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265)

“제임스 이사님도 혈자리 공부를 하신 모양이군요?”

“많이 했죠. 요즘은 아예 한국 한의사 시험에 도전하겠다고 기염입니다.”

류수완이 웃었다.

“특이한 혈자리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건 서양의학의 특이체질 이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인체는 신비해서 완벽한 표준화는 어려운 것으로 압니다. 그렇기에 체질이니, 유전이니, 환경이니 하는 변수를 고려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특이 혈자리를 알고 싶습니다만...”

제임스는 호기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특이한 혈자리라면... 혈자리가 깊거나 얕은 사람, 혹은 불규칙한 사람, 질병 등으로 뒤틀린 사람을 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또한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으음, 역시 명침명의의 설명이라 명쾌하군요.”

“궁금하시면 미국에 도착해서 침을 놔드리죠. 그럼 혈자리 공부가 확실하게 될 겁니다.”

“이야, 기대합니다. 저 정말 채 선생님 침 언제 한 번 맞아보고 싶었습니다.”

제임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1등석의 식사는 좋았다. 서비스의 품격도 달랐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윤도는 치매에 대해 복기를 했다. 서양의학의 본산으로 간다는 것, 더구나 미국내 병원 랭킹에서도 초상위에 드는 메사추세츠 병원이다 보니 겁대가리 없이 SS병원으로 왕진 가던 때와도 다른 기분이었다.

‘서양의학...’

본질적인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양방과 한방의 차이는 아주 간단하다. 양방은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체를 대상으로 연구하고 한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능적인 현상을 중시해 연구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차이가 두 의술의 거리가 되었다. 그 거리 때문에 두 의술은 친화적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양의학의 꽃으로 불리는 외과적 수술이 만병통치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수술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대두된 까닭이었다. 병든 병소를 절제하는 방식으로 회복을 도모한다고 해도 본래의 육체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구현하기는 힘들었다. 절제를 위한 마취의 거부와 부작용, 합병증 등도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나아가 양방의 약물거부작용, 내성, 축적으로 인한 위험 부담도 증가되었다. 특정한 약물에 대해 과민반응이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환자들 때문이었다. 이런 것 외에도 과학적인 한계로 인한 오진과 불치병은 여전히 많은 질환에 숙제가 되고 있었다.

한방은 그런 문제들에 있어 양방보다 자유로웠다. 과학으로 진단하지 못하는 질병에 대해서 해결책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에 일부 미국에도 한의사 제도가 존재하고 첨단 병원에서도 한방을 파트너로 택하는 경우가 생겼다. 메사추세츠 병원의 오퍼도 그런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다.

치매의 기본혈은 신문, 내관, 백회혈.

이제 웬만한 초기 치매는 오직 장침만으로도 잡을 수 있는 윤도. 그러나 미국인의 표준체형도를 머리에 그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장도.

이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도쿄와 베이징 갈 때와는 달랐다. 온몸의 좀이 쑤시고 또 쑤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걱정이 없었다. 윤도의 장침 덕분이었다. 중간 즈음에 윤도의 장침이 빛을 발했다. 일행의 피로를 싹 씻어낸 것이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스튜어디스에게도 서비스 장침을 찔러주었다.

“와아, 피로가 쫙 풀려요. 와아!”

스튜어디스가 너무 좋아했다. 그녀에 대한 서비스는 무한 서빙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공항이 가까워졌다.

비행기는 언제 착륙할까? 사실 착륙 안내방송도 떡밥에 불과하다. 비행기는 바퀴 내리는 소리가 들려야 착륙한다. 그 시간은 대개 착륙 5분전이다.

드드득!

마침내 바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 땅에 랜딩하는 것이다.

“At last I m here!”

연결통로를 밟은 제임스가 영어로 말했다. 이제부터 영어가 고생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입국심사장에 섰다. 도쿄나 베이징과 달리 입국심사가 굉장히 깐깐했다. 방문 목적과 체류기간, 숙소 등에 대한 질문이었다. 윤도가 영어로 답했다.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미국 교통보안청 TSA가 담당하는 미국의 보안검색은 역시 이날 따라 삼엄해보였다.

"테러경보라도 내렸나? 유난하네?"

미국인인 제임스까지도 고개를 갸웃했다.

앞서 나가던 정나현과 여직원이 먼저 걸렸다. 소지품 일체를 조사받았다. 젊은 여자에 대한 단속은 더욱 깐깐한 미국공항다웠다. 그 뒤의 제임스와 차 이사 등은 문제가 없었다. 윤도 역시 통과하나 싶었지만 검색직원이 가방을 잡았다.

“당신 거죠?”

“Yes.”

“열어보세요.”

“일용품 밖에 없습니다만.”

“열어보세요.”

배가 불룩 나온 직원은 오직 한 마디만 되풀이했다.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놓았다. 직원이 약침용액을 집어들었다.

“이거 뭐야?”

목소리가 까칠했다. 태도도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치료약입니다만.”

“의사처방.”

직원이 손을 내밀었다. 윤도가 처방을 건네주었다. 윤도 한의원과 윤도 이름으로 처방된 처방전이었다. 미국은 깐깐하다기에 미리 준비한 것이다.

“오리엔탈 닥터?”

“코리안 닥터입니다.”

직원의 말을 윤도가 바로잡았다. 직원은 퉁명스레 쏘아보더니 약물을 건너뛰었다. 그것으로 끝이면 좋았겠지만 더 큰 재앙이 닥쳐왔다. 직원이 잘 간수 된 신비경을 뽑아든 것이다.

“이건 뭐야?”

다시 빡센 질문이 나왔다.

“거울입니다만...”

“당신 호모야?”

“개인소장품입니다.”

“이건 안 돼.”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소지목적 불순, 흉기사용 가능!”

직원이 손잡이를 가리켰다. 손잡이 끝은 삼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걸 흉기라고 억지를 쓰는 직원. 황당한 사이에 직원이, 신비경을 압수물품 박스로 던져버렸다.

“안 돼!”

윤도가 몸을 날렸다. 신비경은 보물처럼 다루는 물건. 흠이라도 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한 마디로 본능적이었다.

현대의학의 심장부, 미국으로 가다-3

현대의학의 심장부 미국으로 가다-3

우당탕!

검색구간에 소란이 일었다. 신비경을 받아냈지만 압수물품통이 엎어지면서 쏟아진 것이다. 순식간에 검색직원과 보안요원들이 몰려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놀란 차 이사와 류수완이 검색직원들 숲을 헤치며 뛰어들었다. 제임스 역시 가방을 놓고 현장으로 뛰었다. 보안요원들 역시 점점 더 몰려왔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윤도는 혼자였다. 윤도네 일행 중에서 남자 넷은 조사실로 모셔(?)졌다. 각자 다른 방에 격리되어 조사를 받았다.

“오리엔탈 닥터?”

윤도 조사는여직원 둘이 맡았다. 주먹만한 안경을 쓴 여자가 물을 때도 윤도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No, 나는 코리안 닥터입니다.”

질문자는 두 단어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그런 것보다 이게 문제였던 거 같던데...”

안경 여직원이 신비경을 들어보였다.

“돌려주시오. 나에게 소중한 물건입니다.”

“No.”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규정상 반입불가입니다.”

“이유가 뭐죠?”

“소지목적 불명, 흉기사용 가능.”

“그건 그냥...”

소리를 높이던 윤도가 한 박자 늦게 뒷말을 이었다.

“내 할아버지의 유품일 뿐입니다. 내 분신과 같은...”

“분신?”

“나는 테러리스트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메사추세츠 병원에 진료차 가는 길이오. 거기 나를 기다리는 치매환자들이 있어요.”

“지금 조회 중입니다.”

“지금이 대체 얼마나 오래 걸리는 겁니까? 여기 온 지도 두 시간도 넘은 거 같은데?”

“우리 아메리카에 문제입국자가 당신만 있는 건 아니니까.”

‘쉣!’

“그리고 그쪽에서 명백한 회신이 와도 당신은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그건 또 왜죠?”

“당신의 소지품 중에 있던 약물들과 침들... 그 분석 시간도 필요하니까.”

“지금 그 약품을 뜯는단 말입니까?”

윤도가 펄쩍 뛰었다. 침은 그렇다고 쳤다. 하지만 영약을 비롯한 약침약품들. 모두 완전 멸균을 시켰다. 그걸 개봉하면 자칫 오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마약일 수도 있으니까.”

“이봐요. 그건 치료약품입니다. 의사의 처방도 가져왔고요.”

“그 진단을 내린 의사가 당신이라서...”

‘푸헐!’

“아무튼 기다리세요. 규정상 어쩔 수 없습니다.”

“내 일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 파티... 제임스와 류수완...”

“그 사람들은 조사가 끝났어요. 곧 나갈 겁니다.”

“불러주세요. 그 분들이 내 보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성인이고 보증인은 벌금이 부과될 때, 아니면 지갑이 비었을 때만 유효합니다.”

“그럼 변호사라도!”

“그건 조사가 끝나고 정식으로 회부되게 되면 들어드리죠.”

“......!”

윤도, 머리카락이 삐쭉 솟아올랐다. 아직 입국 전이었다. 게다가 미국 시민권자도 아니었다. 여기는 입국장. 윤도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이들 손에 있었다. 상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의심 가는 물품에 대한 조사. 아쉬운 건 윤도 쪽이었다.

그렇다면...

각을 세우거나 류수완 쪽의 조치를 기다리기보다 실력으로 헤쳐 가는 게 빠르다는 판단이 나왔다.

“이봐요. 그쪽...”

윤도가 다른 여자를 불렀다. 묵직함으로 보아 안경 낀 여자의 상사로 보였다. 그녀는 허리의 만곡 상태가 불량했다.

“왜 그러죠?”

책임자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당신들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코리아 닥터입니다. 누누이 말했지만 거울은 할아버지 유품이라 소지하고 있는 거고 침은 치료용, 약침용액 역시 시술을 위한 치료액입니다. 그러니 메사추세츠 병원에서 확인이 올 때까지는 손대지 말아주십시오. 혹시라도 검사 중에 오염이 되면 당신 나라의 치매환자를 고칠 수 없습니다.”

“치매환자?”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치매환자들... 나 코리아에서 치매신약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아까 그 기다란 침으로 치매환자를 고쳐?”

“그렇습니다.”

“아하하핫!”

책임자가 실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곧 웃음을 끊고 윤도를 쏘아보았다.

“그게 말이 돼? 중세의 마술사라면 몰라도?”

“그게 코리안 닥터입니다. 사람의 혈자리를 통해 만병을 치료하는 한의사.”

“혈자리?”

“그래요. 혈자리... 우리 몸에는 경혈이라는 혈자리가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치매환자도...”

“혹시 타투가 아니고?”

“젠장, 사람을 중세의 샤먼 쯤으로 보는 모양인데 이건 샤머니즘이 아니고 메디칼이라고, 코리아 메디칼. 당신 허리 오래 전부터 굽었지? 그런 것도 침 한 방이면 문제없어요.”

“내 허리?”

“Sure.”

“Are You crazy?”

“Never, I can!”

윤도가 소리쳤다.

“How to do?”

“내 침이 필요하지만 급한 대로 당신 볼펜으로도 가능해.”

“볼펜?”

“오케이!”

펜을 가로챈 윤도가 책임자의 거궐혈에 볼펜을 눌렀다. 놀란 안경 여직원이 제압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동작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책임자의 허리가 정상에 가까운 S자로 펴진 것이다.

“오 마이 갓.”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책임자가 입술을 떨었다. 이 허리 문제는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었다. 카이로프라틱부터 최신 교정술까지 거쳤다. 그래도 굽은 쇠처럼 끄떡도 않던 허리가...

“제대로 펴지고 싶으면 내 침을 가져오세요. 내 손거울과 약품에는 손도 대지 말고. 만약 내 신분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습니다.”

윤도가 볼펜을 돌려주었다. 책임자의 눈은 여전히 거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울 속에는 그토록 원하던 바른 허리의 여자가 있었다.

결국 책임자가 침대 위에 누웠다. 장침을 돌려받은 윤도가 침 두 방을 꽂았다. 거궐혈과 중완에 들어가는 뜨끈한 화침이었다. 그것으로 게임오버였다. 책임자의 척추가 말쑥하게 펴진 것이다.

“맙소사!”

책임자의 넋은 반은 나가있었다. 하지만 윤도의 시침은 이제 시작이었다.

“당신...”

“마리안느예요.”

“좋아요, 마리안느. 당신, 지금 하혈을 하지요?”

“예?”

책임자의 눈이 돌연 휘둥그레졌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윤도가 한 것이라고는 손목을 잡았다 뗀 것 뿐이었다.

“그것도 맑은 하혈을 할 겁니다. 소장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척골도 바르지 못합니다.”

“소장이라고요? 정형외과에서 말하기를 척골이 나쁜 건 척추질환에서 왔다고 하던데?”

“증거를 보여드리죠.”

다시 장침 하나가 들어갔다. 이번에는 천료혈이었다.

“나가 있을 테니 확인해보세요.”

윤도는 침을 꽂은 채 퇴장했다.

“악!”

안에서 책임자의 비명이 나왔다. 덩치 크다고 놀라지 않을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10여 년도 넘게 속을 썩이던 하혈까지...”

윤도가 들어서자 책임자는 두 손을 모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당신...”

윤도의 시선이 안경 여직원에게 건너갔다.

“당신은 얼굴의 홍조하고 빨간 여드름, 다리가 붓는 것이 고민이죠?”

“예?”

“아닙니까?”

“그, 그렇긴합니다만...”

장침 카리스마에 압도된 안경 여직원이 뒷걸음질을 쳤다.

“이리 오세요. 당신도 침 세 방이면 됩니다.”

“설마? 얼굴색과 여드름은 피부과에 몇 년 다녀도 못 고쳤고 다리도 늘 서서 일하다보니...”

“피부과는 표면적일 뿐이고 다리는 류머티즘 때문이라 특효 혈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싫습니까?”

“아,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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