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검사법 음성.>
Western blot은 핵심 반응 단백질로 꼽히는 p24, p31, gp41,gp120, gp160 등이 모두 음성이었다. 시라의 혈청도 그렇게 나왔다. 이제는 일말의 의심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HIV에서의 해방.
목숨 세이브.
바이징팅은 격한 기쁨을 달래며 시라를 껴안았다. 마롱과 첸슈에센이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 박수는 바이징팅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시라의 감염을 알지 못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바이징팅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롱이 말했다. 윤도를 보는 눈은 경탄 그 자체였다.
“환자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게 정기를 되찾게 만든 거죠.”
윤도는 겸손하게 응수했다.
잠시 후 돌아온 바이징팅, 윤도와 두 중의를 불렀다.
“세 분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제가 새 삶을 찾았기에 여러분을 증인으로 두고 시라에게 청혼을 하려합니다. 증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
바이징팅 때문에 윤도와 두 중의가 얼어붙었다. 그의 손에 들린 노란꽃 때문이었다. 그건 제주도에 많은 천년초꽃이었다. 바이징팅은 천문학적인 갑부. 그런데 청혼의 징표는...?
“사실 그동안 여자 하나 꼬시면서 빌딩을 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다 허상이죠. 이 제주도에서 삶이 새로 났으니 제주도의 정기를 머금은 이 꽃이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이름이 천년초라고 해요. 천년을 살 수야 없지만 천년의 사랑을 주려는 각오로...”
“......”
소박한 자세에 또 한 번 넋이 나가는 세 사람...
안에서 시라가 불려나왔다. 그 앞에 천년초의 노란꽃이 바쳐졌다.
“나랑 결혼해 주겠어?”
바이징팅이 꽃을 들어보였다. 시라는 거침없이 바이징팅의 품에 안겼다. 윤도와 두 중의는 또 한 번 압도되고 말았다.
“수표 받으셨죠?”
고백을 끝낸 바이징팅이 윤도에게 물었다.
“예.”
“액수, 부담가지지 말고 많이 써넣으십시오.”
바이징팅이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공개했다. 그는 상상 너머의 거부였다. 그가 바로 중국 최대의 IT그룹이자 온라인 게임 유통의 1위 업체 쥐리(巨力)의 회장이었다.
중국 내 방송국과 연예 엔터테인먼트 사업, 모델 사업체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기업 하나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고 한국에도 합작 회사가 둘이나 있었다. 개인 재산은 약 900억 위안으로 평가 받는 거물. 우리 돈으로 대략 12조원대의 SSS급 갑부였다.
HIV에 대한 비밀엄수.
그런 옵션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소문이 꼬리를 물어 주체할 수도 없을 정도니까요.”
바이징팅은 화끈했다. 홍콩을 시작으로 제기된 그의 HIV 감염소문. 이미 중국 전역에 나도는 소문이니 윤도가 가세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쪽이었다.
그는 이제 공개검사에 응해 소문을 퍼트린 정적들을 박살낼 생각이었다. 그러니 윤도의 치료 소문이 난다해도 많은 소문의 하나로 묻어갈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제 걱정은 마십시오. 환자가 원하지 않는 한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갑니다.”
윤도가 단언했다.
백지수표의 서명은 나중으로 미뤘다. 환자 앞에서 금액을 적기는 마땅치 않았다. 대신 다른 부탁을 내놓았다. 헬기와 비행기표였다.
“걱정마십시오.”
바이징팅이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잡았다. 헬기조종사가 바로 호출되었고 비행기표는 기다림 없이 이어지는 예약이었다.
“중국으로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정원으로 나온 바이징팅이 웃었다.
“그러세요. 대신 보내드릴 약은 잘 챙겨드시고요.”
“그럼요. 이제부터 선생님 탕약이 제 생활의 1번입니다.”
“1번은 시라 씨 아닌가요?”
윤도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핫, 그렇군요. 그럼 2번입니다.”
바이징팅이 호방하게 웃었다.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연락하십시오. 제 목숨이 살아있는 한 선생님을 잊지 않고 있을 테니까요.”
“저도요.”
두 연인은 윤도가 올 때처럼 함께였다. 변한 건 생기였다. 마른 나무 같던 두 사람. 이제는 봄살이 오르는 수양버들처럼 푸른 생기가 돌고 있었다.
“채 선생님.”
첸슈에센과 마롱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생의 끝자락에서 눈이 호강을 했습니다. 침술은 한국이 원류라더니 인정합니다.”
마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덕분에 좋은 경험했습니다.”
“중국에 한 번 오세요. 돌아가면 제가 저희 병원에 청해서 강연이라도 한 번 잡도록 하겠습니다.”
첸슈에센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말만 들어도 영광입니다.”
인사를 남기고 헬기에 올랐다. 네 사람은 헬기가 바다를 끼고 멀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바이징팅이 마롱에게 인사를 전했다.
“별 말씀을... 너무 늦지 않게 명의를 만나 다행입니다.”
“늦기는 했었죠. 하지만 진짜 명의라 목숨을 건진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땅이 참 신기하죠? 이 작은 나라에 저런 인물들이라니.. 역사를 두고 두고 생각해도 늘 그랬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지요. 저력이 가득한...”
“그거 아직도 들고 있나?”
마롱의 시선이 첸슈에센에게 돌아갔다. 그 손에 들린 탕제봉지 때문이었다.
“이거... 본국에 돌아가 분석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생각이 바뀌었네.”
“예?”
“어쩌면 그 비방은 우리 손에서 해결되지 않을 걸세. 그냥 여기다 회장님의 전설로 남겨두고 가자고.”
“그럴까요?”
첸슈에센의 손이 약봉지를 놓았다.
고오오오!
윤도의 비행기가 이륙을 했다. 좌석에서 윤도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통 큰 바이징팅, 윤도의 좌석을 1등석으로 준비했다. 놀라운 건 그 라인의 네 좌석을 몽땅 샀다는 것. 윤도의 쾌적한 귀가를 위한 배려였다.
HIV.
비행기 안에서 치료과정을 메모했다. 혈자리와 약침의 반응도 적었다. PDA를 가방에 넣으려던 윤도, 두 눈에 봉투가 들어왔다.
백지수표...
얼마를 적는다?1억?
10억?
치료비는 늘 뜨거운 감자다.
문득 풍용푸드의 지창용 회장이 떠올랐다. 윤도가 살려준 그의 마지막 하루. 그때 풍용푸드의 경영진들은 지창용 회장의 하루가 3억 5천만원 쯤 된다고 뽑아낸 적이 있었다. 한국 대표적인 기업의 수장이라지만 바이징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재산.
그렇다면 바이징팅의 하루는 얼마일까?
앞으로 30년 정도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일까?
그의 여자 시라의 계산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다 보니 이 일의 단초가 되었던 스떼빤도 떠올랐다. 그도 TS전자에서 백지수표를 받았다. 그는 얼마를 적었을까?
50억?
100억?
풋!
그냥 웃음이 나왔다. 풍용푸드 지상윤에게 견적 부탁을 할까? 아니면 스떼빤에게 슬쩍 심정을 물어볼까? 그것도 아니면 부용에게?
아, 이런 건 역시 윤도 스타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꼭 적어야하는 날 기분 내키는 대로.’
윤도의 결론이었다.
은백, 양릉천, 삼음교를 어디에 쓸고하니.
콜록!
입국장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온 세계가 독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베이징에서 숨진 어린이가 100여 명에 달하고 영국과 미국에서도 각각 80명과 32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번 독감은 변종이 많은 A형 H3N2로 이례적으로 기승을 부리며...”
콜록!
엄마 손을 잡은 여자 아이가 윤도 옆에서 심한 기침을 하며 주저앉았다. 젊은 엄마는 아이를 잡고 어쩔 줄을 몰랐다.
“제가 한의사인데 잠깐 봐드려도 될까요?”
“어머, 그래 주시겠어요?”
“어디보자...”
윤도가 아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제대로 오르고 있었다.
“예방주사를 맞췄는 데도...”
아이 엄마는 울상이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더 아프다. 장침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아이를 돌려세웠다. 그 자리에서 뒷목의 풍부혈과 풍지혈을 몇 번 눌러주었다.
“콜...”
몰아치던 아이의 기침이 멈췄다.
“어머!”
“기침은 잡았습니다. 집에 가시면 가까운 병원에 가세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이 엄마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 저 사람 채윤도야.”
그때 뒷줄의 여학생들이 윤도를 알아보았다. 윤도는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원장님!”
공항에는 진경태가 나와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진경태가 키를 흔들어 보였다. 윤도의 스포츠카였다.
“그럼 미안한데...”
“아, 그래야 저도 스포츠카 좀 몰아보죠. 저번에도 그랬지만 액셀러레이터 밟는 맛이 기가 막히던데요? 마치 약성 밍밍한 대량생산 약재만지다 야생 대물 한약재 냄새 맡는 느낌입니다.”
“그럼 신세 좀 질까요?”
윤도가 조수석에 올랐다.
“가신 치료는 당연히 성공?”
진경태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당연히는 아니지만 성공이에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저씨가 따온 버섯들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말이라도 고맙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닙니까? 그 약을 명약으로 살릴 수 있는 건 원장님 명침 뿐입니다.”
“그런 가요?”
“이거 드시고 한잠 자세요. 보아하니 잘 것 다 자고 치료하지는 않으셨을 테고...”
진경태가 한방 진액 한 봉지를 내밀었다. 그걸 마시고 눈을 감았다. 꿀잠이 밀려왔다.
“......!”
눈을 떴을 때, 그 앞에 보인 건 승주였다. 어느새 한의원 앞이었다.
“다 왔습니다.”
진경태가 웃었다.
“예약 환자는?”
복도를 걸으며 상황을 물었다.
“숨부터 돌리세요.”
“괜찮아. 기다리는 분 계시면 모셔.”
“그보다 손님이 다녀갔어요.”
“손님?”
원장실에 들어선 윤도가 돌아보았다.
“그 노숙자 분...”
“아, 노윤병 선생?”
“한참 기다리시다가... 이거 전해드리라고...”
승주가 박스를 내밀었다. 안에 든 건 신형 나노 침이었다. 미국의 공학자에게 부탁한다더니 도착한 모양이었다. 바로 감사 전화를 걸었다.
“노 선생님, 오셨다 가셨다고요?”
“아, 예... 지나는 길에 잠깐...”
“제가 지방 왕진이 있어서요. 나노 침은 잘 쓰겠습니다. 비용은 어떻게 할까요?”
“비용이라뇨? 그 친구가 평생이라도 만들어준다고 했으니 그냥 쓰셔도 됩니다.”
“그래도 미안하잖아요?”
“미안한 건 접니다. 요즘 좋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습니다.”
노윤병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이제 곧 한의대 편입을 하게 될 노윤병. 틈 나는 대로 도서관에서 한의서로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럼 다음에 오시면 제가 백회혈에 침 하나 묻어드릴 게요. 머리에 기 좀 넣어야죠. 밥도 한 끼 대접하고요.”
“좋죠. 아무튼 빨리 끊고 진료하세요. 아까 보니까 기침하는 꼬마 환자들이 많던데...”
눈치 빠른 노윤병이 전화를 끊었다.
“독감 환자들 많이 왔어?”
윤도가 가운을 입으며 물었다.
“네... 좀 심한 경우만 받고 있는 데도...”“그럼 막간을 이용해서 아이들부터 들여보내. 아이들은 오래 참지 못하니까.”
“네.”윤도, 또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 독감 어린이 네 명에게 시침을 했다. 심하지 않은 환자는 기죽마혈로 잡았고 조금 진행된 경우는 신주혈과 명문혈에 폐수, 격수혈을 더해 회복을 도왔다.
“고맙습니다. 한의사 선생님.”
기침이 멎은 꼬마 환자들이 배꼽인사를 했다. 피로가 확 풀려나갔다.
숨을 돌리고 예약환자를 받았다.
32살의 진애선.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밝았다. 미인은 아니지만 인상이 좋았다. 몸매는 더 좋았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윤도가 문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