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265)

“월경이 좀 문제인 거 같아서요.”

대답을 하면서도 환자는 연신 눈웃음을 쳤다.

“어떻게 문제죠?”

“이게... 갑자기 피가 산더미처럼 쏟아지더라고요. 놀라서 죽는 줄 알았어요.”

산더미 같은 월경? 그렇다면 월경보다 붕루 쪽이 의심되었다.

“지금은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어요. 많이 쏟아질 때보다는 줄었지만...”

“진맥 좀 할까요?”

윤도가 말하자 여자가 손을 내주었다. 맥을 잡는 순간, 여자의 몸이 꿈틀 반응을 했다. 긴장이 아니라 남자를 느끼는 반응. 윤도는 아는 척 하지 않았다.

“......!”

맥을 잡은 윤도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붕루가 맞았다.

<붕루>

갑자기 대량의 피가 나오는 자궁출혈을 이른다. 그 종류는 아홉 가지가 꼽힌다. 붕루에 대한 기억은 광희한방대학병원 연수의 경험이 강력했다. 특급초밥요리사 유수미. 그녀의 붕루 덕분에 제대로 긴장했던 윤도였다. 하지만 이번 붕루는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피가 섞인 소변도 보이죠?”

“그런 거 같아요.”

“혹시 결혼하셨나요?”

“아뇨. 싱글이에요.”

“예...”

윤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싱글에 붕루. 우려하던 그 붕루가 맞았다. 다시 진맥을 계속했다. 맥으로 심포의 정보를 받았다. 심포가 상해 있었다. 그것도 많이.

심포는 심장을 싸고 있는 막이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지만 형체 없이 심장을 보조하는 기능만 지녔다고 본다. ‘심보가 고약해’라고 말할 때의 그 심보가 심포다.

꿈틀.

몇 군데 혈자리를 확인하자 그때마다 여자가 움츠렸다.

잠시 잊었던 바이징팅이 떠올랐다. 그는 정욕의 노예였다. 닥치는 대로 여자를 가졌다. 넘치는 성욕이 여자를 당긴 것이다. 이 환자 진애선. 이 여자도 그 캐릭터였다. 붕루 중에서 가장 치료 난이도가 높은 붕루. 처녀가 남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발생하는 출혈이었다.

“월경이 아니고 붕루네요.”

윤도가 진맥을 끝냈다.

“붕루요? 월경이 아니라고요?”

진애선이 물었다. 그녀의 붕루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공교롭게 월경일과 겹쳤다. 그렇기에 그녀는 월경으로 알고 있었다.

“붕루입니다. 월경하고는 다릅니다.”

“네...”

진애선의 볼에 살포시 홍조가 졌다. 홍조 사이로도 윤도를 남자로 보는 시선이 엿보였다.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하고 싶은 바이징팅. 남자만 보면 안기고 싶은 여자 진애선...

병적이라지만 이 또한 음양의 조화였다.

여자는 음이고 남자는 양이다. 음은 응결하고 모이는 성질이고 양은 발산하는 성질이다. 진애선의 음은 너무 강했다. 그 강함의 시작은 심장이었다. 남자의 경우, 정신적인 영향으로 발기부전이 오면 심장을 치료하는 것과 같았다. 심장의 이상이 심포를 쳤다. 심포가 상하면서 붕루가 된 것이다. 이런 증세는 극한의 슬픔을 겪을 때도 올 수 있었다. 다만 정도가 달랐다.

그러나 설명하기 곤란했다.

“너 남자 밝히지?”

한의사된 입장에 천박한 돌직구를 날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한 자위도 예상되는 일. 그 또한 입 밖에 내기 쉽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조금 돌았다.

“혹시 소설 좋아하세요?”

“소설요? 로맨스소설이나 장르소설은 종종 보는데...”

“김동인의 소설 중에 발가락이 닮았다는 작품이 있어요.”

“어, 저 그거 알아요. 학교 때 배웠어요.”

“주인공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세요?”

“주인공은 잘...”

“주인공은 M이라고 나오는 데요 여자를 굉장히 밝히는 사람이죠. 이십대까지 상대한 여자만 해도 200명이 넘는다는 말이 나와요. 가히 요승으로 불리는 신돈 찜 쪄 먹을 사람이죠. 소설이긴 하지만...”

“네...”

“붕루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성관계 생각에 전격 몰입할 때도 생길 수 있습니다.”

“......”

“결국 소설 속의 남자는 생식능력을 잃고 말죠. 만약 소설이 아니고 여자의 경우라면 더 큰 질병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후우!”

진애선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말을 알아들었다는 징조였다. 그녀는 숨결을 다듬은 후에 조용히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그 소설 속의 남자와 비슷해요.”

빙고.

내심 쾌재를 부르는 윤도였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손님 하나 때문에...”

‘손님?’

윤도는 내색 없이 경청에만 몰입했다. 진애선의 붕루 사연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손님이었다. 진애선이 운영하는 노래방이었다. 언제나 혼자 와서 노래를 부르고 갔다. 노래도 기가 막히게 잘 했다. 나이는 진애선보다 몇 살 많았다. 인상까지 좋아 호남형이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오늘은 아가씨 좀 불러주세요.”

처음 나온 오더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없이 도우미를 넣어주었다. 손님은 왕이니까.

둘은 죽이 잘 맞았다. 남자는 이제 그 아가씨와 파트너가 되었다. 오기만 하면 함께였다. 질투가 났다. 어느 날, 그 질투심이 손님의 노래방 안을 엿보게 만들었다.

‘헙!’

진애선이 입을 막았다. 차마 못 볼 꼴을 본 것이다. 둘은 그 안에서 은밀하게 붙어먹었다. 심장에 불길이 일었다.

한 번도 아니었다. 오기만 하면 루틴이 되었다.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던 남자 손님. 그 남자가 붙어먹는 건 도우미 중에서도 막 생긴 유부녀. 이제 남자의 방문은 즐거움이 아니라 질투의 순간이 되었다.

그 질투는,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진애선은 자신의 몸을 만졌다. 가슴도 좋고 각선미도 좋았다. 아무 손님에게나 안기는 그 도우미하고는 비교불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이 일어났다. 남자가 찾는 도우미가 출근하지 않은 것이다. 손님도 거의 없는 터라 진애선이 추파를 던졌다.

“아유, 오늘은 손님도 없네. 저 잠깐 앉아도 되요?”

옷까지 타이트한 미니스커트로 갈아입은 후였다. 시원하게 드러난 다리를 본 남자가 추파를 물었다. 진애선은 그날, 그 남자와 뜨거운 시간을 가졌다. 진애선의 성욕이 봇물 터지듯 터진 날이었다.

이날부터 육욕의 화신이 되었다. 옷차림부터 바꿨다.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만 입었다. 그 남자가 오면 그 품에 안겼고 오지 않으면 반반한 다른 손님을 겨누었다. 불길은 점점 더 번져나갔다. 가게 문을 닫고 잠들 때도 남자 생각이 났고, 손님들이 오지 않는 시간에도 그랬다. 그럴 때는 자위로 뜨거운 몸을 달랬다.

어느 날 첫 붕루가 왔다. 남자 손님 둘이 도우미를 부른 날이었다. 그중 한 남자가 기가 막히게 땡겼다. 늙은 도우미들과 블루스 추는 모습을 보자니 몸이 달아올랐다. 복도를 오가며 몸부림을 쳤다.

순간,

붕루가 터졌다. 아랫도리 뜨끈하게 흘러내리는 흥건함. 그날 역시 생리일 목전이므로 생리가 터진 줄만 알았다.

“일이 그렇게...”

진애선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심장 기능이 넘쳐서 그런 겁니다. 조금 조절하면 괜찮아질 겁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이제는 조금 괜찮은 남자만 봐도 안기고 싶고...”

“그 생각이 가라앉도록 조절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잖아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던 중이었어요.”

“침대에 누우시죠.”

윤도가 진료대를 가리켰다.

장침을 몇 대 꽂았다. 은백혈과 양릉천혈, 삼음교의 3혈이었다.

“아!”

“아아!”

혈자리를 잡을 때 진애선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온몸이 성감대인 ‘올감대’의 여자였다. 이러니 남자가 건드리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 출혈은 이제 멎을 겁니다.”

“그런 거 같아요. 거기 질척한 느낌이 줄었네요.”

“침 몇 대 더 들어갑니다.”

말과 함께 심장의 모혈 거궐혈에 장침을 꽂았다. 거궐혈은 심장의 대궐. 다음은 신장의 모혈인 경문혈이었다. 두 혈에서 기혈 조절을 했다. 신장의 물(水)을 조절해 달아오른 심장의 불(火)을 달랬다.

“아아!”

“아.”

불길을 잡자 진애선의 교태음이 조금씩 낮아졌다. 마침내 교태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없애서는 안 되기에 필요한 정도는 남겨두었다. 석녀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망가진 심포는 궐음수, 천천혈을 조절해 극문혈을 통해 쫓아냈다. 내관혈과 중충혈에서 마무리를 하니 진애선의 뜨겁던 애욕시대는 마감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눈빛도 조신해졌다. 야릇함으로 탱탱하던 눈웃음에서 단아한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다.

여자 바이징팅이라고 볼 수도 있는 진애선. 일찌감치 찾아와줘서 다행이었다. 수많은 남자들과 애욕을 나누다보면 그녀 역시 HIV 감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SOS 베이징-1

SOS 베이징-1

나흘 동안 비가 내렸다. 그래서인지 일반 환자들 중에서 신경통 환자 방문이 늘었다. 예약이 원칙이지만 돌려보낼 수 없었다. 대개 나이든 어르신들이기 때문이었다.

남는 시간에 짬짬이 치매 신약을 점검하고 논문 정리를 했다. 그러다가 류수완의 방문을 받았다. 윤도가 시간을 잘 정하지 못하자 무대뽀로 쳐들어온 류수완이었다. 그를 따라 음식점으로 갔다.

“드세요.”

류수완이 수육을 가리켰다. 그의 부친 때부터 단골이라고 했다. 윤도가 잠깐 시간이 난다고 하자 납치하듯 데려온 류수완이었다.

“비주얼부터 죽이는 데요?”

“당연하죠. 훈장 받은 분이 드실 거 아닙니까?”

“에이, 쑥스럽게...”

“뭐가 쑥스럽습니까? 덕분에 저도 대통령 표창 하나 챙겼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수육 다 드셔도 모자랍니다.”

“폐는요?”

수육 한 점을 소스에 찍어 문 윤도가 안부부터 물었다. 직업은 못 속인다. 큰 병을 앓은 사람이라면 예후부터 묻게 되는 윤도였다.

“좋습니다. 요즘 계단 걷기 운동도 시작했는데 숨도 별로 안 차거든요.”

“계단 걷기요?”

“그게 건강에 좋다면서요? 워낙 자가용이 대세다 보니...”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당연하죠. 저도 이제 건강이 우선입니다.”

류수완이 웃었다.

“바쁘신데 좀 그렇지만... 치매 신약은 어디까지 나가셨습니까?”

“조금 더 다양한 사례를 실험 중인데 마무리 단계입니다.”

“지난번에 2차로 넘어온 샘플도 좋다고 하더군요. 생쥐 실험에서 괄목할 성과가 나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다행이네요.”

“거기서도 계속 보완을 하셨죠?”

“예, 엊그제는 탕약만으로 처방을 했는데 호전 현상이 뚜렷했습니다.”

“역시...”

“첫 신약 반응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대박이죠. 카피에 혈안인 중국 측에서도 판매가 신장되고 있습니다. 그쪽에도 지금 괴질성 독감으로 난리가 아닙니까? 해서 어린이 천식환자들까지 덩달아 느는 통에...”

“사장님 마케팅이 먹히고 있군요.”

“그래서 저도 첫 입금된 금액의 순수 이익금은 난치병 환자들을 위해 전부 기부했습니다.”

“예?”

“상까지 받았으니 그냥 있을 수 있어야죠. 그래봤자 채 선생님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요.”

“사장님...”

“폐암 고쳤을 때부터 생각하던 겁니다. 저도 돈 좀 벌면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님처럼 기업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기부라는 게 돈 번 다음에 하려면 너무 늦을 거 같아서...”

“굉장한 결단 내리셨군요. 좋은 일 하셨으니 앞으로 계속 잘 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반주를 들이킨 류수완이 말을 이어나갔다.

“기왕 잘 될 거라면 이번 신약은 아예 북미시장부터 들이대는 게 어떨까요? 그래야 기부도 팍팍 하게 되죠.”

“북미라고요?”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북미시장이라면 미국이다. 미국은 세계 제약 시장의 심장부. 그렇기에 웬만한 신약은 넘보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이번에 저희가 채 선생님 벤치마킹을 좀 했습니다.”

“저요?”

“TS전자의 글로벌 두뇌 스떼빤 말입니다. 기사를 보니 선생님 덕분에 TS가 향후 10-20년은 세계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자극 받아 인재 헌팅에 나섰죠. 신약도 IT나 AI 못지않은 격전지거든요.”

“예...”

“기술력은 다행히 선생님이 계시니 크게 꿀리지 않는데 시스템이 모자랍니다. 해서 FDA 핵심 인력 중의 한 사람을 잡았습니다.”

“FDA라고 하셨습니까?”

윤도의 동공이 출렁거렸다. FDA라면 미국 보건후생성 산하의 식품의약국이다. 독립된 행정기구로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식품, 의약품, 화장품 등의 효능과 안전성을 관리한다. 직원들의 수준과 함께 만족도도 높아 이직률 낮기로 소문난 곳. 그런 곳의 핵심인력을 데려오다니?

“대단하시군요?”

“대단한 건 채 선생님입니다.”

“제가요?”

“우리가 TS처럼 백지수표 내밀 규모가 됩니까? 그래서 선생님을 내세웠죠. 이번 치매 신약도 살짝 소스를 뿌렸습니다. 알레르기 비염 신약 만든 분이 만든 거라고. 그 말에 뻑가더군요. 그래서...”

“......”

“일단 첫 신약으로 포문을 열었으니 최대 시장인 미국 진출 교두보는 마련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돌아갈 필요 없죠. 메이저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그 탄력으로 세계시장으로 가는 겁니다.”

“하지만 제2 신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만...”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제가 바보입니까? 지금까지의 샘플만으로도 FDA 기준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사장님.”

“해서 제가 전체적으로 정리를 해봤는데...”

“......”

“지금 논문도 함께 준비 중이시지 않습니까?”

“예.”

“그거 사례가 마감되면 제게 넘겨주십시오. 제가 전문가들 동원해서 규격에 맞춰 손봐드리겠습니다. 심사 측에서 아야 소리 못하게 말입니다.”

“하핫.”

그 말을 들은 윤도가 웃었다.

“왜요? 못할 거 같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하지만 대필은 사양합니다.”

윤도가 선을 그었다.

논문 대필...

한국에서는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교수는 놀고 조교가 쓰는 경우도 있었다. 교수는 연구비만 챙기고 대학원생들이 쓰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는 비일비재한 일이었고 사회적으로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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