 실내에 경악이 흘렀다.
HIV.
의료진들도 심심찮게 감염된다. 바로 이런 과정 때문이었다. 수혈이나 혈액 채취, 혹은 주사를 놓다가 바늘에 찔리는 것이다.
바로 소독솜으로 닦았다.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일단은 환자의 검사부터 진행했다. 키트에 반응시약을 떨구었다. 그런 다음에 한 번 더 손가락 소독을 했다.
“괜찮습니까?”
첸슈에센이 물었다.
“아, 예...”
윤도가 손가락을 숨겼다. 엄지손톱 옆으로 긁힌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병원이라면 응급 약이 있다. 하지만 작은 자상이니 헬기를 내달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 사이에 10분이 흘러버렸다. 윤도는 소독솜을 누른 채 키트를 확인했다.
“......!”
아직까지는 줄이 나오지 않았다.
15분...
여전히 양성의 레드라인은 출몰미정.
16분.
17분...
윤도의 피가 타들어갔다. 남은 3분이 하루처럼 길었다. 이대로 레드라인이 나오지 않으면 치료는 성공이었다. 윤도의 찔린 손가락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19분.
이제 키트에는 완전한 한 줄이 우뚝 섰다. 대조라인이었다.
20분.
“한 줄입니다!”
초침까지 재고 있던 첸슈에센이 먼저 소리쳤다.
“뭐라고?”
마롱이 다가왔다.
“맙소사!”
그가 경기를 했다.
“......!”
키트를 확인한 환자도 부들거렸다.
“방금 전에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더 부탁합니다.”
환자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키트에 혈액과 반응시약이 떨어졌다. 다시 20분이 지났다. 이번에도 HIV는 나오지 않았다.
“으아아!”
환자가 두 팔을 뻗으며 환호를 했다.
“회장님.”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HIV가 사라졌어요.”
“회장님...”
“채 선생님.”
환자는 단숨에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런 다음 윤도를 부여안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해냈습니다. 내 몸 안의 악마, HIV를 해치웠다고요!”
불가능을 박살내다-3
불가능을 박살내다-3
“으하핫, 하하핫!”
신이 난 환자가 달려 나갔다. 그는 문 앞의 여자를 안은 채 풀장에 뛰어들었다.
“아하하핫!”
풀장 안에서도 여자를 안고 웃었다. 그 웃음은 그치지도 않았다.
“채윤도 선생님.”
풀장에서 나온 환자가 윤도와 독대를 했다.
“예.”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HIV를 잡기는 했지만 정밀 검사는 아닙니다. 정밀검사 후에도 치료를 더 해야 하고요. 어떻게 보면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새 면역력에 바뀐 정기라 안정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상관없습니다. 뭐든 따르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주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이제부터는 정기 남발 금지입니다.”
“예?”
윤도의 말에 환자의 표정이 굳었다.
“정기남발 금지. 즉 문란한 성생활을 금하라는 겁니다.”
“선생님...”
“지금 상태는 겨우 정기에 싹이 튼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시 정이 고갈된다면 그때는 HIV가 아니라 감기만 걸려도 위험하게 될 겁니다.”
“문란한 성생활 금지라...”
“회장님의 경우는 아니겠지만 다른 환자의 경우, 병이 나으면 성생활부터 원없이 하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회장님의 경우라면 파트너를 구하는데 어려움도 없을 것 같고...”
“푸하하핫!”
듣고 있던 환자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채 선생님.”
“......”
“제가 HIV로 죽음의 목전에 서성이면서 했던 생각이 뭔지 압니까?”
“.......”
“가위로 성기를 잘라버리는 거였습니다. 이 놈 때문에 결국 인생을 망쳤으니까요.”
“......”
“솔직히 한참 때는 여자에 묻혀 살았습니다. 하루 동안 네 여자를 바꿔가며 탐닉한 적도 있으니까요.”
“......”
“보시다시피... 제 얼굴... 아, 이 얼굴은...”
“안면피부이식이죠?”
“아시는군요? 역시...”
“......”
“이 피부 아래의 얼굴은 정말이지 추남입니다. 자라면서 여자들에게 멸시 많이 받았죠. 사업에 성공하자 반전이 일어나더군요. 어릴 때 저를 놀렸던 여자들이 전부 꼬리를 치는 겁니다. 말 한 마디면 속옷을 벗더군요. 유치한 복수심처럼 여자를 후렸습니다. 잘난 여자들이 내 아래에서 교태를 부리는 모습... 그만한 쾌감도 없었습니다. 국적도 가리지 않았죠. 미국, 러시아, 중국, 한국, 일본, 북한... 여자는 많고 정력제도 많았죠. 그 어떤 희귀약재도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었으니까요.”
“......”
“하지만 너무 나갔습니다. 나름 조심했지만 결국 천형의 틀을 쓰고 말았어요. 경영의 도는 알면서 탐욕의 말로는 몰랐던 거죠.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 그때... 저 HIV 검사 키트... 세 시간에 한 번씩 검사해 본 적도 있습니다. 제발 한 줄이 나오기를 바라며...”
“......”
“앞으로는 여체 탐닉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사실 제가 HIV에 걸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회사의 경영을 위해서도 보안을 유지했고 치료도 믿을 수 있는 마롱 선생님을 통해서만 받았으니까요.”
“......”
“물론 비밀이 영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새어나가는 바람에 얼마 전부터 홍콩 언론을 시작으로 제 HIV 감염 사실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습니다. 궁여지책 끝에 소문을 낸 홍콩 언론사와 제 경쟁사 대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두었습니다만...”
“......”
“이제는 전화위복이 되었군요. 선생님 덕분에 공개 검사를 받아도 되게 되었으니까요.”
“예...”
“하지만 그런 위기가 사방에서 옥조여올 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상하이의 저희 본사 88층 집무실의 방화창문을 연 적도 있으니까요.”
‘방화창문?’
“투신 말입니다. 하지만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죽으면 제 HIV가 알려져 애써 키운 회사가 곤경에 처하고 제 부모님 얼굴에도 먹칠을 할까 두려웠습니다만 그보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지요.”
또 다른 이유.
그 단어에 힘이 들어갔다.
“시라!”
환자가 문을 향해 말했다. 여자가 들어왔다. 커플처럼 서있던 그 여자였다.
“제가 사랑하는 시라입니다. 채 선생님처럼 한국 피죠. 아버지는 홍콩 사업가 어머니는 한국 간호사.”
“안녕하세요?”
여자가 가벼운 인사를 해왔다.
“시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는 다 아는 사실이니... 사실 시라를 만나기 전에 저는 100명도 넘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모두 하룻밤의 낭만인 경우가 많았죠. 그 백여 명 중에 제 마음에 남은 여자가 바로 시라입니다.”
“......”
“하지만 공교롭게도 저는 시라에게 몹쓸 정표까지 나눠주고 말았습니다. HIV 감염을 안 후에 시라에게도 검사를 권했더니...”
쌍방 감염.
환자의 설명은 그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돈을 주었습니다. 상하이 중심가에 평범한 빌딩 한 채 마련하고 평생 이자로 먹고 살 정도는 되었죠. 그런데 시라는 받지 않았습니다. 돈 때문에 저를 만난 건 아니라고 하면서...”
“......”
“방화창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말하더군요. 당신, 기업의 위기는 몇 번이나 넘겼으면서 건강의 위기는 한 번도 못 넘기냐고.”
“......”
“그 말에 불이 번쩍 들어오더군요. 창을 닫고 결심했습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한 번 정도는 내 병을 고쳐줄 운명을 만날 수 있겠지. 내가 살면 시라도 살릴 수 있는 거야.”
시라도 살릴 수 있는 거야.
환자의 강조점이었다.
“이제 짐작이 가십니까?”
“그럼?”
“맞습니다. 제가 목숨을 부지하며 HIV를 고칠 명의를 찾은 건 저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시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방화창문으로 뛰어내렸다고 생각하고 이를 문 거죠. 그때부터 마롱 박사님에게 본격치료를 받으며 비밀리에 수소문을 해왔습니다. 저 자신을 실험물로 삼아 시라에게 구원을 주고 싶었던 거죠.”
‘맙소사.’
윤도가 휘청 흔들렸다. 자신을 내세워 연인을 치료해줄 의사를 찾아 나선 거라니...
“쉿, 시라의 일은 저 밖에 있는 마롱 선생님도 잘 모르는 사실입니다.”
“......!”
“채윤도 선생님.”
환자가 윤도 손을 잡았다.
“부탁합니다. 제 몸의 정기를 다시 뽑아도 좋습니다. 제 피를 모두 빼서 우리 시라에게 주어도 좋습니다. 제가 아니라, 시라를 부탁합니다. 시라까지 새 삶을 얻게 된다면 앞으로는 기업의 이윤을 사회환원과 기부로 돌리며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제 일은 몰라도 시라의 일만은 비밀로 부탁합니다.”
환자가 고개를 숙였다. 지상 최고의 겸허와 염원이 그의 목소리와 눈에서 빛나는 순간이었다.
“......”
“선생님.”
“그렇게 하죠.”
윤도가 답했다. 환자가 윤도의 두 손을 잡았다. 애절함이 배인 손길이었다.
“오장육부의 기를 양생해야 합니다. 침이 끝나기 전에 누구도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거실로 나온 윤도가 두 중의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보조는 시라가 할 겁니다. 채 선생님 말에 무조건 따라주세요.”
환자의 엄명도 뒤를 이었다.
<추가치료.>
<출입금지.>
환자의 방은 안으로 잠겼다.
진맥을 했다. 다행히 여자는 합병증의 초기였다. 그렇기에 몇 개의 발진 외에는 드러난 게 없었다. 발진도 작아 흔한 피부병으로 보일 정도였다.
사락!
그녀가 옷을 벗었다. 하체의 속옷만 남기고 전부 벗었다. 여자의 몸매는 야위어 있었다. 전체 살집으로 보아 건강을 되찾아도 조각 몸매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마음을 산 걸 보면 사랑은 마음이라는 게 옳은 것 같았다.
‘출발.’
이미 한 번 넘은 불가능의 벽. 두 번이라고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윤도의 손은 더욱 익숙하게 움직였다. 손끝의 감이 사라지기 전이었다. 환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윤도를 보조했다.
보아하니 중국 최고 갑부의 한 사람. 그러나 죽음의 사선을 넘어온 그에게 사치나 오만 같은 건 엿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연인을 간호하는 순애보의 남자일 뿐.
치료가 끝났다. 남자와 다른 건 경락의 포인트가 용천혈과 선기혈이라는 점이었다. 용천혈은 천지인에서 지(地)의 역할. 땅은 음이니 남자와 다른 맥락이었다.
포인트를 잡은 윤도의 침 끝이 정밀하게 돌았다.
그 순애보는 HIV 키트에서 보상을 받았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양성이 나왔다. 두 줄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시도한 키트는 한 줄이 나왔다. 그녀의 HIV도 해치운 윤도였다.
“시라!”
“징팅!”
두 연인은 감격에 겨워 포옹을 했다. 바이징팅 회장. 그는 그렇게 자기 여자의 프라이드를 지켜주었다. 탐닉 속에서 진짜 여자의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윤도가 채혈을 했다. 이번에는 장침이 아니라 주사기였다. 샘플은 가까운 검사센터로 급행으로 보내졌다. HIV 응급 혈청검사 의뢰였다. 퀵 테스트는 빠르고 간편한 게 장점이다. 하지만 정확, 정밀도는 혈청검사에 미칠 수 없었다. 원래는 일정 샘플을 모아 검사하는 혈청 테스트. 하지만 바이징팅은 돈으로 시간을 당겼다.
다라라랑.
두어 시간 후에 바이징팅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