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65)

이제는 구태를 벗을 때였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대필이나 표절 논문이 발목을 잡는 시대가 되었다. 정치권이나 유명인들의 논문 파동을 볼 때마다 윤도는 안타까웠다. 돈질로 산 논문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남의 논문 카피해다가 짜깁기한 게 무슨 성취감일까?

그렇기에 이번 논문에 공을 들이는 윤도였다. 조수황 교수와 양방 의사들의 조언을 받고는 있지만 논문은 오롯이 윤도의 노력 속에서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더구나 이 일은 한의학과 침술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놓으려는 야심도 들어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잡음이 끼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윤도 말을 들은 류수완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사장님 생각 자체는 이해하니까요.”“그럼 언제 쯤 기고를 하실 건지... 심사하는 시간도 꽤 걸리거든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디에 기고할 지는 정하셨습니까? 제 생각이지만 선생님 침술 수준과 연구 난이도 등을 종합했을 때 사이언스 쪽이...”

“그 쪽은 아닙니다.”

“그럼 셀지?”

“처음에는 그런 쪽을 생각했는데...”

“첫 논문이라 부담이 있는 겁니까? 하지만 선생님 수준이면 그 정도는 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 심사를 받아보시고 안 되면 그때 한 단계 낮추는 게...”

“그 반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입니다.”

“......!”

윤도의 말에 류수완이 흔들거렸다.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

의학 쪽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인정 받는 학술지.

짝짝!

류수완은 말대신 박수로 대신했다. 두 말이 필요 없는 결정이었다. 윤도라면 그 정도는 바라보는 게 옳았다.

“형!”

집으로 돌아오자 윤철이 윤도를 반겼다. 이유가 있었다. 엊그제 하루 스포츠카를 빌려줬던 것. 사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심부름이었다. 진경태의 지인 약초꾼이 좋은 약초를 캤다고 해서 내려 보낸 윤도였다. 스포츠카에 꽂힌 윤철은 알바비 한 푼 받지 않고 자원을 했다.

물론 윤철은 윤철대로 속셈이 있었다. 최근 공을 들이는 여자 친구를 태우려는 것. 눈치를 보니 윤철의 속셈이 먹힌 것 같았다. 결과만 보면 윤도와 윤철이 윈윈한 일이었다.

“어서 와, 우리 채 의원.”

어머니 목소리도 즐거웠다. 그렇지 않을 일이 없었다. 윤도가 이런 저런 유명세를 타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다. 아버지는 실속도 많았다. 윤도의 치료를 앞세워 여러 기업체에서 납품요청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현장을 진두지휘하느라 아직도 귀가 전이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할까? 냉동실에 넣어둔 거 있는데?”

“좋죠.”

윤도가 화답했다. 맥주는 윤철이 꺼내왔다. 이제는 약간의 반항도 없는 윤철이었다.

“전하, 곡주를 드시옵소서.”

윤철이 고개를 숙인 채 맥주를 따랐다.

“장난 칠래?”

윤도가 레이저를 쏘았다.

“아, 훈장 탄 몸이잖아? 내 친구 놈이 그러는데 훈장 타면 큰 죄를 지어도 다 봐준다며?”

“누가 또 그런 헛소리를 하냐?”

“얘, 그거 나도 들었다. 박 여사님이라고 공무원하다가 퇴직했는데 상훈이 크면 살인죄도 정상참작이 된다고 하더라.”

어머니까지 합세한다.

“아, 참... 그거야 그냥 하는 얘기죠. 술이나 한 잔 하세요.”

윤도가 어머니 잔에 맥주를 채웠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윤도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목욕재계를 하고 신비경을 잡았다. 어떤 약재를 볼까 생각하다 중산경의 민산에 멈췄다. 제백이라는 가시나무 앞이었다. 이 나무의 붉은 열매를 지니면 추위를 타지 않는다.

추위...

일교차가 심하면 감기에 잘 걸린다. 요즘 부쩍 늘어난 감기와 독감환자들 때문이었다.

콜록!

누구든 한두 번은 걸릴 수 있는 감기.

한방에서 감기는 풍한감기와 풍열감기로 나눈다. 풍한 감기는 바람과 찬 기운에 의해 발병한다. 증상으로는 오한에 재채기, 땀은 나지 않고, 체온상승에 코가 막힌다.

풍열감기는 바람과 뜨거운 기운에 의해 온다. 풍한감기와 달리 열이 나고 체온상승, 미열작렬에 추위를 느끼고, 누런 콧물이 나온다.

지금 세계는 독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몰론 감기와 독감은 족보가 다르다. 독감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발생하는 질환이다. 그렇다면 한약으로 독감도 잡을 수 있을까? 답은 가능하다였다. 한약에 해열 및 면역기능 향상 효과가 있기 때문에 독감의 예방 및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역시 면역이다. 몸이 튼튼하면 감기도 독감도 걸리지 않는다. 혹 걸리더라도 가볍게 앓고 지나가게 된다.

동산경으로 건너간 윤도가 갈산에 멈췄다. 이곳에서 만난 영약은 ‘주별’이었다. 독감이나 전염병처럼 유행하는 유행병을 막아주는 영약이었다. 호기심까지 더해지면서 주별을 당첨 약재로 뽑았다. 주별이 현실로 나오자 생체분석기부터 돌렸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208년

[약성함유등급] 上上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가능

[용법용량] 둥근 결정체만 떼어 약한 숯불로 노릇하게 2시간 볶는다. 완전히 식힌 후에 3회를 반복해 볶은 후, 가루를 낸다. 환자의 손톱 크기 환으로 하루 2회 복용한다. 5세 미만, 60세 이상의 노인은 복용을 금한다.

[약효기대치] 上中

산해경...

그 보고(寶庫)는 오늘도 윤도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유행병을 없애줄 영약, 한국은 아직 독감이 심각하지 않지만 연구를 겸해 챙겨두었다.

잠들기 전 논문자료를 찾느라 검색을 했다. 메인 뉴스가 좋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악명을 떨친 독감이 영국을 강타하더니 미국과 사하라 이남까지 번지고 있었다. SARS에 못지않은 위력이었다.

국제 뉴스 또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HIV로 인연이 된 바이징팅 기사였다. 그는 화요일 오전에 공개검사를 받았다. 제3의 기관까지 참석시킨 증명이었다.

검사지에 찍힌 결과였다.

바이징팅은 자신을 겨눈 루머(?)에 정면승부를 걸었다. 그 결과 바이징팅을 흠집내려던 기업과 정적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사진에 나온 바이징팅의 미소가 환하게 보였다. 그 미소의 이면에 윤도가 있다는 것. 그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유여하를 떠나 이런 루머에 휘말린 부덕을 깊이 반성하며 앞으로 기업의 가치만큼 국민과 국제사회, 어려운 이웃에게 공헌하는 자세로 살겠습니다.”

바이징팅의 선언 또한 윤도 마음에 남았다. 그는 윤도 앞에서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위기를 벗어나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진심으로, 세상에 공헌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새로 찾은 삶.

그게 바이징팅을 바꾸어놓았다.

어쩌면 마음이 통하기라도 했을까?

다음 날, 바이징팅에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채 선생님.”

훨씬 좋아진 바이 회장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끄는 마력이 배어있었다.

“웬일이시죠?”

나노 침을 고르던 윤도가 전화를 받았다.

“죄송하지만 저 한 번만 더 살려주셔야겠습니다.”

전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징팅의 목소리는 끝 간 데 없이 정중했다.

SOS 베이징-2

SOS 베이징-2

살려주시오.

그러나 그 말의 뜻은 좋은 데 있었다. 그가 말한 사회공헌이었다. 그는 첫 공헌으로 기부를 택했다. 베이징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독감퇴치가 그것이었다. 그는 베이징 일대의 어린아이들 백신과 약품으로 100억을 쾌척했다. 나아가 종합병원, 중의대학병원에도 거액의 독려금을 내놓았다.

하지만 가시적인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효과는커녕 베이징 국가어린이병원에 입원한 중증 환자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바이징팅이 그 현장을 방문했다. 어린이들의 신음을 차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들 가족 또한 눈물의 나날을 헤매고 있었다.

지옥의 나날에서 만나는 절망.

HIV 합병증을 앓았던 바이징팅이 모를 리 없었다.

“쉽지 않습니다.”

병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양방, 한방이 합세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극악 독감의 위세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떠오른 게 윤도였다.

“대한민국 채윤도 선생님.”

시라의 의견도 같았다. 그렇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어온 바이징팅이었다.

“부디 부탁합니다. 상황이 급한 어린이 병원만이라도...”

“회장님...”

“제 명예 때문이 아닙니다. 현장을 보니 차마... 제 앞에 다녀간 우리 주석께서도 국가적 총력을 다하라고 했다지만...”

“마롱 선생은 어떻습니까?”

“마롱 뿐만 아니라 대륙 명의 쑨취앤 등이 총동원되었지만 병세를 약간 늦추는 정도일 뿐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오늘도 벌써 여섯 명의 아이들이...”

“......”

“부탁합니다. 치료 때문에 발생되는 선생님의 비용과 수입은 모두 열 배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돈 때문에 그러는 게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이쪽 사정이 워낙 딱하기에...”

“......”

“선생님.”

“오후에 일정을 빼보죠. 하지만 오래 있지는 못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수행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한국에서의 수행은 필요없고, 비행기표 준비해주시고 베이징 공항에나 차를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나오시게요?”

“그때까지는 베이징에 있을 겁니다. 만약 안 되면 시라라도 내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윤도가 전화를 끊었다.

응급상황.

이번에는 베이징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 하지만 아이들이 죽어나간다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렇잖아도 베이징과 미국, 영국 등지의 아이들이 독감으로 희생된다는 뉴스에 의료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던 차였다.

“아저씨.”

당장 약제실로 뛰었다.

“탕제요?”

“네.”

“환자가 단체로 오기라도 하나요?”

“중국 출장이에요.”

“에? 또 출장요?”

“베이징에 독감이 창궐 중이잖아요? 마음이 안 좋던 판에 의뢰가 왔어요. 기왕 가는 거 한약의 우수성을 보여줘야죠.”

“하지만 우리가 가진 감기 탕약과 독감 탕약은...”

“그거 말고 팔각회향 있잖아요.”

“아!”

진경태가 이마를 짚었다.

<팔각회향.>

중국 음식 오향장육 등에 들어가는 향신료다. 그 씨앗에서 추출한 성분이 독감 잡는 명약으로 쓰인다. 이름은 저 유명한 ‘타미플루’. 팔각회향에서 추출한 ‘Shikimic acid’가 원료로 쓰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팔각회향이나 오향장육을 많이 먹으면 독감을 치료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오향장육 등에 들어가는 Shikimic acid는 소량이다. 그런 요리를 많이 먹는다고 해야 단지 배가 나올 뿐이었다.

“감기에 쓰이는 탕제하고 함께 진액으로 뽑아주세요. 제가 혈자리에서 약효 증폭 시켜볼 테니까요.”

“아, 그러면 되겠군요.”

“아침에 드린 약재도 같이 챙겨두시고요.”

“알겠습니다. 하는 김에 원장님 기혈보강환도 챙겨놓겠습니다. 꼭 드시고 가세요.”

“그러죠.”

대답을 남기고 접수실로 향했다. 정나현에게 할 지시가 있었다.

베이징은 가깝다. 잘 연결만 된다면 제주도 다녀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화급한 아이들만 봐준다고 보면 하루면 될 일이었다. 그러자면 내일 오전의 예약을 앞당겨야했다.

“알았어요.”

정나현이 대답했다. 윤도 얼굴에 가득한 비장미. 이제는 얼굴만 봐도 윤도의 마음을 짐작하기에 묻지도 않았다.

“여기 일침 한의원인데요? 내일 오전 예약이시죠?”

한의원의 전화가 불이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환자들은 군소리 없이 협조해주었다. 그들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명침을 맞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바이징팅의 비행기표는 럭셔리했지만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다. 베이징의 강풍 때문에 도착이 늦는 것이다. 연락을 받은 바이징팅, 그 능력이 빛을 발했다. 바로 중국 국적의 다른 비행기 편으로 바꿔준 것이다. 윤도는 30분 정도 늦게 비행기에 올랐다.

1등석은 편안했다. 하지만 쉴 시간이 없었다. 세계를 강타 중인 독감이었다. 게다가 바이징팅이 야심차게 초대하는 마당. 어린 환자들을 만나게 되면 가장 효과적인 침술로 회복을 돕고 싶었다. 의서를 보며 혈자리를 복기했다.

초기 감기에는 폐수혈 풍문혈.

막힌 코를 뻥 뚫어주는 영향혈.

목 감기가 심하면 천돌혈.

콧물 스톱 대추혈.

콜록 스톱 전중혈.

여기에 더해 은근히 효과 좋은 공최혈...

가지고 온 약침액은 환자에 따라 혈자리가 선택될 일이었다.

그런데...

돌연 비행기가 흔들리더니 몸이 40도 가까이 기울었다.

“까악!”

비행기 안에 비명이 일었다. 사람이 많은 일반석 쪽이 더 했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위 러 익스펙팅 터블런스...”

방송이 숨 가쁘게 나왔다. 난기류를 알리고 있었다. 비행기는 마치 선로를 벗어난 열차처럼 무섭게 흔들렸다. 그럴수록 비명은 더 높아졌다.

“악!”

“아악!”

1분 가까이 흔들리던 비행기가 겨우 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비명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까아악!”

“이봐요. 이제 괜찮아요.”

중간 자리의 중국인이 중국어로 소리쳤다. 그래도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그 앞 쪽에 자리한 30대 후반의 중국임산부였다.

“진정하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승무원이 여자 승객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임산부가 승무원을 잡고 늘어졌다.

“......!”

승무원의 눈이 뒤집혔다. 승객의 비명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 흥건한 하혈이었다.

“왜 그러세요?”

승무원이 임산부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러자 하혈만큼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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