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265)

파죽지세의 쾌거-3

파죽지세의 쾌거-3

“다시 말씀드려요?”

류수완이 소리 높여 말했다.

“예.”

“그럼 잘 들으세요. FDA에서 우리 치매신약에 대해 최종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동시에 북미시장 진출도 가능하게 되었고요.”

“......”

“기대하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승인이 떨어지니 얼떨떨합니다. 게다가 승인을 전제로 접촉하던 북미시장의 마케팅 파트너에서도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좋은 조건으로 검토하겠다고 합니다.”

“......”

“채 선생님의 논문 힘이 컸습니다. 우리 제임스 이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논문 심사가 최종까지 설전이었다고 하더군요. 대체의학을 제도권 ‘위’에 세우느냐 하는 점에 대해 일부 심사의원들의 이의제기가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세가 기울다보니 전원 찬성이 나왔고 그 결과가 FDA의 승인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준 것 같습니다. 결국 선생님의 쾌거입니다.”

“......”

“듣고 계십니까?”

“예...”

“1년에 두 신약... 기가 막힙니다. 우리 회사의 10년 공든 탑보다 선생님의 1년이 더 큰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정말 인생 귀인을 만난 듯 합니다.”

“귀인까지야...”

“암을 치료해주고 사업까지 추진력을 주시니 어찌 아니겠습니까? 이 치매 신약, 제가 목숨 걸고 치매의 대표약으로 자리잡도록 마케팅을 펼치겠습니다. 그 길만이 선생님에게 보답하는 일일 테니까요.”

“사장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제가 지금 밀려드는 전화 받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연결해야 할 비즈니스 건도 많으니 정신 좀 차린 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류수완의 전화가 끊겼다. 그럼에도 윤도는 전화를 잡은 채 멈춰 있었다.

“선생님.”

안미란의 목소리가 윤도를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줄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치매신약.>

<북미시장 공략개시.>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에 이어 또 하나의 장쾌난 쾌거.

윤도는 온몸으로 퍼지는 벅찬 경련을 참느라 어쩔 줄을 몰랐다.

“선생님.”

“으어어...”

“선생님...”

“으아아아!”

마침내 윤도가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벌리며 포효했다. 인기나 명예, 돈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 옳다고 믿고 밀어붙인 일. 고통 받는 환자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했던 노력. 그 노력이 결실로 돌아온 게 기뻤다.

“원장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진경태가 윤도 위에 무너졌다.

“원장님...”

간호사들도 일동 발을 구르며 제 일처럼 기뻐했다. 북미시장만 개척된다면 돈으로 쳐도 수백 억의 수입은 보장될 일. 그러나 돈보다 많은 숫자의 보람이 윤도의 적혈구에 맺혀왔다.

“고맙습니다.”

진경태의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 선 자의 시야는 자꾸 높아지는 법. 감격을 내려놓고 시침에 나섰다.

다음 환자도 역시 위암환자였다. 같은 질환을 시침하면 시간 절약이 되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유사 질환 환자를 모아 예약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 선생님.”

시침을 앞두고 그녀와 잠시 미팅을 가졌다.

“아까 저한테 침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었죠?”

“선생님...”

“뭡니까? 질문하는데 그런 표정하고는?”

“진짜 존경스러워서요. 치매 신약이 FDA의 승인을 받고 북미시장에 진출할 거라면서...”

“그게 뭐요?”

“선생님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 같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거 같아요.”“그럼 내가 한의사가 아니잖아요?”

“......!”

“실망이군요. 한의사는 어디에서나 한의사여야합니다. 기쁘고 슬픈 일에 휘둘려서는 좋은 의술을 펼치지 못해요.”

“선생님...”

“제 말이 틀렸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안미란이 시선을 가다듬었다.

“질문 다시 이어보죠. 혹시 나에게 배우고 싶은 게 오장직자침입니까?”

윤도가 나노 침을 들어보였다.

“아닙니다.”

정신줄을 챙긴 안미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죠?”

“선생님의 그런 태도... 침을 내 몸처럼 여기며 환자를 보살피는 한의장침일체의 정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 분이 신약에 들떠요?”

“제가 잠시 본분을 잊고...”

“그 말 믿어도 되죠?”

“예.”

“좋아요. 그럼 이 환자 어떻게 시침해야할까요? 분 드릴 테니까 생각해보세요. 나도 안 선생님 질문에 답을 드리려면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하거든요.”

“테스트군요?”

“열정과 수준은 다른 문제입니다. 안 선생이 여기 오는 순간, 안 선생 역시 일침 한의원의 한의사가 되는 거니까요.”

윤도가 잘라말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게가 실린 목소리였다.

5분...

혼자 남은 안미란이 생각에 잠겼다. 테스트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안면을 내세워 꽁 먹으러 온 건 아니었다.

암...

여전히 심각하다. 특히 위암이 그렇다. 일반적인 통계에서 위암은 언제나 발생률의 머리를 차지한다. 남자만으로 국한하면 더욱 압도적이다.

이번 환자는 JJ병원에 예약을 한 상태에서 윤도에게 온 케이스였다. JJ병원에는 유명한 위암 집도의가 있다. 하지만 예약이 밀렸다. 그렇기에 이 환자는 4개월을 기다려야했다.

사실 이 상황 하나만으로도 안미란에게는 기적에 속했다. 왜냐면 현실과는 반대의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암...

수많은 암 환자의 주요 선택은 유명 대학병원이지 한의원이 아니었다. 근래 들어 한의원을 찾는 암환자가 늘고 있다지만 양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윤도를 찾아오는 환자의 경우에는 내놓으라하는 양방 병원을 두고 윤도를 선택하고 있었다.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환자의 데이터를 보았다. 진단서와 영상기록, 윤도의 진료기록까지 미친 듯이 스캔을 했다. 이 환자는 다소 좋지 않았다. 양방에서 3기의 끝자락 판정을 받은 것 외에도 식도와 위가 만나는 접합부까지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위의 기혈을 더 강하게 모아줄 필요가 있었다. 위를 구하려면 심장이나 소장의 활성이 필요했다, 무심하게도 5분은 10초처럼 빨리 지나갔다.

‘벌써?’

시계를 바라볼 때 딸깍, 문이 열리며 윤도가 들어섰다. 정확히 5분하고 4초만의 일이었다.

“어때요?”

벽에 기댄 윤도가 물었다.

“저라면 목극토(木剋土)와 화생토(火生土)로 가겠습니다.”

안미란이 대답했다. 윤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안미란의 시선만 겨눌 뿐이었다.

“틀렸나요?”

“본인이 내린 결정이라면 반문하면 안 됩니다. 확신도 서지 않은 진단으로 환자를 치료할 겁니까?”

“......”

“혈자리는요?”

“환자가 음식을 거의 못 먹는 상태라하니 위정격을 써서 기운을 회복시킨 후에 목극토의 원리로 위의 목혈 함곡혈과 담의 목혈 임읍혈을 보하고 중완에서 상완으로 투침하겠습니다. 이어 비수혈, 위수혈, 위수혈에 어제혈과 내관혈을 취혈하고 양문혈로 마무리합니다.”

“화생토는요?”

“어제혈이 폐를 다스리니 화(火)에 해당합니다.”

“내 말은 어떻게를 묻고 있는 겁니다.”

“화생토라지만 화가 지나치면 해가 됩니다. 위장, 즉 토(土)의 기를 기준으로 운행해야 합니다.”

“해보세요!”

윤도가 장침통을 넘겨주었다. 그야말로 전격적이었다.

“선생님.”

놀란 안미란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이번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지구 상에 안 선생님 밖에 없다고 생각하세요. 침을 찌를 수 있는 면허소유자는 지구상에 단 한 사람, 안미란.”

“......”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알겠습니다만...”

“응급상황입니다. 머리로 헛생각할 시간에 환자에게 뛰세요.”

윤도가 침구실을 가리켰다.

‘후우!’

환자 앞에 선 안미란이 소리없는 날숨을 쉬었다. 그녀의 몸은 벌써 땀으로 젖은 후였다.

다르륵!

그녀 손에 들린 장침통이 소리없이 떨었다.

암 환자.

안미란이라고 처음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윤도보다 더 많은 암 환자를 봤을 지도 모른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전적인 책임’이 아니라 ‘보조’였다. 조수황이나 마혁 등의 스태프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진료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중차대한 암환자를 앞에 두고 그녀는 혼자였다. 말하자면 중대한 수술방에 보조가 아니라 메인 집도의로 들어선 셈이었다. 떨림은 척추를 타고 발목까지 내려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윤도의 테스트. 시침에 성공해도 수락의 말이 떨어질까말까한 판에 포기하면...

‘안미란...’

그녀가 마른 침을 넘겼다.

‘이건 언젠가 올 날이었어.’

자기 최면을 걸었다.

‘언젠가는 모든 진료를 네 책임하에 하게 될 거야. 그 날이 조금 일찍 온 것 뿐이라고.’

‘너도 그 날을 원했잖아? 맨날 따까리만 한다고 징징거리던 날들 생각 안 나?’

‘침착해. 따지고 보면 경험도 충분해.’

‘자, 그럼 뭐부터 해야 하지?’

안미란은 또 다른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진료의 시작. 그건 당연히 진맥이었다. 환자의 맥을 잡았다. 차분하게 한 번을 더 잡았다. 그런 다음, 혈자리를 파악했다. 다행히 이 환자의 혈자리 분포는 정상에 속했다.

‘후우!’

숨을 몰아쉬고 침을 뽑았다.

바로 그때,

“선생님이 침을 놓는 겁니까?”

느닷없이 환자가 물었다.

“이건 기본 침입니다. 중요한 마무리는 원장님이 하실 거예요.”

안미란의 첫 침이 들어갔다. 환자에게 휘둘리지 않은 것이다. 머릿속이 하얀 상태에서 밀어넣은 침이 제 대로 들어갔다. 첫 단추가 중요했다. 첫방을 꽂으니 더는 두렵지 않았다. 안미란의 손이 혈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하나 하나 더할수록 손길도 차분해졌다. 마지막 장침을 넣었을 때 윤도가 들어왔다. 안미란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떠세요?”

윤도가 환자에게 물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환자가 대답했다. 50줄의 중년남자였다. 한참 가장의 책무가 무거워지는 나이였다. 그가 윤도를 택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콧줄과 심지였다.

그의 남동생이 3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았다. 가장 불편한 게 콧줄과 심지였다. 환자는 스스로 예민한 걸 알기에 윤도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물론 그 선택에 대한 우려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4기에 가까운 3기예요. 게다가 진행성 위암이라서 병원에서는 개복수술을 계획했었는데...”

침술로 정말 암 치료가 될까요?

확인 질문이 나왔다.

“진행성이고 말기라도 해서 희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윤도가 답했다. 대답하는 동안, 윤도의 손이 슬쩍 장침 두 개를 바로 잡았다.

“그렇죠?”

“그럼요. 인간의 기혈은 더하기 개념이 아니거든요. 1+1=2가 아니라는 거죠. 선생님과 제가 신뢰를 형성하면 1+1=100이 되기도 합니다.”

“100...”

“이제 그걸 만들어가야죠.”

윤도가 자신의 장침을 꺼냈다. 안미란이 시침한 부위는 그냥 두고 두 개의 혈자리에 침을 넣었다. 대장수혈과 천추혈이었으니 대장의 수혈과 모혈이었다.

느닷없이 왜 대장이었을까?

윤도의 진단이 그랬다. 환자의 위암 시작은 대장이었다. 그렇기에 대장에 대한 보를 더했다. 지켜보는 안미란은 아차 싶었다. 대장은 폐에 속한다. 폐를 짚었다면 마땅히 대장을 체크하는 게 옳았다.

‘이런 멍청이...’

안미란이 자책하는 사이에 윤도의 나노 장침이 출격했다. 위암의 본진과 식도와 위 접합부위로 나노 침이 들어갔다. 이 환자의 경우에도 약침은 영약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윤도의 시침은 피부를 어루만지듯 편안하게 들어갔다. 안미란이 보기에는 그랬다.

“선생님.”

타이머를 세팅하고 복도로 나오자 안미란이 울상을 지었다.

“할 말 있어요?”

“대장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다 잘하면 누구에게 배울 이유도 없지요.”

“자침은...”

안미란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3분의 1은 합격이고 3분의 2는 불합격입니다.”

“너무 얕게 들어갔군요?”

“그 반대입니다.”

“그럼 깊게?”

“익숙하지 않을 때는 차라리 얕게 넣으세요. 효과가 부족한 건 바로잡을 수 있지만 깊이 들어가 부작용을 만들면 바로 잡기 어려우니까요.”

“......”

“쉽지 않죠?”

“예... 저... 몇 년 더 배운 후에 선생님에게 다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안미란이 돌아섰다. 그녀가 보기에 윤도는 너무 높은 산이었다. 아직은 그 산에 오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안 선생님.”

“예?”

안미란이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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