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 선생님 알아요.”
여학생이 인사를 해왔다.
“실은 선생님께 전화를 해보면 어떻냐고 의견을 낸 것도 이 학생이었어요. 할머니하고 정이 들었나봐요.”
“할머니, 잘 부탁합니다. 선생님!”
여학생이 고개를 숙여왔다.
“혹시...”
병실로 가던 윤도가 학생을 돌아보았다.
“학생이 실모자와 목도리를?”
“모자는 아니고 목도리는 제가 엄마랑 같이 떴어요.”
“......”
윤도의 시선이 여학생의 얼굴에서 멈췄다. 소녀상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소녀상에 둘러지는 따뜻한 마음을 담은 목도리. 보기에는 쉽지만 직접 하기는 어려운 일을 어린 여학생이 하다니...
“할머니가 쟤를 참 좋아해요. 오기만 하면 손을 잡고 잘 놓지 않거든요.”
“......”
여직원의 말을 들으며 병실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할머니. 침 뽑을 게요.”
윤도가 그 귓전에 속삭였다. 할머니가 가만히 눈을 떴다. 숨을 돌리는 동안에 거울을 가까이 보여주었다. 거울 안에 정수리가 들어왔다.
“세상에!”
할머니의 건조한 입이 활짝 벌어졌다. 정수리... 거울처럼 반들거리던 곳에 까뭇한 솜털이 돋고 있었다.
“고마워.”
할머니가 윤도 손을 잡고 웃었다. 새로 돋아난 솜털에 인생의 무게를 다 내려놓은 할머니.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기분 좋으세요?”
윤도가 물었다.
“그럼. 최고야. 우리나라 해방되던 때만큼 기뻐.”
“할아버지하고 결혼식 때가 아니고요?”
“해방이 없었으면 결혼도 없지. 안 그래?”
“......”
“한의사 선생.”
“네?”
“치료비 받아야지?”
“아닙니다. 치료비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안 돼. 가는 마당에 빚 지고 가면 좋은 데 못 가. 더구나 소원을 이루어준 양반인데...”
“할머니...”
“내 베개 꺼내봐. 거기 손 넣으면 봉투가 하나 있을 거야.”
“정말 괜찮다니까요.”
“내가 안 괜찮아.”“.....”
“어서...”
할머니가 재촉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베개를 꺼냈다. 안에는 봉투가 들어있었다. 빳빳한 5만원 신권 열 장이었다.
“나 찾아오는 애기가 하나 있어. 이름이 이연아라고 아직 여고생이지? 내가 왜정 때 잡혀갈 때가 딱 그 나이였어.”
여고생...
아까 본 그 여학생이다.
“내 재산 다 기부하고 딱 그만큼만 남겼어.”
“할머니...”
“그 아이 연아를 시켜 찾아오게 했는데 나보고 묻잖아? 이 돈 뭐하려고 그러냐고?”
“......”
“내가 말했지. 혹시나 마지막 소원이 생기면 그 때 써야할지 몰라서 그런다고. 그랬더니 연아가 그러네. 이 돈에 담긴 할머니의 소원은 무조건 이루어질 거라고.”
“......”
“신통방통하게 그 말이 맞잖아? 이렇게 머리카락이 나다니... 세상에...”
“할머니...”
“그 돈은 한의사 선생이 받아. 한의사 선생이 임자야.”
“......”
“내 마음으로 알고.”
할머니가 자애로운 눈짓을 보내왔다. 애잔함과 진실함이 함께 담긴 눈빛. 그렇기에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윤도였다.
“그럼 제가 잘 쓰겠습니다.”
윤도가 인사를 했다.
“고마워. 이제 커튼 벗겨도 되겠어. 우리 영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삐쳐서 그냥 갈 지도 몰라.”
할머니의 시선이 창으로 향했다. 창을 바라보는 볼에 아련한 홍조가 엿보였다. 할머니 눈에는 정말 죽은 할아버지가 보이는 걸까?
자박!
복도로 나오자 여학생이 있었다. 봉투는 여학생 손에 넘겨주었다.
“할머니가 네게 주는 장학금이야. 네 안에 있는 소원을 이루라시며...”
“할머니!”
여학생의 눈에서 눈물보가 터졌다.
더 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향해 다가설 때 할머니 방 커튼이 열리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
정말 저 어둠을 날아오고 있는 걸까?
할머니...
정말 할아버지를 볼 수 있는 걸까?
‘다음 생에서는 고난없이 행복하시기를...’
기도를 남기고 시동을 걸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원을 이루어준 윤도 손 끝에 모터의 힘찬 반응이 실려 왔다.
부릉!
중국 주석과의 독대-1
빠라빠라빵.
류수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채 선생님.”
그의 목소리는 잔뜩 고양되어 있었다. 치매신약 건이었다. 신약은 지금 FDA에 들어가 있다. 윤도의 논문도 미국 매사추세츠의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에 제출되었다. 그런 면에서는 윤도도 가슴 졸이는 나날이지만 매번 잊고 살았다. 날마다 몰려드는 환자들에게 집중하는 덕분이었다. 시침할 때 윤도는 매번 무아지경이었다.
“기가 막힙니다.”
류수완이 실험쥐와 임상실험 사례 데이터를 내밀었다. 두 실험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혈자리 자극방식의 신약 기법은 꿈이 아니었다.
본래, 약은 작용 기전이 정해져 있었다. 약을 복용하면 위와 장으로 들어가 흡수된 후에 나머지가 일단 간으로 직행한다. 간에서 일부 분해가 된 약은 심장으로 넘어가 온몸에 퍼진다. 각 약은 병소 부위의 세포 표면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하면서 약효를 작렬시킨다. 나머지 혈액 안에 흐르던 약은 다시 간으로 돌아와 오줌으로 배출된다. 약의 용량용법 책정은 위와 장, 간에서 흡수되는 정도와 어느 부위에서 작용하는 지를 빈틈없이 계산해서 정한다.
윤도의 신약은 병소 결합부위를 관련 혈자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치매치료 효과가 있는 경혈 수용체와 특이 결합을 유도해 침을 맞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거기에 치매에 좋은 약재를 더함으로써 일거양득의 약효를 노렸고 그 시도는 제대로 먹히고 있었다.
고무적인 건 부작용이었다. 이번 약도 부작용 측면에서 탁월하게 안정되었다. 깨알 같은 글자로 끝도 없이 적어넣는 부작용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굉장한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FDA의 승인만 떨어지면 세계 치매약 시장에 센세이션을 불러올 일이었다.
“잘 될 겁니다. 좋은 꿈꾸고 계세요.”
류수완의 목소리는 전화를 끓을 때까지도 상기되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스포츠카에 올랐다. 부용과의 선약이 있었다. 만난 지도 좀 되었고 야심차게 추진하던 중국 공연기획이 불발탄이 될 지경이라 위로해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SN 정문 앞에 있었다. 윤도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중국 주석의 정식 초대를 받았다고요?”
파스타 전문점에 앉은 부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하의 그녀도 중국 주석이라는 타이틀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사흘 후에 가게 될 겁니다만...”“세상에...”
“저번 베이징 진료 건으로 밥 한 끼 내실 모양입니다.”
“굉장해요.”
“그래서 말인데... 그 자리에서 부용 씨 공연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보면 어떨까요?”
윤도가 슬쩍 의사 타진을 했다.
“그건 좋지 않은 거 같은 데요?”
부용이 고개를 저었다.
“왜요? 중국 당국의 성격상 주석이 지시하면 먹히는 거 아닌가요?”“그렇기도 하지만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요. 한류 문화라는 게 그냥 공연 한 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거든요. 어쩌면 중국 당국은 사드 사태를 내세워 자국 문화 장벽을 지키려는 수단으로 삼고 있을 수도 있어요.”
“원래부터 제지를 하려던 차였는데 사드를 이유로 내세웠을 뿐이다?”
“그렇죠. 중국 젊은이들이 한류에 몰입되면 중국 굴기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는 중국 정치가들이 있거든요.”
“아...”
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부용의 안목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한류 제동. 단순한 길들이기 차원이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정책과 맞물린 거라는 게 부용의 견해였다.
“이렇게 한풀 꺾어두고 자국 문화양생을 도모하면 간극이 굉장히 줄어들잖아요. 우리도 왜 이제는 선진국 문화라고 해도 하나의 호기심에 불과하지 열광까지는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그러니 선생님은 당당하게 만찬만 즐기고 오세요. 이 일은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요.”
부용이 웃었다. 그녀의 식견과 함께 윤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번 사태에 얽힌 한국 공연이 얼마나 되나요?”
“굉장히 많아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도 상하이 공연을 준비 중이었고 뮤지컬 팀에 더해 우리 같은 한류 선봉의 K-팝팀... 적어도 20여 개 기획사가 단독, 혹은 중국 현지 법인과 손을 잡고 공연준비를 한 걸로 알고 있어요.”
‘20여 개...’
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용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편에 칼날 오기가 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명침과 한류 사이의 모순 때문에도 그랬다. 윤도의 명침은 ‘수입허가’가 났다. 자긍심 덩어리인 중의들이 못 하는 독감을 잡아준 것이다.
팩트!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였다.
그로 인해 천년 중의학의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을 건 명백한 일이었다.
한류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수한 문화가 유입되는 건 막을 수 없다. 스마트폰 때문에도 더욱 그랬다. 이건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부용의 달콤한 키스를 받으며 오기를 키웠다. 장침이 된다면 한류도 되어야했다. 윤도의 입장은 무조건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중국 주석의 모순이 될 판이었다.
‘주석도 인간이니까.’
윤도의 오기는 조금씩 크기가 커져갔다.
수요일 아침, 세 환자를 보았다. 그 중 하나가 경련 환자였다. 느닷없는 근육 경련이 벌써 5년 째. 양방이며 한방이며, 심지어는 민간요법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진맥으로 혈자리를 찾았다. 거궐혈과 양릉천혈 부근이었다. 경련성 질환은 대개 거궐혈에서 승부를 본다. 양릉천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환자의 혈자리는 다소 변칙이었다. 그렇기에 정확하게 거궐혈을 짚어 침을 넣으면 효과가 날리 없었다.
“거궐혈에 놓으시게요?”
윤도가 혈자리를 잡으려 하자 미리 알고 물어왔다. 많은 의료기관을 찾아다니다보니 선수가 다 된 환자였다.
“거궐혈은 거궐혈인데 조금 밀렸네요.”
윤도가 답했다.
“거기는 맞아도 효과가 없던데...”
“한 번 믿어보세요.”
말하는 순간 윤도의 장침이 들어갔다.
“......!”
환자의 말문이 닫혔다. 지긋지긋하게 경련하던 팔이 동작을 멈춘 것이다.
“이야, 이햐...”
환자는 넋을 놓은 채 감탄만 거듭했다.
환자를 보내고 가운을 벗었다. 이제 중국 주석 왕마오핑의 초대에 응할 시간이었다. 비행기표는 이미 이메일로 도착한 후였다. 몸만 가도 되겠지만 습관처럼 장침을 챙겼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늘은 일찍들 퇴근하세요.”
접수실로 나오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원장님, 이거요.”
승주가 작은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윤도가 요청한 것들이었다.
“다 구했어?”
“당연하죠. 누구 명령인데요?”
“땡큐!”
“맛 있는 거 나오면 배 터지게 먹고 오세요. 말로만 듣던 곰발바닥이니 제비집이니 하는 요리가 나올 지도 모르잖아요?”
“어머, 그러다 그거까지 나오면 어떡해?”
옆에 있던 연재가 몸서리를 쳤다.
“뭐?”
“원숭이 골 요리...”
“언니!”
승주가 빼액 소리쳤다. 윤도를 배웅하려던 직원들이 일동 허리를 잡고 웃었다.
비행기는 중국 최대 국영항공사 남방항공 편이었다. 1등석을 받은 윤도에게 승무원들은 극진했다. 이미 중국 당국의 지시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륙 후에 승주가 준비한 선물꾸러미를 열었다. 보기에는 영락없는 선물. 하지만 오늘의 윤도에게는 이 선물이 장침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 비행기는 오래지 않아 베이징에 닿았다.
주석궁까지 논스톱으로 달렸다. 비행기가 서자 윤도만 따로 내렸다. 주석이 보낸 리무진을 타고 주석궁으로 향했다. 마치 국가원수의 대접을 받는 윤도였다.
“채 선생님!”
주석궁에 도착하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어린이병원 첫 번째 환자였던 양이닝이었다. 그 옆에는 간호사 리빙빙이 보였다. 그들 역시 주석의 초대를 받은 모양이었다.
“몸은 어때?”
양이닝 등을 토닥이며 윤도가 물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에취!”
“......?”
“에헷, 이건 그냥 재채기라고요. 에취...?”
“......?”
“어, 아까는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에취.”
“어디 보자...”
윤도가 양이닝의 목뼈를 잡고 살며시 자극을 해주었다. 재채기의 명혈 폐수혈이었다.
“헤에, 이제 괜찮아요?”
“다행이네.”
“채윤도 선생님 손은 마법사 손.”
양이닝이 엄지를 세워주었다.
“리빙빙은 어때요? 그때 몸살 안 났어요?”
윤도의 시선이 간호사 리빙빙에게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