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났어요. 한 나흘 동안 앓아 누웠는 걸요. 선생님이 계셨으면 장침 한 방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였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리빙빙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곧 이어 단정한 여자 비서관이 들어섰다.
“주석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다른 나라의 정상께서 와 계신 통에 방담 시간이 조금 길어지고 있습니다.”
“네...”
“소지품은 따로 맡겨주시겠어요?”
비서관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이건 제 수족 같은 침이고 이건 주석께 드릴 선물입니다만.”
윤도가 소지품을 들어보였다. 안으로 들어올 때 이미 검색을 받은 바였다.
“선물은 그렇고... 침은 제가 맡아두겠습니다.”
비서관의 미소에는 완곡함이 가득했다. 주석을 치료할 것도 아니기에 침통을 넘겨주었다.
“그럼 가실까요?”
비서관이 복도를 가리켰다.
“와아, 주석님을 만나는 거예요?”
양이닝이 리빙빙에게 물었다.
“그런가 본데?”
“막 떨려요.”
“나도 그래.”
“채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명침 의사니까 안 떨리죠?”
양이닝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흐음, 나도 굉장히 떨리는 걸?”
윤도는 가벼운 몸서리로 양이닝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채윤도 선생.”
주석이 환하게 다가왔다. 풍후한 몸체에 어울리는 밝은 미소였다.
“건강하셨습니까?”
윤도가 인사를 했다.
“오는 길이 고단하지는 않았소?”
“아닙니다. 두루 배려해주신 덕분에...”
“아무튼 반갑소. 내가 채 선생 보려는 마음이 큰 걸 알았는지 오늘 스케줄들이 다 길어졌다오. 세상살이라는 게 꼭 이렇단 말이지.”
“별 말씀을...”
“우리 양이닝과 리 선생은 왜 그리 긴장하고 계시나? 여기 분위기가 너무 딱딱한가?”
“아닙니다.”
양이닝과 리빙빙이 동시에 답했다.
시작은 전격 훈장수여식이었다.
‘훈장...’
혹시 하고 상상은 했지만 실제로 수여될 줄은 몰랐던 훈장. 중국의 훈장은 청와대에서 받는 것과 기분이 또 달랐다.
주석궁의 많은 직원들이 도열한 가운데 윤도와 리빙빙에게 훈장이 주어졌다. 윤도의 격이 더 높았다.
짝짝!
주석으로부터 시작된 박수가 따뜻하게 이어졌다. 윤도에게는 베이징 명예시민증도 주어졌다. 리빙빙은 특진도 약속되었다고 한다. 윤도를 도와 독감 사태를 수습한 공로였다.
“자, 앉으세요들. 이 사람이 세 분을 축하하고 위로하기 위해 중국 최고의 연주가 한 분을 모셨습니다.”
정원으로 나온 주석이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윤도네가 착석하자 우아한 여자가 다가왔다. 가볍게 인사를 한 그녀가 연주를 위해 악기 음을 고르기 시작했다. 윤도로서는 처음 보는 악기였다.
“우리 중국의 전통 현악기 ‘구친’입니다. 우리끼리 말하기로 저 연주를 마음의 바이러스 백신이라고 하지요. 지치고 피곤한 마음에 위로를 주는 귀한 악기입니다.”
주석의 말과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연주는 가야금소리를 닮았다. 하지만 음색이 다양하면서도 고요했다. 마치 명상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느낌. 음색 하나하나가 긴장을 어루만지고 스트레스를 녹여주었다.
다다당!
우아하고 단아한 연주가 끝났다. 윤도와 리빙빙, 양이닝이 박수로 답했다.
“어떻습니까?”
주석이 윤도에게 물었다.
“굉장하네요. 영혼을 씻어주는 것 같습니다.”
“겉보기는 단순하지만 우주가 녹아있는 악기이자 음색이지요. 공자께서 좋아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한의학하고도 통하는 연주라 내가 초청을 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이기도 해서...”
“한의학이라면?”
“악기의 줄이 일곱 개지만 처음에는 오행을 의미하는 다섯 줄이었어요. 이 주법에는 천지인을 상징하는 주법이 쓰이지요. 게다가 리듬이 전하지 않고 오직 스승에서 제자에게 전하는 연주입니다. 침술도 음양오행을 기반으로 하니 어쩌면 서로 닮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윤도가 공감했다. 오행이라면 오장육부의 진단과 상호연관에 많이 쓰인다. 침술 역시 마음으로 체득하고 손이 응하는 것이니 주석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왕마오핑 주석...
이제 보니 침술공부까지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주석과 윤도의 독대가 이루어졌다.
“채 선생.”
소담한 연못 앞에서 주석이 걸음을 멈췄다.
“네.”
“엊그제 자오우닝 상무위원을 만났어요. 놀라운 말을 하더군요.”
“이빨 말씀이군요?”
“그래요. 내가 아는 상식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실제로 이빨이 났더군요. 그것도 가지런하게... 하도 신기해서 손가락으로 만져보았을 정도입니다.”
“환자를 위해 정성을 다했을 뿐이고, 환자와 제가 잘 맞았을 뿐입니다.”
“채 선생.”
“예?”
“선생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궁금해지는군요.”
주석의 시선이 윤도 눈에 꽂혀왔다. 진솔하면서도 힘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스승...
한류에 대해 의견을 전달하고 싶던 윤도. 스승이라는 단어를 출발선으로 삼았다.
중국 주석과의 독대-2
“아까 구친의 리듬을 말씀하셨는데 오직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전해진다고요?”
“예.”
“그렇다면 제자는 한 스승의 솜씨만을 이어받는다는 건데 저는 좀 다르게 배웠습니다.”
“다르다?”
“스승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제 스승 중에는 중의 왕챠오원 선생님과 장지에용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오?”
윤도 설명에 주석의 눈빛이 출렁거렸다.
“예.”
“허어, 왕챠오원 선생은 한 때 내 주치의이기도 했다오.”
“비록 잠시지만 그분들에게도 침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스승이시지요.”
왕챠오원과 장지에용.
두 사람을 만난 건 명의순례 때였다. 순례 프로그램에 포함된 침술시범이었다. 그때 윤도의 넋을 놓게 했던 두 사람의 유려한 침술. 그러니 배운 건 배운 거였다.
“그럼 채 선생 침술의 근본이 우리 중국이었단 말이오?”
주석의 목소리에서 중화(中華)의 뿌듯함이 배어나왔다. 윤도의 신통방통한 침술. 그 기원이 중국이라면 부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제 침술은 특정한 나라나 스승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것입니다.”
윤도가 슬쩍 선을 그었다.
“하늘?”
“한의들에게 배우고, 중의들에게 익히고, 나아가 고금의 명의들 의서를 뒤적여 한 올 한 올 제 것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제가 오직 한국의 침술만을 고집하여 거기에 몰두했다면 그저 평범한 한의사로 침을 놓고 있을 겁니다.”
“오라,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의술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재창조를 했다 이거로군요?”
“그렇습니다. 구친이 아름다운 전통 악기지만 침술과 다른 이유가 되겠습니다.”
“대단하오. 본시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거늘.”
“과찬이십니다.”
“그럼 우리 중의학에 대한 견해는 어떻소? 이번 베이징 독감 때 직접 현장을 보셨을 테니...”
“그렇다고 해야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얼핏’ 본 것을 가지고 다 아는 듯 말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윤도는 ‘얼핏’을 강조하며 주석의 반응을 주목했다. 다행히 주석이 그 단어를 물고 들어왔다.
“얼핏이라고 해도 내놓으라하는 중의들이 여럿 있었소. 고견을 말해 주면 중의학 중흥정책에 반영할 생각이라오.”
“주석님께서 보기에 중의의 헐거운 점이 무엇이라고 보시는 지요?”
윤도가 되물었다. 윤도가 의도하던 질문이었다.
“그야 물론 외과술 아니겠소?”
외과술.
주석의 반응이 나오자 윤도 입가에 미소가 스쳐갔다. 윤도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맞습니다. 한의학과 중의학은 양자 공히 외과술이 약하지요. 하지만 먼 과거에 이미 외과의 전성을 이루었던 중의학입니다.”
“외과의 전성?”
“예...”
“그때가 언제란 말이오?”
“사기에 나오는 명의 ‘유부’가 기원입니다.”
“오, 유부...”
“그분이야 말로 외과학의 기원이자 선구자였지요. 탕약 같은 것보다 환부를 직접 열고 닫고 만지며 질환을 잡았으니까요. 끊어진 힘줄은 당겨서 이어주고 장과 위가 병들면 깨끗이 씻어 정기를 바르게 해주었습니다. 일침이구삼약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환부를 열어 간이면 간, 신이면 신, 심지어는 뇌까지 씻거나 환부, 병소를 잘라내고 제 자리에 봉합했으니까요. 현대의학이 암이나 악성 종양부위를 열어 잘라내고 회복시키는 수술. 이미 고대에 이룬 유부였습니다.”
“오...”
“하지만 전수되지 못했지요. 아시겠지만 편작 때문입니다.”
“편작?”
“편작과 그 계통의 중의들이 펼친 의술과 질병에 대한 이론을 망라한 ‘황제내경’ 말입니다. 이 책은 오늘 날까지 면면히 전하며 유부의 외과학을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황제내경에 <편작편>, <유부편>이 있었다면 서양의학은 따로 동양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편작의 훌륭함이 강조되면서 유부의 훌륭함을 잃어버린...”
“그저 제 생각입니다.”
“훌륭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것들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는 뜻이군요. 그런 의미에서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타산지석(他山之石).
이 또한 윤도가 원하는 단어였다.
한류와 K-팝.
당연히 타산지석에 비교될 말은 아니었다. 한국이 자랑하는 문화의 하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상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 주석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겸양을 담은 단어가 오히려 적합했다.
“타산지석이라 하셨으니 외람된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해보세요. 무엇이든...”
“주석님께서 구친을 가장 좋아하신다니 송구합니다만 제가 K-팝 쪽에 지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K-팝?”
“주석님께서는 한류공연이나 K-팝 노래를 들은 적이 있으신지요?”
“당연히 들었지요.”
“지인의 말이 중국 각지에서 한류공연과 K-팝 공연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잘 진행되던 공연허가가 이제 와서 모두 취소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
“제 외람된 질문이 그것입니다. 저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황제내경으로 설명하자면 편작에 올인하면서 유부를 잃어버리는 과실을 범했습니다. 이번 베이징 독감 건에서도 사실 어린이병원의 의료진들은 저를 마땅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린이병원에서 작으나마 타산지석이 되었지요.”
“......?”
“물론 세상에는 주석님이 아끼는 악기 구친처럼 한 가지 길을 가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침을 빌어 설명하자면 혈자리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한 가지 침법만으로는 만병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래의 침법과 현대의 침법을 함께 공부해야만 더 나은 의술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
“음악도 그렇지 않을까요? 한류 공연은 중국 젊은이나 지식인들에게 제 장침처럼 문화공부가 될 지도 모릅니다. 이미 많은 나라들,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브라질, 태국, 러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도 창의성이나 문화충격으로 받아들여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들 나라에서 문제가 되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채 선생...”
“무슨 사연으로 공연허가가 안 나는지 모르지만 중국의 국격에 미루어보면 너무 아쉽습니다.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는 중국이라면 당연히 세계 각국의 우수한 문화도 포용할 거라는 게 개인적인 기대감이었습니다만...”
“으음...”
“이거...”
윤도가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뭐요?”
“주석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중국 공연을 꿈꾸던 K-팝 가수와 연주가들의 음반이지요. 혹시나 주석님께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걸까 싶은 마음에 몇 장 준비해 왔습니다. 시간이 나시거든 이 공연과 노래가 과연 중국인들에게 해가 되는 것인지 판단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전합니다.”
“......”
“대신 저는 가는 길에 구친 음반을 찾아 사갈 생각입니다. 중국 공연을 꿈꾸는 지인에게 선물하려고요. 다른 나라에 와서 문화전도사가 되려면 그 나라 문화를 알아야할 테니까요.”
윤도의 시선이 주석의 눈에서 멈췄다. 주석 역시 윤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주석의 손은 한참 후에야 선물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먹혔다.’
그 순간, 윤도는 확신했다. 주석의 눈 속에 출렁이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것은 불쾌감이 아니었다. 아까 편작과 유부를 동시에 추구했다면 한의학이 더욱 빛났을 거라던 설명. 그때 보이던 눈빛과 같은 주석이었다.
‘진인사대천명.’
윤도가 속으로 읊조렸다. 한국정부가 나설 수 없는 일. 그렇다고 부용과 기획사 대표들이 주석궁을 항의 방문할 수도 없는 일. 그렇기에 윤도가 총대를 맸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 지는 모르지만 단순히 밥 한 끼 먹고 가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고 판단했다.
독대 후에 비서관의 안내로 주석궁을 관람했다. 양이닝, 리빙빙과 함께였다.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관람이 끝나자 비서관이 말했다. 윤도네는 만찬장으로 향했다.
“......!”
주석궁에서 만찬을 하던 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중에 나오는 노래 때문이었다. 중국 전통음악 뒤에 나오는 음악. 부용의 걸그룹 해피 프레지던트의 신곡과 빙빙빙의 대표곡이었다. 윤도가 고개를 들자 주석이 가만히 웃었다. 긍정적인 결과를 주려는 걸까? 괜한 설렘에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
식사 후에 윤도는 또 한 번 뒤집어졌다. 이번에는 주석의 선물 때문이었다. 주석이 내준 건 그가 소장하던 구친이었다.
“구친 음반도 몇 개 넣었습니다.”
주석이 직접 선물을 내밀었다.
“주석님...”
“아까 내게 준 음반들... 좋더군요. 구친의 전통음악도 좋지만 아무래도 우리 중국이 제대로 세계화가 되려면 <편작>과 <유부>의 전철을 다시 밟는 건 좋지 않겠죠?”
“......”
“이제 가실 시간인데 한의로서의 선물은 없습니까? 이 사람이 진찰을 좀 받아보고 싶어도 위급상황이거나 주치의가 아니면 함부로 몸을 맡길 수도 없으니...”
“한국의 의서에 나오는 비결 한 가지를 알려드리죠.”
“오, 그런 게 있습니까?”
“동의보감에 나오는 연진법이라는 건데 침을 분비하는 겁니다. 혀끝을 위쪽 잇몸에 대고 잇몸을 고루 마사지 하시면 됩니다. 침 분비가 활발해지면서 피로를 풀어주고 소화를 돕습니다. 그렇게 하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120세까지 장수하실 수 있습니다.”
“호오, 아주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이군요. 역시...”
“선물 고맙습니다.”
윤도가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