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여직원도 침대에 눕혔다. 침을 넣기 전에 맥으로 확인절차를 걸쳤다.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은 심장 때문이다. 빨간 여드름의 발현은 위장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손목 발목이 부었으니 류머티즘임을 알았다. 그래도 만의 하나를 위해 확인하는 윤도였다.
안경을 벗겼다. 장침은 얼굴의 권료혈로 들어갔다. 침끝을 감아 사기를 밀어내자 여직원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빠져나갔다. 붉은 여드름은 위경락과 대장경락의 모혈 기를 조절해 해치웠다.
발목의 붓기는 소장수혈이면 되었다. 소장수혈은 류머티즘에 잘 먹힌다. 뜸이 좋다. 그렇기에 윤도의 침은 당연히 화침으로 들어갔다.
“티나, 얼굴이...”
책임자가 또 소리를 질렀다.
“왜요? 뭐가 잘못되었어요?”
놀라는 여직원에게 거울을 보여주었다.
“까악!”
여직원이 몸서리를 쳤다. 그녀에게도 고민이었던 얼굴의 붉은 기세와 빨간 여드름 덩어리. 그 것 때문에 늘 굵은 테 안경을 쓰던 불편에서의 졸업이었다.
“말도 안 돼.”
여직원은 거울을 보고 또 보았다. 발침을 한 후에도 얼굴은 다시 붉어지지 않았다. 여드름 역시 통쾌하게 ‘삭제’된 후였다.
“발목도 확인하세요.”
윤도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여직원의 입에서 또 한 번의 비명이 나왔다. 발목의 붓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방금 침을 맞은 자리는 튀어나온 광대뼈를 부드럽게 만드는 혈자리입니다. 위로 당기면서 입을 벌리면 갸름한 턱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V 라인 아시죠?”
미인되는 비법은 덤으로 안겨주었다.
“증명이 되었으면 제 소지품을 부탁드립니다. 미안하지만 열 시간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거든요.”
“그렇게 하죠. 티나!”
책임자가 안경 여직원에게 눈짓을 했다.
윤도의 짐이 돌아왔다. 신비경부터 확인했다. 약침액들도 무사했다. 그제야 그들이 각을 세운 이유에 대한 실토를 해왔다. 요주의 리스트로 내려온 아시안 출신의 테러리스트 용의자와 윤도 얼굴이 닮았던 것이다.
테러.
단어만으로도 학을 떼는 미국이기에 오버액션이 나온 것이다.
“쏘리, 쏘리!”
책임자와 여직원이 거듭 공식사과를 전해왔다. 그들 앞에 청구서를 내밀었다. 각각 10000불과 5000불이었다.
“......!”
두 여자가 입을 쩌억 벌렸다. 한국 같았으면 그냥 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을 겪었으니 경종과 함께 한의학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었다.
“10000불이나?”
“5000불이나?”
둘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년... 아니 정확히는 13년 전 된 고질병이었을 겁니다. 그동안 들인 치료비를 합치면 수만불 가량 되겠죠? 나아가 앞으로 죽을 때까지 거듭되는 치료비를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닙니다.”
윤도는 책임자부터 조이고 들어갔다.
“......”
“이것도 싸게 청구한 겁니다. 당신들의 과잉반응을 생각하면 100만불 소송도 불사할 생각이었습니다. 저가 침으로 도운 세계의 거물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
어느새 상황은 역전되었다. 윤도 침에 홀린 책임자는 유구무언이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나은 허리와 척골, 그리고 하혈... 거기에 과잉 검색으로 인한 인권침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특별히 5000불에 해드리죠. 그럼 되겠습니까?”
“Yes...”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티나?”
“네...”
“당신은 2000불에 해드리죠.”
“고마워요.”
티나도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장침의 위력은 굉장했다. 책임자와 여직원은 윤도를 류수완과 제임스 등이 기다리는 대기실로 안내했다. 윤도 일행이 공항을 나가는 것도 직접 도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일이 복잡하게 되는 것 같아서 영사관에 전화를 하고, 제임스도 여기 교통보안청의 지인을 동원하려던 참인데...”
류수완이 진땀을 닦으며 물었다.
“글쎄요, 마음이 변했는지 잘 가라고 차비까지 얹어주던데요?”
윤도가 100달러 지폐 70장을 흔들어보였다.
“채 선생님...”
“하핫, 미국인 혈자리 실습도 좀 하면서 실습비 좀 받았습니다.”
윤도가 웃었다. 그러자 정나현도 쿡 하고 함께 웃었다. 실습비라면 침이다. 그건 검색직원들의 공손한 태도가 증명하고 있었다. 류수완과 제임스가 궁리를 짜내는 동안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한 게 분명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숙소에 도착하면 이 돈으로 거하게 한 턱 쏘겠습니다.”
윤도가 입구를 가리켰다. 이유야 어쨌든 윤도로 비롯된 해프닝. 수습을 마친 윤도가 모두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가 가면 길이 된다-1
그가 가면 길이 된다-1
몇 시간 꿀잠을 잤다. 피로회복제를 먹었다지만 진정한 피로회복제는 역시 잠이었다. 일어나보니 오후 3시였다. 조금 더 잘까싶었지만 눈이 붙지 않았다. 창밖으로 골프장이 보였다. PGA라도 열리는 것인지 갤러리들이 많았다.
‘바람도 쐴 겸...’
윤도가 복도로 나왔다. 옆방에서 통화소리가 들렸다. 류수완의 목소리였다. 그는 잠도 자지 않은 모양이었다. 류수완은 열정적이다. 어쩌면 그 자신, 중병에서 벗어난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큰 병을 앓고 난 사람은 겸허하다.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류수완의 인생에 있어 폐암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 채 선생님!”
잠시 통화소리가 멎는가싶더니 류수완이 객실문을 열었다.
“왜 더 안 주무시고?”
류수완이 물었다.
“푹 잤습니다. 앞에 멋진 골프장이 있길래 바람이나 좀 쐴까하고요.”
“골프 좋아하시면 제가 부킹 연결할까요?”
“아닙니다. 갤러리가 많은 걸 보니 유명한 대회가 열리는 거 같아서 구경 좀 하려고요.”
“그럼 저도 같이 갑니다.”
“잠 안 자고요? 사장님이야 말로 레드 아이 그대로인데요?”
레드 아이!
밤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영어표현이다.
“한 30분 잤습니다. 저는 쪽잠으로 충분합니다. 일명 처칠 수면법이라죠.”
“너무 무리하는 건 안 좋습니다.”
“당연하죠. 하지만 몸이 느낍니다. 피곤할 때 쪽잠을 10-20분 자고 나면 머리도 몸도 가뜬하거든요.”
“그럼 가시죠. 어차피 제가 말한다고 들을 분도 아니고...”
“진작 그러실 것이지.”
윤도와 류수완이 나란히 호텔을 나섰다. 골프장은 도로 건너편부터 시작이었다. 윤도의 짐작대로 PGA 대회였다. 두 개의 홀을 지나니 갤러리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왜 구름 갤러리라는 표현이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따악!
갤러리 앞에 우뚝 선 선수가 장쾌한 드라이브 샷을 날렸다. 공은 까마득히 날아갔다.
“폼 죽이죠?”
류수완이 물었다.
“그렇네요. 사장님은 골프 치시나요?”
“이 나라에서 대학교 다닐 때 좀 쳤죠. 골프 동아리 출신이거든요.”
“부럽네요.”
“선생님이 치고 싶다고 하시면 PGA 선수이자 캐디출신 코치를 붙여드리겠습니다. 한국에 나와 있는데 저랑 막역한 사이입니다.”
“나중에 생각이 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골프가 보기보다 정교하고 세심한 운동입니다. 자기관리에도 도움이 되지요.”
류수완의 시선이 그린으로 향했다. 선수 하나가 퍼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홀까지의 거리는 약 8미터 정도. 잔디의 각도 읽는 시간이 긴 것으로 보아 만만한 퍼팅이 아닌 것 같았다. 캐디와 상의를 마친 선수가 자세를 갖췄다. 그의 시선이 공과 홀을 몇 번 오갔다. 호흡을 일치 시킨 골퍼가 공을 밀었다. 순간, 공의 궤적을 바라보던 골퍼의 손이 가슴으로 올라갔다.
“와아아!”
갤러리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공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홀에 빨려든 것이다. 그걸 바라보던 골퍼, 쾌재를 부르나 싶었더니 느닷없이 무너져 버렸다.
“빌런!”
캐디가 비명을 질렀다. 무너진 골프선수 빌런. 그의 손은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동시에 파랗게 질린 얼굴에 경련까지 일었다.
“까아악!”
갤러리 인파 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진행요원이 달려오고 의료진이 출동했다.
“제세동기, 제세동기!”
닥터가 악을 썼다. 응급상황이었다. 골퍼의 심장이 멎은 것이다. 제세동기가 오는 동안 의사가 CPR을 시도했다. 제세동기가 도착하자 재빨리 작동에 들어갔다.
팡팡!
몇 차례 시도해보지만 선수는 미동이었다.
“앰뷸런스, 앰뷸런스 불러요. 이대로 안 되겠어요.”
의사가 진행요원에게 외쳤다.
“잘 좀 해봐요. 빌런은 이 경기 포기할 수 없어요.”
캐디가 의사에게 소리쳤다.
“뭘 잘 합니까? 이대로 두면 목숨이 위태롭다고요.”
“빌런은 각오하고 왔습니다. 이 대회가 마지막입니다. 그린에서 죽을 각오로 출전했다고요.”
“닥쳐요. 그는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의사가 캐디를 밀었다.
“저 골퍼... 은퇴를 앞두었나? 뭔가 사연이 있나보군요?”
류수완이 중얼거렸다.
“아는 사람인가요?”
“한 때는 굉장한 사람이었죠. 오랫동안 투병한다는 말이 있어 은퇴한 줄 알았는데 대회에 나왔네요.”
그 사이에도 캐디는 완강했다. 그러나 점점 경련이 심해지는 골프선수...
“잠깐만요.”
윤도가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다.
“뭡니까?”
의사가 눈빛을 쏘며 물었다.
“코리아 닥터입니다. 제가 CPR 전문가입니다만.”
이번에는 살짝 오버를 곁들였다. 다른 말보다 빠르게 먹힐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잠깐 도와도 될까요?”
“그러시죠.”
의사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일단은 곡지혈과 심수혈을 엄지로 깊이 자극했다. 그런 다음 족삼리와 태충혈, 합곡혈에 강자극을 주자 빌런이 꿈틀 반응을 했다.
“소생하고 있어요.”
진행요원이 소리쳤다. 거기서 윤도가 장침을 뽑았다. 옷은 류수완이 벗겨놓았다. 윤도의 침은 거침없이, 사관혈을 열고 곡지혈과 족삼리혈에 들어갔다. 곡지에 이어 족삼리에서 침감을 더하자 골퍼의 흉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을 쉽니다.”
이번 목소리는 캐디였다. 윤도는 침감조절을 계속했다. 그러자 골퍼의 숨소리가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빌런이 깨어납니다.”
캐디가 갤러리들에게 외쳤다.
“와아아!”
환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소리와 함께 빌런이 눈을 떴다.
“빌런!”
감격에 겨운 캐디가 그를 껴안았다.
“공은?”
골퍼가 물었다.
“당연히 들어갔지. 한 타 줄였다고.”
“이분들은?”
골퍼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 선 윤도와 류수완, 의사와 간호사 때문이었다.
“심장이 잠시 정전이 되었잖나? 여기 코리아 닥터께서 바로 불을 켜주었네. 자네가 줄리앤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말일세.”
캐디가 소리쳤다.
“당신이...”
빌런의 시선이 윤도와 마주쳤다.
“심장 혈관이 좋지 않더군요. 보아하니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왜 이런 무리를?”
윤도가 물었다.
“메사추세츠 병원에 입원 중이라 수술날짜를 받아놓고 있다오. 우리 닥터 말이 내 심장수술이 대수술이라 다시 골프 치기 어렵다기에 그 전에 도망을 나왔다오. 이 대회에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목숨보다 특별할까요?”
“코리아라면 동양사람... 혹시 보이십니까? 저기 갤러리 맨 앞줄에 서있는 일곱 살 소녀 줄리앤?”
‘소녀?’
윤도가 시선을 옮겼다. 갤러리 중에 소녀는 없었다.
“자세히 보시면 보일 겁니다. 노란 리본 달린 옷을 입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빌런...”
옆에 있던 캐디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빌런을 대신해 이야기를 이었다.
“소녀는 우리 빌런의 1호팬입니다. 그가 신인 데뷔전으로 참가한 대회가 이 대회였어요. 그때 줄리앤을 만났죠. 1라운드부터 실수 연발이었는데 줄리앤만은 그에게 엄지를 세워주었습니다. 비웃지 않은 유일한 갤러리였죠. 그게 위로가 되어 이후 라운드는 제대로 돌았딥니다. 그러다 여기 악명 높은 16번 홀에서 다시 엄청난 실수를 했어요. 모든 갤러리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야유하지 않은 유일한 갤러리도 줄리앤 뿐이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빌런은 당당하게 3위 입상을 했습니다. 시상식날 그녀를 만났는데 뜻밖에도...”
이야기하던 캐디의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골퍼가 말하는 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선천성장애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그 후로 소녀와 트위터로 계속 연락을 했지요. 소녀가 말했습니다. 10년 후, 자기가 열일곱 살이 되는 해에는 이 대회에 꼭 참석해달라고. 열일곱의 의미는 목숨이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선천장애는 길어야 열일곱이 끝이라더군요. 그러니까 그녀가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한계를 뛰어넘는...”
“......”
“지지난해에 죽었어요. 공교롭게도 빌런의 심장에 문제가 생긴 해였죠. 의사들 역시 빌런의 골프대회 참가를 말렸지만 이 대회만은 포기할 수 없었어요. 줄리앤이 저기 갤러리들 틈에서 엄지를 세우며 응원할 걸 알기에...”
캐디의 설명이 끝났다. 몸을 추스린 빌런이 진행요원들에게 경기 계속의 의사를 밝혔다. 난처해진 진행요원들이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윤도에게 시선을 건네 왔다. 윤도가 구한 환자였기 때문이었다.
“심장문제라면 제가 돕겠습니다. 라운딩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도록 하죠.”
“뭐 그렇다면...”
윤도의 답이 나오자 의사가 OK 사인을 냈다. 손을 번쩍 들어보인 빌런이 다음 홀을 향해 걸었다. 갤러리들은 구름 박수로 빌런을 응원했다.
빌런은 결국 대회를 마쳤다. 스코어는 12위였다. 대회 측은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했다. 기념패를 받은 빌런은 소녀와 첫 만남을 가진 자리에 기념패를 놓았다.
“고맙습니다.”
빌런이 윤도에게 정식 인사를 전해왔다.
“짜릿한데요?”
호텔로 돌아오며 류수완이 말했다.
“그렇네요.”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서 대박낼 징조 같습니다.”
“어째서요?”
“공항에서는 액땜을 했고 산책길에서도 한 건 제대로 올리고... 이게 다 길조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길조는 나중에 찾고 식사부터 하죠? 슬슬 허기가 지는 데요?”
“아, 선생님이 쏜다고 했었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