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어!”
그리핀이 탄식을 토했다.
“일단 확인부터 해 보도록.”
원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방광암 검사까지 말입니까? 그건 무시하죠?”
수석 닥터가 의견을 개진하고 들어왔다.
“아니, 둘 다 진행하도록. 응급으로!”
“원장님.”
“동양에서 온 의사의 기가 너무 살았지 않나? 응급실 일로 체면 정도는 살려줄까 했는데 너무 오버하고 있어. 치매신약을 선보이려고 왔다면서 주제를 잃은 것 같으니 주제파악 시켜서 돌려보내자고.”
원장이 웃었다. 시린 얼음이 배인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응급으로 실시한 각종 검사결과 때문이었다.
“......!”
그리핀에게서 첫 번째 결과를 받아든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원장과 수석 닥터였다. 사흘 전에 찍은 뇌파사진과 방금 찍은 뇌파 사진... 두 그림은 아주 달랐다.
“원장님...”
“인지기능 검사도 했나?”“간이검사로 진행하고 있답니다.”
“활성산소 검사는?”
“그 또한...”
“으음...”
“뇌파검사를 다시 시켜볼까요?”
“아니야.”
“......”
침묵하는 사이에 인지기능 검사결과가 들어왔다. 그 결과 역시 굉장한 호전이었다. 그 꼬리를 물고 활성산소 검사치가 올라왔다. 그걸 받아든 원장이 바로 휘청거렸다.
뇌의 활성산소 검사...
혈관성 치매는 뇌조직의 손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뇌조직 중에서도 해마의 신경세포 사멸이 치명적이다. 그 해마의 신경세포를 사냥하는 게 활성산소였다. 활성산소가 늘어나면 지방과 DNA 사멸을 통해 신경세포가 죽는다. 그렇기에 이에 관여하는 효소의 활성을 막는 연구가 한참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활성산소가 현저하게 다운되어 있었다. 거의 동 나이대의 정상에 가까운 결과였다.
“원장님, 이거...”
수석 닥터는 몇 번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미는 방광암 검사였다. MRI상에서 의심스러운 메스가 나왔다. 다른 조직에 가린 기묘한 위치. 그러나 윤도가 짚어둔 딱 그 자리였다.
<암으로 의심 됨.>
방사선 닥터의 방점은 너무나 명쾌했다.
“슐츠...”
원장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예.”
“동양인들이 쓰는 말에 ‘귀인’이라는 단어가 있더군. 아나?”
“중국 영화에서 들은 적은 있습니다.”
“호기심이 아니라 귀인이 오셨군.”
“......”
“귀인이야...”
원장의 시선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윤도를 인정하는 시선이었다.
이때부터 병원의 시각이 180도 변했다. 신약의 효과입증이 아니라 진료권까지 허락된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행자로 지정된 그리핀이 예의를 갖춰왔다. 사무적이던 아까와는 다른 태도였다.
“이제 능력 테스트는 끝난 겁니까?”
윤도가 물었다.
“예.”
“그럼 앞장 서세요.”
“어떤 환자부터 신약을 써보시겠습니까? 저희 소관 환자들은 딱 한 명만 빼고 모두 신약체험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응급실 기적을 들었거든요.”
“그건 기적이 아닙니다.”
“아, 예...”
“현재 입원 중인 환자가 몇 명이죠?”
“앞서 본 환자를 포함해 모두 21명입니다.”
“그럼 차례차례 돌겠습니다. 동선을 그렇게 잡으세요.”
“기준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질환의 경중이나 환자의 상태...”
“당신들 병원은 사람을 가렸지만 제 신약과 장침은 환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윤도의 대답은 준엄했다. 아픈 곳을 찔린 그리핀이 앞장을 섰다. 윤도의 본격 진군이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한의사입니다. 치료 좀 해드릴 게요.”
환자 앞에서 허락부터 구했다. 멍한 시선의 환자였지만 환자의 권리는 잊지 않았다.
첫 환자는 침 세 방으로 끝을 냈다. 다행히 기혈의 부조화 쪽이었다. 그렇기에 닥치고 시침이었다. 뇌에 가득 찬 사기만을 조절했다. 발침을 하자 벽을 보며 웅얼거리던 노인이 윤도에게 말을 걸어왔다.
“동양인이시네? 차이나? 재팬?”
“코리안입니다.”
윤도가 웃으며 답했다. 신약 약침 세 방이 불러온 개가였다.
두 번째 환자는 참관하겠다는 보호자부터 한 방을 찔러주었다. 장침을 본 환자가 공포에 질린 까닭이었다.
“생각처럼 아프지 않습니다.”
윤도의 서비스였다. 보호자의 이해도 의술에 있어 중요한 덕목이었다. 아버지의 치매간병으로 늘 기침이 떨어지지 않던 40대 딸. 노궁혈에 장침을 찌르자 거짓말처럼 기침이 멈췄다.
“어머!”
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의 치매도 그렇게 시원하게 날아갈 겁니다.”
윤도가 웃었다. 딸은 더 이상 우려하지 않았다.
이 환자는 오래 걸렸다. 환자에게 딸린 화면을 보니 누워있는 종합병원이었다. 치매 때문에 신경정신과 병동에 와있지만 치매만 심각한 게 아니었다.
족삼리와 곡지혈부터 선조치를 취했다. 환자의 기는 바닥을 지나 지하실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윤도의 신침으로도 침으로 인한 졸도가 예상된 것이다. 다음으로 사관혈을 죄다 잡았다. 침이 감기는 우려까지도 조치한 후에야 장침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첫 치료침에는 신약 약침액을 쓰지 않았다. 위정격이었다. 양곡혈과 해계혈에 보법을 썼다. 환자의 기운부터 회복 시키려는 의도였다. 침감으로 기운을 일으키자 환자의 근육에 힘이 들어왔다.
‘오케이.’
숨을 돌린 윤도가 시침에 들어갔다. 첫침부터 일침이혈이었다. 손목의 외관에서 내관혈까지 찔렀다. 다음으로 들어간 두 침은 모두 일침사혈이었다. 후계혈에서 소부, 노궁, 합곡혈로 이어지는 자침, 신문에서 음극, 통리, 영도혈로 이어지는 자침이었다. 이 두 침은 사지의 불편과 신경쇠약을 위해 사용했다.
장침은 쉴 새도 없이 출격했다. 귀의 혈자리 이문과 청궁, 청회혈에 일침삼혈이 들어가고 얼굴의 사백과 거료, 지창혈에도 꽂혔다. 그 또한 일침삼혈이었으니 안면신경마비를 잡으려는 시도였다.
그때마다 환자의 표정이 변했다.
어쩌면 산송장에 불과하던 환자에게 인격이 돌아오고 있었다.
환자 옆에서는 두 사람이 벌벌 떨었다. 딸은 감격으로 떨었고 닥터 그리핀은 충격으로 떨었다. 무심한 건 윤도와 정나현이었다. 두 사람은 무아지경으로 손발을 맞춰가며 침을 넣고 있었다.
The Korea Doctor-2
The Korea Doctor-2
‘아아...’
지켜보던 그리핀은 신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동양의 침술. 영화나 드라마로 본 적은 있었다. 솔직히 미친 듯이 비웃었다. 그깐 가느란 침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오히려 조직이나 장기에 손상만 줄 뿐이라며 평가절하했다. 기혈이 어쩌고 음양이 저쩌고 할 때면 동양의 한계라며 콧방귀까지 뀌었다.
그런 차에 수석 닥터의 통보를 받았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한의사가 신약홍보 차 방문할 거라고. 혈자리에서 작용한다는 신약의 시범을 보여줄 거라고. 그 방문과 진행을 맡으라는 분부였다.
‘감히 겁대가리 없이...’
그리핀의 속마음은 그랬다. 여기가 어딘가? 현대의학의 본산 미국이었다. 그 중에서도 메사추세츠 병원이었다. 존스 홉킨스나 메이요 병원에 견주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명문이었다. 그런 곳에 감히 한의사 나부랭이가?
의기양양하던 자부심은 윤도의 장침 하나하나 마다에서 내려앉고 있었다. 그 자신은 기고 날아야 뇌신경, 그것도 치매를 고칠 뿐이었다. 아니, 이 병원의 어느 닥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치료하는 건 단지 전공분야의 질환. 그러나 이 동양인 한의사는 영역이 따로 없었다.
더구나 그가 사용하는 장비가 무엇인가? 수억에서 수십억 하는 찬란한 AI 첨단장비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료기기와 관련 인력의 힘을 빌지 않으면 무장해제 당한 것과도 같은 그리핀...
기혈은 헛소리.
침술은 개나발.
마구 비웃던 그리핀의 긍지는 길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 사이에도 윤도의 장침은 쉴 새 없이 출격했다. 이마 위의 상성혈에서 신회, 전정, 백회를 잇는 일침사혈에 이어 다리의 족삼리에서 상거허, 조구, 하거, 해계혈을 찌르는 일침오혈까지 나왔다. 이로써 가시지 않는 만성 두통과 하지의 불편까지 제압하는 윤도였다.
“12분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정나현에게 타이머 지시를 내렸다. 정나현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지시를 이행했다.
“약침 들어가실 건가요?”
“예, 세 개만 준비하세요.”
잠시 땀을 씻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땡!
타이머 소리와 함께 정나현이 발침을 했다.
“선생님...”
침술에 심취한 딸이 물을 한 잔 권해왔다.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성의를 생각해 원샷으로 넘겼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딸은 윤도보다 더 깊은 땀에 젖어있었다. 왜 아닐까? 현대의학이 기막히다지만 그녀에게는 구두선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병은 해를 더할수록 하나하나 늘어갔다. 자고 나면 병명이 추가되고 해가 지면 또 하나가 덧붙여졌다.
하지만 윤도는 반대였다. 침 하나가 들어가면 아픈 부위가 좋아지는 게 보였다. 딸은 투시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딸이다. 아버지의 표정만 봐도 알아차리는 그녀였다.
“이제 치매를 잡을 겁니다.”
“선생님...”
“행운을 빌어주세요.”
한 마디를 남긴 윤도가 약침용 장침을 받아들었다. 이 환자의 치매치료혈은 신문혈과 중층혈, 그리고 구미혈이었다. 원래는 후계혈과 백회혈을 추가해야하는 상황. 그러나 다른 질환을 잡기 위해 그 자리에 침을 꽂았었기에 재차 자침할 필요가 없었다.
마무리는 신문혈에서 했다. 혈자리가 약간 떠있지만 문제는 없었다. 침끝으로 살며시 혈자리를 누르며 사기를 뽑아냈다. 환자의 표정이 더 평안해지는 게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침을 끝낸 윤도가 환자에게 말을 건넸다.
“땡큐 쏘 머치.”
환자가 반응했다. 가늘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아버지.”
딸이 폭주했다. 수삼 년 간 듣지 못하던 아버지 목소리였다. 들린다는 게 그저 신음소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말을 하는 것이다.
“엘리제...”
그 기대를 알았던 걸까? 환자가 결국 딸의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딸은 침대 난간을 잡고 무너졌다. 그럴수록 그리핀의 어깨는 더 내려갔다. 그는 유망한 의학도였다. 환자를 회복시키며 여러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윤도에 비하니 하잘 것 없었다. 그 자신이 한 일이 치료였다면 윤도의 의술은 차라리 신화였다.
세 번째 병실, 이제 그리핀은 더욱 공손해져 있었다.
18명의 환자.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그나마 좋은 건 참견의 실종이었다. 도쿄나 베이징처럼 환자의 신분에 따른 줄세우기도 없었다. 윤도는 이제 그 마지막 환자들 앞에 섰다. 70대 중반의 환자는 알츠하이머성이었다. 아주 특이한 환자였다. 쌍둥이인 것이다.
쌍둥이...
누워있는 모습도 똑 같아보였다.
“3년 전에 발병했습니다. 처음에는 언니가 실려 왔는데 간병하던 여동생도 2달 후에 치매판정이...”
그리핀이 히스토리를 알려주었다.
“쌍둥이는 닮는다더니 질병까지도 그런 걸까요?”
정나현이 윤도를 돌아보았다.
“잠깐만요.”
윤도가 언니 쪽으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한의사입니다.”
늘 그렇듯이 인사부터 했다.
“치료 좀 해드릴 게요.”
허락을 구하고 진맥에 들어갔다. 자매 역시 오장육부가 좋지 않았다. 3년 전의 발병으로 입원한 두 사람. 병원에 들어오면 일단 활동량이 줄어든다. 긴 세월을 누워지내니 호흡기와 소화기계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언니는 비장.
동생은 심장.
두 쌍둥이의 치매발병 근원이었다.
“원인은 달라요.”
맥을 짚은 윤도가 결과를 말했다.
“쌍둥이는 원래 하나가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프다는 말도 있던데...”
정나현의 걱정이 무거워졌다. 똑 같은 사람이 나란히 누워있는 걸 보니 연민이 승수로 늘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쌍둥이에 대한 연민은 1+1=2가 아니라 22=4가 되고 있었다.
“침 좀 놔드릴 게요. 편안히 계세요.”
다시 허락을 구하고 시침에 들어갔다. 시작은 언니부터였다.
“......!”
약침을 넣던 윤도가 동작을 멈췄다. 침감이 좋지 않았다.
“안 좋아요?”
눈치를 차린 정나현이 물었다.
“잠깐만요.”
침을 내려놓은 윤도가 다시 맥을 잡았다. 오른손목의 관맥이었다. 관맥은 비장의 정보창과 다르지 않다. 한참을 집중했다. 기가 바닥난 비장. 그런데 아련한 맥을 따라 전해오는 아우성이 있었다. 한 번 더 집중했다. 느낌이 사라졌다.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 이제는 또 사기가 느껴졌다.
‘젠장!’
윤도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선생님.”
그리핀이 다가왔다. 그도 뭔가 좋지 않은 감을 잡은 것이다.
“아무래도 비장에 암이 생긴 거 같습니다.”
“......?”
“잠깐만요.”
이번에는 동생 쪽으로 옮겨갔다. 정나현의 말이 귀에 거슬린 까닭이었다.
쌍둥이는 병도 닮는다. 그런 말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
맥을 잡은 윤도가 숨을 멈췄다. 이번에도 신중해야 했다. 이 비장암의 맥은 숨바꼭질 타입이었다. 한 번은 잡히지만 그 다음에는 숨는 것이다.
“선생님.”
“이 사람도...”
윤도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둘 다 비장암의 기운이 있었다.
“비장암입니까?”
“이 위치입니다. 암 크기 자체는 작은데 주변 침윤 범위는 넓은 거 같네요.”
“......”
“암까지 동시 치료로 가겠습니다.”
“암... 암도 침으로 가능합니까?”
그리핀이 휘청거렸다.