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5/265)

“그것보세요. 이게 길조 아니면 뭡니까? 미국 도착 첫 식사부터 꽁으로 먹게 되니...”

“저는 꽁이 아니라 정당한 노력으로 번 돈인데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류수완이 정정을 했다.

“조크입니다. 다들 깨워서 식사가시죠.”

윤도 걸음이 빨라졌다.

메사추세츠 병원.

푸른 잔디 앞에 펼쳐진 외관은 기막히게 수려했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의 비즈니스까지 수려하지는 않았다.

한 시간...

두 시간...

회의실로 안내 받은 윤도 팀의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원래는 아침 회전이 끝나고 신경정신과 스태프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병원이다 보니 돌발이 많았다. 닥터들 호출도 그랬다. 누구는 상담 때문에 불려가고 또 누구는 수술장에서 긴급 호출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윤도네 차례는 자연 밀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미팅은 윤도 측이 <을>이고 병원이 <갑>이었다. 메사추세츠 병원은 호기심만 보였을 뿐 신약홍보의 기회를 원한 건 윤도 측이었던 것이다.

병원.

더구나 미국 초일류 병원.

소위 약 로비와 홍보 들어오는 제약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글로벌제약사도 아니고 듣보잡 동양의 제약사였다. 병원이 신약을 채택해주면 북미시장 개척에 날개가 될 판. 그렇기에 병원상황에 맞출 수 밖에 없었다.

“닥터 그리핀인데 돌발환자 때문에 늦고 있다는군요.”

미국행을 주선한 닥터와 통화를 한 제임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류수완 역시 라인을 통해 상황을 알아보지만 병원 사정상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역시 미국은 쉽지 않군.’

담담한 표정의 윤도도 내심 달갑지 않았다. 단숨에 신약원리와 효과의 위력을 떨쳐보려던 생각에 피로감이 쌓여갔다.

첫날은 그렇게 발길을 돌렸다. 기다린 시간만 무려 6시간이었다.

다음 날도 대동소이했다. 신경정신과 수석 레지던트가 다녀갔지만 그뿐이었다. 잠시 후에 다시 스케줄을 잡겠다던 말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채칵채칵!

또 다시 초침이 쌓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임상옥의 인삼거래가 떠올랐다. 중국업자들의 담합으로 개무시를 당하던 임상옥. 극약처방으로 대로에 인삼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그 소문을 듣고 달려온 중국업자들, 경악을 하고는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은 결국 불에서 무사한 인삼을 서너 배의 값으로 사들여야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지만 여기 사정은 달랐다. 치매신약을 병원 앞에 쌓아놓고 불을 지른다고 해도 달려올 건 소방차일 뿐이었다.

“차 이사.”

시간이 길어지자 류수완이 차 이사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힘들겠는데요?”

대답하는 차 이사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이라고 밝아질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게...”

차 이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윤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시려고?”

류수완이 물었다.

“제가 잠깐 착각을 했었나봅니다.”

“......?”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 굉장하지요. 하지만 미국 의학자들에게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학자들은 거기 자주 나올 테니까요.”

“......!”

“치매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다른 오리지널을 가지고 있는 경쟁제약사에서 비즈니스를 펼쳤을 수 있습니다. 기회라는 거 우리가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채 선생님...”

“그렇다면 앉아서 기다릴 게 아니라 기회를 찾아나서는 게 옳지않을까 합니다.”

“......!”

윤도의 선언에 모두가 하얗게 굳어버렸다.

미국 전역에 걸쳐 초상위권으로 평가되는 메사추세츠 병원. 그렇다면 세계적으로도 당연히 최상위권이었다. 동네 병원이 아닌 다음에야 복도에 나가서 뭘 어쩐단 말인가? 지나가는 환자를 붙잡고 호객 의료라도 한단 말인가?

하지만!

류수완은 윤도와 통했다. 그는 군 말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시죠.”

문까지 열어주는 류수완이었다.

복도로 나온 윤도는 병원 안내도를 숙지했다.

“저는 뭘 도울까요?”

정나현이 다가와 물었다.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이 나가는 통로를 알아오세요.”

윤도 지시를 받은 정나현이 간호사 데스크로 달렸다.

“2번 출구의 후문 쪽이랍니다.”

그녀는 바로 결과를 가져왔다. 윤도가 그쪽으로 걸었다.

“어쩌시게요?”

차 이사가 물었다.

“여기 의사들에게 가장 크게 어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난치병을 고치거나 불치병을 고치는 거겠죠?”

“그야...”

“그보다 더 큰 게 있습니다.”

“......?”

“죽은 환자를 살려내는 거죠.”

“죽, 죽은 환자?”

“물론 운이 닿아야합니다. 게다가 진짜로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지요. 하지만 의학적 사망선고가 나왔더라도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남아있다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채 선생님...”

“어차피 도전 아닙니까? 기왕 도전하는 거라면 통 크게 도전해보자고요.”

윤도가 선언했다. 윤도의 일행은 고압 감전이라도 된 듯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그가 가면 길이 된다-2

그가 가면 길이 된다-2

Waiting.

기다리는 거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기약도 없는 기다림... 사망자 통로로 나온 윤도의 발에도 초침이 쌓여갔다.

한국이라면 사체안치실 앞에서 기다리면 될 일. 하지만 미국의 장례문화는 한국과 달랐다. 한국은 사망자가 나오면 닥치고 장례식장이다. 시신운구차가 달려와 이동을 하더라도 역시 장례식장이다.

미국에서는 Funeral home이 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고인에게 화장도 하고 정장도 입힌다. 많은 경우의 장례식이 즐겁게 진행된다. 평소 고인이 했던 말이나 같이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족 중의 누군가가 소개하면서 장례식을 즐겁게 이끈다. 퓨너럴 홈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묘지에 가서 시신을 묻으면 끝인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윤도였다.

길은 다른 곳에서 열렸다. 그걸 물어온 건 정나현이었다. 촉이 빠른 그녀답게 윤도 옆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윤도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를 알고 있었다. 바로 응급실이었다.

“원장님.”

케이스를 잡은 정나현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응급실 쪽으로 가보세요.”

“응급실요?”

“자액사 환자가 둘 실려 왔는데 둘 다 사망판정이 내렸어요.”

“......!”

자액사(自縊死)라면 목을 매어 자살한 사람이다. 윤도는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응급실 앞에서 막혔다. 미국의 응급실 관리는 철저했다. 외부인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별 수 없이 보호자를 찾았다. 잠시 후에 사망자 하나가 실려 나왔다. 애도를 표하는 척 사망자 시트 위로 손을 올렸다.

“목을 맨지 얼마나 되었죠?”

시신을 운구하는 직원에게 물었다.

“열 시간 가까운 모양입니다.”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기회를 엿보던 윤도의 손이 흰 시트를 들추고 시신의 복부로 들어갔다.

“......!”

윤도 피가 확 달아올랐다.

“저기요...”

운구차를 기다리는 사이에 보호자에게 말을 건넸다.

“남편 되시나요?”

“예...”

“안타깝습니다.”

“예... 최근에 실직문제로 고민하더니 이렇게 허망하게...”

“죄송하지만 이 분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뭐라고요?”

보호자가 격하게 반응했다.

“죽은 거 같지만 아직은... 제가 코리아 닥터입니다.”

“코리아 닥터?”

“죄송하지만 침을 한 방 쓸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동양의 기 아시죠? 목숨을 가로 막은 사기를 풀어주면 남편께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봐요.”

옆에 있던 정나현이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뉴잉글랜드 저널과 도쿄의 기사, 베이징 기사까지 쭉쭉 넘어갔다. 한글은 모르지만 윤도가 의사라는 증명은 충분했다.

“고인께 위해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 분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응급실 닥터들은 이미 사망선고를 내렸어요.”

“여기... 여기를 만져보세요.”

윤도가 시신의 명치를 가리켰다.

“아직 미온이 남아있을 겁니다. 숨이 끊긴 것 같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

남편 사체의 명치 아래에 손을 넣은 중년부인,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머리에 침 한 방이면 됩니다.”

윤도가 장침을 꺼내보였다. 정나현은 관련 이미지를 검색해 화면으로 보였다. 중년부인이 망설일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골프장에서 보았던 골프선수 빌런이었다.

“어, 선생님.”

빌런이 반가이 다가왔다.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덕분에 대회 잘 치뤘습니다.”

“별 말씀을... 이제 수술하시러 온 모양이죠?”

“예.”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중년부인의 눈빛이 변했다. 뉴스 때문이었다. 빌런의 골프대회 뉴스가 훈훈한 미담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 뉴스에 나온 신기한 의사라는 분이?”

중년부인이 빌런에게 물었다.

“네, 이 분이 그 분입니다.”

그 말을 들은 중년부인이 결단을 내렸다.

“좋아요. 딱 한 번만이에요.”

허락과 동시에 윤도의 침이 백회혈을 겨누고 들어갔다.

백회혈!

원래는 몇 혈자리를 찔러야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허락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윤도, 백혈이 모인다는 백회혈에서 승부를 거는 것이다. 그 사이에 운구차가 도착했다. 직원들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정나현의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윤도가 그렇다면 그런 것. 시간만 보장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는 그녀였다. 하지만 낯선 미국 땅에서 한의사의 위상은 한국과 또 달랐다.

운구 직원들이 가까워졌다. 돌아보니 윤도는 아직 침감을 조절 중이었다. 기지를 생각한 정나현. 다가오는 운구 직원들 앞에서 이마를 짚으며 무너졌다.

“이봐요!”

죽은 사람보다야 산 사람이 우선. 운구차 직원들은 정나현을 부축해 일으켰다. 두 남자에게 은근히 매달린 정나현은 더욱 늘어지며 시간을 끌었다.

그 순간 중년부인의 비명이 병원을 흔들었다.

“허니!”

비명을 들은 정나현이 운구직원을 밀치고 뛰었다.

“원장님.”

“살았어요. 맥이 돌아오고 있어요. 와서 도와줘요.”

윤도가 소리쳤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환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요. 다 빠질 정도로...”

윤도 지시가 떨어지자 정나현이 시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허니!”

“당신은 가서 이 병원 닥터들 데려와요. 환자가 살아났다고!”

윤도가 중년부인을 다그쳤다. 그러는 사이에도 윤도의 손은 가슴을 눌러대고 있었다.

“......!”

응급실이 당장 뒤집혀 버렸다. 의사 세 명이 사망판정을 내렸던 환자. 그 환자가 응급실을 나간지 10여 분만에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바이탈 사인을 보면서도 의사들은 고개만 저었다. 아까는 침묵하던 바이탈 사인이 활기찬 그래프를 그려대고 있었다.

“당신...”

닥터 하나가 윤도를 돌아보았다.

“이 병원 정신신경과에 초대받은 코리아 닥터입니다. 뭘 보고 있어요? 항문을 막아야하니까 도와주세요.”

“항문?”

“항문이 벌어져 기가 나가면 끝장입니다. 거즈 좀 가져다주고요.”

세 닥터를 향해 윤도가 악을 썼다. 닥터들이 황당해하는 사이에 간호사가 거즈를 가져왔다. 윤도가 그것으로 환자의 항문을 막았다.

“또 한 사람 있죠? 자액사, 아니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

“저쪽에...”

닥터가 구석을 가리켰다. 얼굴까지 시트로 덮인 걸 보니 진단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제가 잠깐 진찰해 봐도 되겠어요?”

“그러세요.”

얼떨결에 닥터 허락이 떨어졌다. 윤도가 시신을 살폈다.

“이 사람은 목 맨 지 얼마나 되었나요?”

“다섯 시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간호사가 대답했다. 윤도는 닥치는 대로 거즈를 잡았다. 그런 다음 환자의 코와 입을 두툼하게 막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트까지 당겨 사망자의 얼굴을 덮고 눌렀다. 놀란 간호사가 제지하려했지만 윤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바로 닥터를 끌고 왔다.

“이봐요.”

돌발상황에 놀란 닥터가 눈을 부라렸다. 환자 하나를 살린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윤도가 하는 행동은 망자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었다. 지시를 받은 응급실 직원 둘이 달려와 윤도를 제압했다.

“잠깐만, 잠깐이면 된다고!”

윤도가 악을 쓰자 빌런이 거들고 나섰다.

“조금만 지켜봅시다. 이 분이 골프장에서 나를 살려준 코리아 닥터예요.”

빌런의 말에 닥터가 반응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병원 의사들 몇이 빌런에게 레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닥터와 원장 등이 그 부류에 속했다. 그렇기에 닥터는 골프장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한의사가 윤도인 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그 순간 사망자의 하체가 들썩 움직였다.

“......!”

놀란 직원들이 윤도에게서 물러섰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죽은 사람 엉덩이가 들썩거리다니? 그대로 윤도는 누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망자의 손까지 부들거렸다. 그제야 시트를 벗기고 거즈를 치워주는 윤도였다.

“푸하!”

망자는 물 속에서 나온 사람처럼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숨을 막아 숨을 재생 시키는 법. 동의보감에 나오는 고전적인 회생법의 하나였다.

“됐어. 이제 당신들 마음대로 해!”

윤도가 닥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응급실 전체를 압도하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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