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시선을 돌리던 윤도 입에서 짧은 감탄이 나왔다. 창에 붙은 종이 때문이었다.
<채><윤><도><선><생><님><사><랑><해><요>
모두 열 장의 종이. 격리실 병실 창에 붙은 한글이었다. 삐뚤빼뚤한 걸 보니 아이들이 직접 쓴 모양이었다. 격리실 창은 열리지 않는다. 어쩌면 양이닝이 아이디어를 냈을 수도 있었다. 윤도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만들어주었다. 아이들의 손이 창 안에서 반짝거렸다.
‘다들 건강하렴.’
윤도의 진심이었다.
영웅귀환.
영웅귀환.
베이징 공항도 ‘닥치고 통과’였다. 베이징 당국의 조치였다. 바이징팅과는 출국장에서 작별을 했다. 그 역시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바쁜 사람이었다. 더구나 주석이 오는 통에 하루를 더 허비한 그가 아닌가?
빠라빠라빵!
탑승구 앞에서 전화기가 울었다. 한국의 정나현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물론이지.”
“여기는 안 괜찮아요.”
“왜?”
“뉴스가 나왔잖아요? SS병원하고 광희대학병원 과장님도 그렇고 일반 독감 환자들 전화가 빗발치고 있어요.”
“뭐라고 나왔는데요?”
“이번에는 베이징 대첩이라고 나왔어요. 신의 채윤도 베이징 강림. 중국의 굴기, 장침 명의 앞에서 몸을 낮추다.”
“너무 오버네. 나는요? 잘 나왔어요?”
윤도가 조크 한 마디를 날렸다.
“당연하죠. 원장님은 정말... 잠은 주무신 거예요?”
“가면서 자면 되죠.”
“그런데...”
“또 뭐가 있군요? 빨리 말씀하세요.”
“실은 위안부 할머니 한 분에게 전화가 왔어요. 저번에 청와대에서 원장님께 침 맞은 분이라고 하더군요.”“왜요? 그 분도 독감 걸리셨나요?”
“그게 아니고 위중하신가 봐요. 쉼터 직원분 말씀이 원장님을 찾는다고...”
“......”
윤도가 잠시 말을 멈췄다.
위안부 할머니들... 한두 분이 아니었다. 아픈 곳도 많았다. 그걸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렸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환자가 많은 걸까?
“다른 말은 없고요?”
“그냥 아무래도 위중하다는 말만... 아까도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쩌겠어요? 귀국하면 시간 내서 들린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저씨 좀 바꿔주세요.”
윤도가 진경태를 찾았다. 미리 당부할 게 있었다.
“아, 팔각회향요?”
진경태는 금세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요. 약침이 약 1만병 분 정도가 필요합니다. 바쁘시겠지만 재료확보하고 고생 좀 해주세요.”
“수출까지 하는 겁니까?”
“그렇게 되었네요. 값도 두둑하게 책정되었습니다.”
“효과가 좋았군요?”
“아저씨가 제대로 추출한 덕분에 약빨이 끝내줬죠.”
“그게 원장님 명침 덕분이지 제가 무슨... 아무튼 듣기라도 좋군요. 공항으로 마중 갈까요?”
“아뇨. 그 시간에 약침제조나 부탁해요. 이쪽 상황이 좋지 않아서 빨리 보내야할 거 같거든요. 저도 빨리 들어갈 게요.”
윤도가 강조를 했다. 베이징의 괴질 독감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추이를 보아하니 한국 기자들이 그냥 있지 않을 것 같던 데요?’
진경태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당장 성수혁 차장에게 전화가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전화를 받은 윤도가 웃었다.
“아니, 중국 땅에 경기를 일으킨 사람이 왜 이러십니까? 호랑이는 채 선생입니다. 지금 어디세요?”
“베이징 공항 탑승구 앞인데요?”
“저 지금 인천공항에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혼자십니까?”
“그러면 특종인데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제1공항에 기자들 밖에 안 보입니다.”
“흐음, 그런 대한항공으로 바꿔서 2공항으로 들어가야겠군요.”
“채 선생님.”
“농담입니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아야죠. 대신 기자님들에게 빨리 좀 끝내달라고 전해주세요.”
“그것도 보장 못합니다. 그 정도 바라실 거면 가실 때 저한테 귀띔이라도 했어야죠.”
“어, 탑승하네요. 이따가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사이에 직원이 다가왔다. 그녀에게도 윤도를 잘 모시라는 지시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윤도는 1번 승객으로 입장을 했다. 비행기 문 앞에 중국 기장과 승무원들이 나와 윤도를 맞았다. 승무원 하나가 베이징 신문 기사를 들어보였다. 윤도와 독감 어린이, 주석까지 아우러지는 특집 기사였다. 환대를 받으며 1등석에 앉았다.
“저희 비행기 편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필요한 거 없으세요?”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기장과 승무원들이 합창을 했다.
“잠 잘 거니까 깨어날 때까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윤도가 답했다.
꿀잠.
윤도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
띠롱.
띠롱띠롱.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멈추자 다시 켠 핸드폰. 불이 날 정도로 문자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멋지세요. 선생님은 늘 제 자랑입니다.>
부용의 문자였다.
<형, 초대박, 내 친구들이 신과 동급 한의사래. 내 선물은 안 사와도 돼.>
동생 윤철의 문자.
<굉장하구나. 내 아들이 맞나싶다. 그래도 몸은 잘 챙기고 다니거라.>
아버지의 문자에...
<채 선생, 그 그릇 몰라보고 한 때마나 갈구었던 거 미안. 베이징 독감, 정말 대단해.>
이창승의 문자까지 줄줄이 들어왔다. 오죽하면 다 확인도 못할 정도였다.
“채윤도, 채윤도!”
입국장으로 나오자 입국심사대 앞의 인파가 윤도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울렸다.
일부는 사인을 해달라며 몰려들었다. 꿀잠을 잤기에 사인에 응했다. 연예인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공항 간부 하나가 다가왔다.
“채윤도 선생님?”
“그런데요?”
“실은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저를요?”
“복지부 노 차관님이라고...”
‘복지부?’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장 박사가 추진하는 한방의료원 일로 만났던 사람이었다.
“여깁니다.”
간부가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문을 열자 노 차관과 지 과장이 보였다. 둘 다 윤도에게 침술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채 선생.”
노 차관이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지 과장이 자리를 권했다.
“......!”
용건을 들은 윤도가 소스라쳤다.
“WHO에서 통보요? 이번 베이징 역학조사 자료를 독감 치료와 예방에 공식 반영하겠다고요?”
“그렇네. 그것도 사무총장이 직접 감사인사와 함께...”
WHO 사무총장의 통보. 그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즉 세계보건기구.
WHO는 인류가 신체적·정신적으로 최고의 건강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이를 위해 중앙검역소 업무와 연구자료 제공, 유행성 질병 및 전염병 대책 후원, 회원국의 공중보건 관련 행정 강화와 확장, 지원 등의 역할을 맡는다.
그 주요역할 몇 가지를 골라보면,
1) 보건시설 강화를 위해 각국 정부를 지원.
2) 질병학과 통계학을 포함한 기술적 행정적 서비스 제공.
3) 보건 분야에 대한 정보제공, 협의, 원조
4) 유행성, 풍토성 등의 질병 근절 노력.
5) 영양, 주거, 위생, 직장 등의 환경에 대한 위생상태 개선 장려...
독감으로 설명한다면 WHO가 매년 예측하는 유행경보에 준해 예방접종 백신을 준비하고 접종을 실시한다. 올해는 그게 빗나갔다. 덕분에 WHO에도 비상이 걸린 모양이었다.
그런 차에 베이징에서 괄목할 일이 일어났다. 어린이 사망사례가 사라지면서 독감의 기세가 꺾인 것이다. 그렇기에 윤도의 침술을 주목하는 WHO였다.
“어떻게 보면 국가적 경사이기도 해서 달려왔네. 무엇보다 한의학계 쪽으로 보면 드문 일인 것 같아서 말이야.”
“고맙습니다.”윤도가 답했다. 인연이란 이래서 소중한 걸까? 노 차관의 배려에 남은 피로가 가시는 윤도였다.
“입국장에 기자들이 득실거리더군. 채 선생 회견하러 온 모양이던데 끝나면 연락하시게. 서울까지는 내가 모셔다 드리겠네.”
노 차관은 지시와 함께 상황 마무리를 했다.
“......!”
입국장 문이 열리자 윤도가 걸음을 멈췄다. 기자들... 굉장히 많았다. 그 뒤로 보이는 시민들은 몇 배나 더 많았다.
와와와!
짝짝짝!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기왕에 맞을 매라면...’
윤도는 거침없이 좌중 앞으로 나섰다.
“중국 주석과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주석과 무슨 말을 나눴습니까?”
“중국 한의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WHO에서도 관계자가 나왔다지요?”
“목숨을 구해준 소녀가 선물한 그림을 보여주세요.”
기자들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한의원에서 저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몇 마디 응한 후에 인터뷰를 정리했다.
부릉!
노 차관 차량에 시동이 걸렸다. 운전은 지 과장이 맡았다.
“이거 채 선생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노 차관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드님은요?”
윤도가 이제 화제를 돌렸다.
“아, 채 선생님 만나러간다고 하니까 이걸 전해달라던데?”
노 차관이 공연표를 내밀었다. 모두 10장이었다.
“아드님이 출연하나요?”
“첫 공연이지. 단역 하나 맡은 모양인데 출연료대신 공연 티켓 열 장을 받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채 선생을 줘야한다고...”
“어, 그러면 안 되죠. 차관님이 가셔야죠.”
“아니야. 그냥 챙겨두시게. 나보고는 표 사서 오라지 뭔가? 그래야 흥행이 된다나.”
“......”
“우리 정명이 뜻이 그래요. 채 선생 덕분에 꿈을 이뤘다고 날마다 행복한 아이야. 그러니 그냥 챙기시면 고맙겠네. 아니면 나 그 놈에게 눈치 먹거든.”
“정 그러시면...”
별 수 없이 표 10장을 챙겼다.
“저번에는 일본이더니 이번엔 베이징... 저 먼 남해 바다의 섬에서 시작된 행보가 놀랍네. 다음엔 또 어디를 놀라게 할 건가?”
“독일 간다고 들었는데 거기 아닐까요?”
운전하던 지 과장이 거들고 나섰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이라니? 아까 우리 부처에서 장관님 주재로 회의를 열었는데 어떤 말이 나온 줄 아시나?”
“......?”
“지금 한의계에서 서울의료원 설립을 추진 중이지 않은가?”
“예.”
“의료원장에 채 선생을 앉혀야할까 싶다고 하더군. 나도 한 표 보탰네.”
“차관님.”
“솔직히 의료계가 위계질서가 좀 세지. 하지만 다른 분야를 보시게. 잘 나가는 분야들은 대개 젊은 두뇌들이 분전하면서 그 분야를 이끌고 있지. 의학은 생명을 다룬다는 이유로 경험을 중시하는 풍토가 있지만 천재성은 인정해줘야 하네. 그래야 우리 의학이 확 발전해서 세계 중심이 될 수 있는 거야.”
“......”
“하핫, 이거 채 선생이 나하고 우리 아들 고질병 고쳐줬다고 아부하는 거 아닐세. 나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 못했는데 채 선생 덕분에 각성하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세계가 인정하는 침술이네. 이런 인물 잘 안 나오는 법이거든.”
“세계까지는 아니지만 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한의학이 워낙 변방 의술에 대체의학 정도로 평가되는 실정이라...”
“침술을 대폭 강화하는 한의대를 구상 중이시라고?”
“그것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