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65)

“채 선생 행보는 다 주목하고 있지. 어떻게 보면 우리 아들 나이나 다를 거 없는데 정말 대단해. 채 선생 같은 사람은 국가 차원에서 후원해야 하는데...”

“그렇잖아도 대통령님의 지지까지 받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대통령 자문의 위촉만 해도 충분한 지원입니다.”

“아무튼 애로 생기시면 바로 말씀하시게. 우리 장관님도 잔뜩 고무되어 있으시니까.”

“예.”

대화하는 사이에 차가 한의원에 닿았다.

“그럼 또 보세나.”

노 차관은 짧은 인사를 두고 떠났다.

“원장님!”

윤도가 들어서자 세 간호사가 비명 같은 합창을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역시 뭐니뭐니 해도 환자들. 베이징의 쾌거가 방송을 타면서 일반 어린이 환자들이 밀려든 것이다. 간호사들이 예약을 권했지만 다는 먹히지 않았다. 덕분에 접수실은 환자들로 초만원. 그 구세주가 왔으니 어떻게 비명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번째는 당연히 반가움 때문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인술을 펼치는 채윤도. 그녀들은 윤도와 함께 일한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여기 들어온 환자까지만 받고 오신 차례대로 침구실 안내하세요.”

“바로 진료하시게요?”

정나현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아니면요? 아파서 온 애들을 돌려보내요?”

윤도가 웃었다.

“그건 아니지만 원장님도 쉬셔야죠.”

“아픈 애들 쫓아내고 쉬는 게 편할 리 없죠. 침구실, 아셨죠?”

“......”

윤도는 정나현의 팔뚝을 톡 쳐주고는 약제실에 들어섰다.

“실장님, 원장님 오셨어요.”

팔각회향을 정리하던 종일이 소리쳤다. 그러자 팔각회향 더미에 묻힌 진경태가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그냥 일하세요. 제가 괜한 방해가 되는군요?”

“아닙니다. 그래도 원장님 오셨는데...”

일손을 멈춘 진경태가 다가왔다.

“약은요?”

“흐음, 역시 오시자마자 약부터 생기는군요?”

“접수실에도 독감 환자가 초만원이라서요.”

“약재상 조져서 겨우 분량 맞추고 있습니다. 두 군데서 약성이 좋지 않은 게 들어오는 통에 반품을 시켰더니 좀 딸리는군요.”

“죄송합니다. 늘 일만 만들어서...”

“별 말씀을... 이런 일이라면 많이만 만드십시오. 솔직히 약재 들어오는 대로 루틴으로 달여대는 것보다야 백 배 낫죠. 한약사된 보람도 짜릿하게 느끼고요.”

“그런데... 아, 아닙니다.”

운을 떼던 윤도가 손을 저으며 돌아섰다.

“치매 신약 말이죠?”

눈치를 차린 진경태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나섰다.

“죄송해요.”

“걱정마시고 진료하세요. 원장님 성격에 우리가 말린다고 들을 분도 아니고... 치매 신약은 새 오더대로 은 분획과 물질분리, 활성검색까지 마쳐두었습니다. 도쿄와 베이징에 이어 우리 민족의학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데 한약사된 마당에 농땡이나 부리면 안 되죠.”

진경태가 기염을 토했다.

“그거 하시느라고 실장님이 이틀이나 밤을 새우셨어요.”

옆에 있던 종일이 현황을 중계해 주었다.

“야, 넌 그런 거 말하지 말라니까.”

진경태가 핀잔을 주지만 애정이 섞여있다. 약제실의 케미도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

-원장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진경태의 목소리에는 엷은 흥분마저 깃들어 있었다.

막강 케미의 일침 한의원.

인술의 중심에 선 윤도의 베이징 대첩은 어마무시한 ‘따따따블’의 축복이 겹쳐 돌아온다. 따블은 미국발이었고 또 하나의 따블은 베이징 쪽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원-1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원-1

1만여 명 분량의 독감 약침이 나왔다. 윤도와 진경태의 합작품이었다. 최상의 약재와 최상의 성분비, 거기에 독감 혈자리의 포인트까지 맞추었다.

베이징에서 기가 막히게 쓰였다. 그 운용은 왕민얼이 맡았다. 그가 윤도와 함께 시침한 점을 높이 평가 받은 것이다.

젊은 중의사들을 중심으로 한 의료진의 분투 끝에 베이징의 독감은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기승을 부리던 독감이 마침내 소강기에 들어갔습니다. 어제 베이징의 신규환자 발생은 단 여덟 명으로 이는 평상시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베이징의 뉴스는 각국의 외신 시간에 다투어 소개가 되었다. 여전히 독감의 도가니에서 신음하는 미국과 영국, 아프리카 등에 보내는 희망이었다.

“잊지 못할 겁니다.”

왕민얼의 인사 전화가 왔다. 고난을 함께 하면 동지가 된다더니 왕민얼과 격의 없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독감 쪽은 낭보였지만 비보도 날아왔다. 한류에 끼얹은 찬물이었다. 사드 배치문제로 경색된 중국관계. 이제는 시원하게 뚫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난 해 찔끔 수도꼭지를 틀어 목만 축여주더니 다시 옥조이는 중국 당국이었다.

“우리는 한중 문화교류 중단에 대해 당국 차원의 지시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말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다음 달로 예정된 문화, 예술, 가요 공연 등이 줄줄이 된서리를 맞았습니다. 야심차게 한류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던 공연단과 기획사들은 끝내 열리지 않은 중국의 문 앞에서 한숨만 쉴 뿐입니다. 이로 인한 피해액만 수십 억에 달하며...”

기자의 멘트와 함께 자막이 지나갔다. 부용의 SN도 그 피해자의 하나로 나왔다.

“부용 씨.”

위로를 겸한 전화를 걸었다.

“채 선생님.”

“방금 뉴스 봤습니다.”

“그래요.”

“SN 공연도 결국 무산되는 건가요?”

“그럴 거 같네요. 선생님 쾌거도 있고 해서 마지막 반전을 기대했는데...”

“힘이 못 돼서 미안합니다.”

“선생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우리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완전히 끝난 겁니까?”

“티켓 예매와 무대장치, 홍보 등의 시간을 감안하면 한두 주일 내에 특단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죠. 우리야 사세에 비해 견딜만 하지만 여기다 올인한 공연단이 여럿이라 걱정이긴 해요.”

“한국 정부 쪽 지원은요?”

<정부.>

언제 이 국민이 해외에서 일어나는 일에 정부의 역할을 기대했던가? 하나도 기대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대게 되었다.

“이게 양국 정부차원에서 시작된 문제라 정부가 나서면 더 힘들어요. 그래서 문화계가 각개격파로 시도하고 있는데 성 단위 책임자들과 방송국 등은 말이 통하는데 위에서 누르는 거 같아요.”

“......”

“너무 걱정 마세요. 중국 시장이 크긴 하지만 거기가 전부는 아니니까요.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중국 주석 만났을 때 운이라도 떼어볼 걸 그랬습니다.”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선생님 일은 어때요? 한의원이 성황이라 눈코 뜰 새도 없는 거 같던데...”

부용이 말머리를 돌렸다.

“지난 달 정산액은 확인했나요?”

“그럼요. 제가 만 단위까지는 확인하는 사람이거든요.”

부용이 웃었다.

“제가 원외 수입이 대다수라서 부용 씨에게 불리한 계약이던데 내년에는 수정할까요?”

“아뇨. 저는 연예기획이 주소득원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더 많이 버셔서 좋은 꿈 이루는데 쓰세요.”

“고맙습니다. 언제 시간 빼서 밥 사러 갈게요.”

“네. 언제든 연락만 하세요.”

딸깍.

부용과의 통화가 끝났다. 에너지 덩어리 이부용. 중국 공연 준비에 많은 공을 들인 그녀였다. 하지만 결국 열리지 않은 중국의 문. 속이 상할 만도 하건만 흔들림조차 없었다.

속은 윤도가 상했다. 각별한 그녀였기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공연 결정권을 가진 공산당 간부가 앞에 있다면 장침으로 딜이라도 해보려만...’

베이징 시장과 자오우닝 상무위원, 바이징팅 등이 스쳐갔다. 전화를 걸어 사정이라도 해볼까 싶을 때 환자가 들어왔다.

생각이 씨가 된 걸까?

다음 날, 윤도에게 중국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치매 환자를 시침하려던 순간이었다.

“원장님.”

인터폰에서 정나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침 중인데요?”

윤도가 답했다.

“그래도 받으셔야할 거 같아요. 중국 주석궁이라는 데요?”

‘중국 주석궁?’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인가 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이 중국 주석궁까지 팔아먹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긴가민가하며 전화를 받았다.

“웨이?”

“웨이 닌 하오?”

중국어 인사가 오간 끝에 용건이 흘러나왔다.

“여기는 베이징 주석궁 비서실입니다. 채윤도 선생님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주석께서 선생님과의 통화를 원하십니다.”

“......!”

“안녕하시오? 채윤도 선생.”

목소리가 바뀌어 나왔다. 베이징 어린이병원에서 들은 주석의 목소리가 맞았다. 그제야 모골이 송연해졌다. 장난 전화가 아니었다.

“주석님...”

“선생의 장침은 여전하겠지요?”

“예... 환자를 치료 중입니다만...”

“허헛, 그렇다면 용건만 전하고 빨리 끊어야겠군요. 선생은 환자 제일주의 한의시니...”

“무슨 일이신지?”

“어제 베이징 시장의 보고를 받았소. 베이징 일대의 독감은 이제 숨이 죽었다고...”

“다행이군요.”

“그 다행을 가져다준 게 바로 선생 아니시오? 독감의 절정기에 날아와 중증 어린이들을 구하고, 신속하게 지원해준 특효 약침이 병세를 잡으면서 독감의 기세를 잡았다고 들었소.”

“사명감에 불타는 왕민얼과 마롱, 첸슈에센 등의 중의들 분투 덕분입니다.”

“겸손하실 필요 없소. 나도 귀는 열어두고 있으니...”

“......”

“해서 지난번 약속대로 선생을 초대해 노고를 위로할까하는데 잠시 시간을 좀 내시겠소?”

“위로까지는...”

“사양하시면 한국 정부에 부탁을 해서라도 모셔야겠소. 그러니...”

“......”

“채 선생.”

“유행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는 건 의술을 펼치는 자의 사명입니다. 더구나 그날 위기를 넘긴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충분한 인사를 받았으니 따로 공을 챙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자국민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의 공을 챙기는 것 또한 국가 지도자의 사명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

주석의 반론에 윤도 말문이 막혔다. 하루면 된다하니 수락을 하고 말았다. 머리 속에 한류 공연 무산의 안개가 다 가시지 않은 탓도 있었다.

“중국 주석의 초대예요?”

옆에 서있던 정나현이 비명을 질렀다.

“쉬잇, 기자들 몰려오면 치료에 지장 있어요.”

“그래도 그렇죠. 저는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심장이 벌떡거렸다고요.”

“벌떡거릴만 하네요. 우리 원장님 모셔가는 보이스피싱이니...”

약침을 들고 온 진경태가 합세를 했다.

“그 일 때문이죠? 베이징 독감?”

“그렇다네요.”

“이야, 그래도 중국이 그런 매너는 갖추네요?”

“그만 흥분하시고 일 보세요. 환자들 아직 몇 명 남았잖아요?”

윤도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정나현은 진경태와 함께 나란히 침구실을 나갔다. 그 어깨가 나란한 게 좋아보였다.

‘주석의 초대라...’

장침을 뽑으며 베이징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독감의 전장을 함께 누볐던 리빙빙과 왕민얼. 그리고 그림을 그려준 양이닝...

환자의 중완혈에 장침을 넣었다. 74세의 환자는 치매로 온 예약환자였다. 헛소리가 심했다. 신음도 종종했다.

하지만 치매가 아니었다.

“치매가 아니라고요?”

보호자로 따라온 40대 후반의 아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막노동을 하는 소위 ‘노가다’ 인생이다. 어릴 때 다리를 다쳐 한 쪽 다리를 절었다. 중국동포 여자와 국제결혼을 했지만 반 년만에 여자가 도망을 쳤다. 상심하여 술로 인생을 달래느라 노모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 노모의 헛소리가 심해졌다. 그가 보기엔 딱 치매였다. 치매판정을 받으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공짜가 아니었다. 날품이나 파는 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방치했다.

그러던 차에 이웃에서 신고가 들어갔다. 아들이 지구대로 불려갔다. 경찰이 보니 아들의 사정도 딱했다. 그 지구대장이 윤도를 기억하고 대신 한의원 예약을 해주었다, 그렇게 윤도를 만나게 된 노모와 아들이었다.

“위장에 열이 심해서 생긴 병입니다. 침 몇 대 맞으면 괜찮을 겁니다.”

“동네 사람들은 다들 치매라고 하던데...”

“헛소리가 심하니까 그랬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윤도가 보호자에게 전한 말이었다.

사삿!

장침은 중완혈에 제대로 들어갔다. 침을 감았다 풀어 사기를 빼주었다.

“으음...”

노모 입에서 짧은 신음이 나왔다. 환자의 기혈수준에 맞춰 남은 사기를 몰아냈다. 구석에 몰린 사기가 들어온 혈문으로 쫓겨나가는 순간, 노모 입에서 긴 숨이 나왔다.

“아휴!”

“어떠세요?”

“맥이 탁 풀려.”

노모가 답했다. 헛소리가 섞이지 않은 대답이었다.

“보호자 모시고 와요.”

윤도가 승주에게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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