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95/265)

“그래서 제 부탁을 들어줬나보군요? 훈장 받은 사람의 훈격 체면을 고려해서...”

“아뇨.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일 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윤도가 뒤를 돌아보았다. 주석에게 받은 선물꾸러미 때문이었다.

“뭐 찾으세요?”

“아까 제가 가지고 내린...”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부용이 선물꾸러미를 들고 왔다. 작은 포장을 열자 구친이 드러났다.

“어머, 악기네요?”

“이게 중국 전통악기의 하나인 구친이랍니다.”

“구친...”

“제 생각인데 이번 공연에 이걸 응용했으면 합니다.”

“구친을요?”

“공연 멤버 중의 한 친구가 이걸 간주 시간에 연주한다든가 하면...”

“이유가 있군요?”

“지난번에 부용 씨가 말한 맥락과 같아요. 중국에서 하는 공연이니 저들의 전통문화와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저들의 긍지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주석께서 애호하는 악기니 공연 수락에 대한 보답의 신호일 수도 있고요.”

“굳 아이디어네요. 해외 공연 때는 그런 전략을 쓰고 있어요. 이번 중국 공연도 당연히 그 지방의 특색이나 문화 같은 걸 고려하고요. 하지만 구친은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반영할 게요.”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고마워요.”

부용의 입술이 다가왔다. 샴페인을 마신 입술이라 달착지근했다. 그녀를 당겨 한 번 더 키스를 했다. 술이 슬쩍 올라왔다.

“미국에 보낸 논문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부용이 숨을 돌리며 물었다.

“아직 연락은 없는데 별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어머, 왜요?”

“처음이잖아요? 게다가 한의학 논문이라 의학전문지에서 어필할 수 있는 지는 미지수입니다.”

“제가 학술지 편집장이라면 그 반대로 하겠어요.”

“반대요?”

“희소성이 있잖아요? 그런 게 더 가치 있는 탐구가 아닌가요?”

“말만 들어도 괜히 자신감이 생기는데요?”

“그럼 우리 2차 가요. 괜찮죠?”

“지금 살짝 취기가 오르는데...”

“지금, 제 앞에서 약한 모습?”

“아닙니다. 까짓 거 가죠 뭐.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어요?”

윤도가 일어섰다.

2차.

그 2차는 부용의 집무실로 쓰이는 원룸 아파트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단아하게 준비된 미니 바가 보였다.

“대충 준비는 했는데... 이보다는 저도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뭐 원하는 거 없으세요.”

부용이 물었다.

“이렇게 환영해주는 것으로 충분해요.”

윤도가 부용을 당겼다. 부용과 단 둘이 있는 시간. 스페셜 기프트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일이었다.

“술은 안 마시고요?”

“천천히 마시면 되죠 뭐.”

윤도의 입술이 부용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안겨왔다. 뒤로 안은 팔에 힘을 주자 부용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주석궁 만찬이 굉장히 좋았나 봐요.”

부용이 코앞에서 물었다.

“음식보다는 분위기가 좋았죠.”

“전 또 해구신이라도 먹은 줄 알았어요. 팔에 힘이 탄탄하게 들어가서...”

“하나 달라고 할 걸 그랬군요. 뭐든 차려줄 분위기였는데...”

윤도가 조크로 응수했다.

“선생님...”

부용이 윤도 품을 파고들었다. 그 얼굴을 거칠게 세워 딮 키스를 퍼붓는 윤도였다. 긴장도 풀리고 마음도 풀렸다. 그렇기에 내숭을 떨 생각도 없었다.

2차...

어쩌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윤도는 윤도 입 안의 알코올 기운을 부용에게 밀어넣었고 부용은 그녀의 그것을 윤도에게 밀어넣었다. 새로 추가되는 알코올이 없음에도 술이 확 올라왔다. 급기야 윤도의 다른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부용을 벽으로 밀었다. 거칠게 옷을 벗겨 내렸다. 마지막 속옷을 내리자 부용의 나신이 연꽃처럼 드러났다. 하필이면 창을 넘어온 달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었다. 여신강림이다. 적어도 이 순간의 느낌은 그랬다. 윤도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부용의 샘물을 더듬었다.

“아...”

부용의 입에서 가녀린 탄식이 나왔다. 그게 윤도를 당기는 신호였을까? 불끈한 윤도의 남자가 혈자리를 찾아들어가듯 부용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샘물의 문은 저절로 열렸다. 장침을 맞이하는 혈자리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합궁이었다.

“아아아아.”

부용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럴수록 윤도는 더 깊은 곳까지 밀어붙였다. 이 혈자리는 끝이 없었다. 끝인가 싶으면 아직 아니었고 그만이다 싶으면 또 깊어졌다.

그 열락의 끝에 닿았다고 느낄 때, 윤도의 화산이 폭발했다.

화아악!

폭발의 섬광은 카타르시스가 되어 머리를 휘돌았다.

다라라랑.

그 머리에서 구친의 연주음이 들렸다. 지상의 모든 안락과 화평의 소리 같은 연주음이었다. 윤도는 부용에게 키스한 후에 가만히 늘어졌다.

“선생님.”

부용의 맨살이 윤도 몸에 닿았다.

“네?”

“처음에는 신선 같았는데 이제는 진격의 거인 같아요. 장침 하나 들고 거침없이 날아가는...”

“그 추진력은 부용 씨가 마련해준 겁니다.”

“사실은 입도선매였어요. 사업가의 투자 필이 적중한 거죠.”

“필?”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았잖아요? 그래서 신기(神氣)가 쌓여있었나 봐요.”

“저한테 투자한 투자자로서의 소감은 어때요?”

“기가 막힌 투자였죠. 제 인생 최고의 투자예요.”

“하핫, 최고까지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더 고마워요. 발전할 수 있잖아요. 선생님은 이 정도에서 안주하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어디까지 날아야하는 거죠?”

“한의학... 적어도 서양의학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맞추셔야죠. 선생님 한 사람으로는 이미 그걸 넘었지만 전체로는 아직 멀었어요.”

“부용 씨를 만나면 늘 숙제가 생기네요.”

“해낼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요.”

부용이 더 밀착되어왔다. 풀 죽었던 윤도의 중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걸친 옷이 없기에 감출 수도 없는 상황. 한 번 더 예열이 시작되었다.

“이것 봐. 틀림없이 특별한 걸 먹었다니까요.”

부용이 배시시 웃었다.

특별한 것.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중국 훈장도 먹었고, 주석의 신임도 먹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위해 멋지게 한 건 올린 날. 이런 날 좀 거하게 누리면 어떨 것인가? 윤도는 다시 기관차의 폭주를 시작했다.

칙칙폭폭...

첫판보다 길고 화끈하게 달렸다.

기프트(Gift).

이 단어에는 배우자의 난관 내 이식이라는 뜻도 있다. 윤도는 이제 그녀의 난관에 장침을 이식 중이었다.

파죽지세의 쾌거-1

파죽지세의 쾌거-1

꽃...

수없이 만발한 초원이었다. 너무나 싱그러워 향에 물들 것 같았다. 어쩌면 천상의 향이 고스란히 내려온 것 같은 파라다이스. 윤도는 그 중심에 있었다. 아름다운 산호초로 뒤덮인 남태평양의 작은 섬을 하늘에서 내려본 것만큼 청명한 초원이었다.

사방을 음미하는 순간 꽃들이 오각 빙창을 이루며 튀어 올랐다. 하늘 높이 치솟은 빙창들은 하얀 악몽이 되어 윤도에게 쏟아졌다. 빙창은 이제 악마의 손이었다. 오각 빙창들이 내리꽂힌 몸에 붉은 선혈이 치솟았다. 마디마디 끊겨나간 살점과 멋대로 부러진 관절들. 너무나 참혹해 윤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악!”

비명은 꿈에서 깬 후에야 질렀다. 재빨리 몸을 보았다. 육체는 무사했다.

‘후우.’

겨우 숨을 내쉴 때 어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채 의원,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대답을 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따끈한 물에 이어 찬물로 마무리를 하니 겨우 정신이 맑아졌다.

“악몽 꿨어?”

식탁을 차려준 어머니가 물었다.

“그랬나봐요.”

“악몽이면 좋은 거네. 꿈은 반대라니까.”

“그렇죠?”

“이거 먹어봐. 우리 원장님이 채 의원 주라고 특별히 보내신 거야.”

어머니가 밀어준 건 울릉도 특산물 명이장아찌였다. 달착지근하면서도 깊은 간장의 맛이 좋았다.

“아버지는요?”

“아까 나가셨지. 요즘 신제품 개발한다고 또 난리다. 기술자금 대주는 곳도 생겼다나?”

“이제 슬슬 아버지 저력이 나오네요.”

“저력은 무슨... 다 우리 채 의원 침 덕분이지.”

“그 침의 시작이 누군데요? 아버지 어머니 없었으면 제 침도 없어요.”

위안부 할머니에게 배운 명언을 여기다 써먹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어머니는 공감 100%다.

“그러니까 아버지 잘 챙겨드리세요.”

“그래야겠다.”

어머니가 웃는 걸 보며 집을 나섰다. 집안이 화목하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아무 불편 없이 일에만 몰두하면 되니까.

기분 좋은 시작은 한의원에서도 이어졌다. 이번 주인공은 진경태였다.

“자, 잘 삭혀둔 새 발효차가 나왔습니다. 시원하게 마시고 하루 시작하세요.”

진경태가 내놓은 건 백야초였다. 백 가지 약초와 식물로 만들었다는 백야초는 독특하면서도 혀에 착착 감겼다.

“우리 실장님은 특별히 곱빼기.”

진경태가 정나현의 잔을 넘치게 따랐다.

“어, 그 잔은 왜 그렇게 많아요?”

승주가 괜한 태클을 걸었다.

“그럼 김 샘도 꽉꽉 눌러줘?”

“주세요. 맛 있는 건 꼭 실장님만 많이 주시더라.”

승주가 잔을 내밀었다. 진경태는 얼굴을 붉히며 그 잔을 채웠다.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마시는 한방차. 격조까지 높여주는 맛이었다.

잔을 놓을 때 윤도 전화가 울렸다. 하지만 가운 안에 들어있어 잘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울릴 때는 승주가 신호음을 들었다.

“원장님 전화 온 거 아니에요?”

“응? 전화?”

윤도가 전화기를 꺼냈다. 수신음은 끊긴 후였다.

“......?”

무심코 전화번호를 보던 윤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번호가 길게 찍혀있었다.

‘중국?’

국제번호를 떠올렸다. 중국 국가번호는 86이다.

‘중국은 아니고...’

보이스피싱일까? 다시 번호를 보려는데 같은 번호 전화가 들어왔다.

빠라빠라빵!

“왜요? 보이스피싱입니까?”

진경태가 물었다.

“아닌 거 같은데요.”

대답을 한 윤도가 전화를 받았다.

“......!”

전화를 받는 순간, 윤도는 바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원장님!”

직원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아, 아니... Hellow?”

윤도의 언어가 영어로 바뀌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묻는 목소리도 떨렸다.

“제 논문이 NEJM 게재 결정이 확정되었다고요?”

이제는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윤도.

“원장님...”

“자세한 건 이메일 참조...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윤도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두 손과 다리는 더 치열하게 떨고 있었다.

“원장님...”

승주가 물을 내밀었다. 윤도가 컵을 받았다. 물은 절반이나 흘렸다. 멋대로 요동치는 경련을 이기지 못하는 윤도였다.

“원장님...”

“잠깐, 잠깐만요. 컴퓨터... 컴퓨터...”

“접수대 것 쓰세요. 켜져 있어요.”

이번에는 정나현이었다. 윤도가 접수대로 뛰었다. 두 손이 미친 듯이 자판을 짚었다.

탁!

마지막으로 엔터 키를 칠 때는 자판이 부서질 정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